마흔, 그대 14. 바실리 트로피닌 <레이스 뜨는 여인>
진료를 마치고 병원을 나서는데 보드라운 햇살이 회전문을 건너옵니다. 겨울이 나름 혹독해서였을까요? 그 보드라움이 사라질 게 아까워 진료비 명세서를 든 채 잠시 서 있었습니다. 병원을 방문한 아픔 많은 이들의 야윈 등을 토닥이며 햇살은 한 칸씩 유리창 안으로 떨어졌습니다. 역시, 입춘이군요!
인간은 왜 봄을, 또 따뜻함을 그리워하는 걸까요? 홀로 서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누군가 곁에 있기를 바라는 걸까요? 물음에 귀 기울이는 이 없고, 질문에 답할 이도 없지만 병원 회전문 앞에서 잠시 행복했습니다. 주사 바늘로 여러 번 찔렀으나 혈관을 찾지 못한 탓에 시퍼레진 손 등을 "괜찮아"라고 어루만지는 봄을 만났으니까요.
아직 센 바람에 자라목을 하고 걸었습니다. 아, 병아리 솜털같이 노란 아기 누빔 옷이 쇼윈도에 걸려 있네요. 저도 모르게 발길이 상점을 향했습니다. 문을 열자 "뎅뎅" 종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마법처럼 그림 속 이 여인이 절 바라다보고 살짝 미소 짓는 게 아니겠어요?
아마도 저 입술은 미소만 지을 거예요. 어떤 날카로움이나 거칠음도 내뱉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저 손가락은 고귀함만 닿을 거예요. 어떤 경박함과 비루함도 만지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난해하고 복잡한 일들도 그녀의 손끝에서 정갈하고 단정한 레이스로 짜여 우아하게 펼쳐질 거예요.
이 그림, <레이스를 뜨는 여인, 1823년>은 바실리 트로피닌(Васи́лий Андре́евич Тропи́нин, 1776~1857)이 그렸습니다. 그는 바늘에 수없이 찔린 자신의 삶을 인내심 갖고 매만졌고, 품위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삶'이 한 필의 완성도 높은 '피륙'이 되도록 자신만의 문양을 넣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바실리 트로피닌은 러시아 노브고르드 지방, 안톤 세르게예비치 미니크 백작의 농노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백작의 딸이 모르코프 백작 집으로 시집갈 때, 결혼 지참금 중 일부였습니다. 재산으로 취급되던 농노의 피할 수 없는 팔자였지요.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그의 손재주가 탁월하다고 느낀 모르코프 백작은 그를 사촌이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냈습니다. 제빵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고급 제빵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었습니다. 불운인지 행운인지 당시 예술 교육의 산파였던 'Imperial Academy of Arts(순수예술 분야의 인력을 양성한 혁명 이전 러시아 최초이자 유일한 주립고등 교육 기관)'도 있었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그는 몰래 미술 강의를 들으러 다녔습니다.
꼬리가 길어 그의 도강(盜講)이 사촌 알렉세이 모르코프 백작에게 발각되었습니다. 젊은 백작은 트로피닌의 재능에 놀라게 됩니다. 그는 트로피닌의 주인이자 자신의 사촌인 이라클리 모르코프 백작을 설득하여 미술 아카데미 입학을 도와주었습니다. 당시는 조건을 충족한 농노에게 일부 입학을 허락했을 때였지요. 그림을 잘 그리는 하인도 나름 주인의 자랑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송곳은 반드시 주머니를 뚫고 나온다고 하지요. 그는 6년 동안의 회화와 조각 수업을 통해 아카데미 대회에서 두 번이나 일등을 차지했습니다. 1804년 학술 전시회에서 자신의 작품을 선보였고, 곧 예카테리나 2세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재능을 귀히 여겼던 미술 아카데미의 스트로가노프 교장 선생님은 그를 옭아매고 있던 농노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드디어 바실리의 붓이 마법을 발휘할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라클리 모르코프 백작은 재산이 줄어드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바실리를 다시 우크라이나 영지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붓 대신 밀가루를 들려주었습니다.
바실리는 주인이 요구하는 대로 제빵사로, 양치기로, 닥치는 대로 이일 저일을 하는 하인이 되었습니다. 때로 서양의 위대한 작품을 모사하라는 주인의 주문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행복이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한 상태'라고 한다면 그는 불행했을까요? 어쩌면 불행이 포함하는 여러 단어보다 훨씬 비참하고 굴욕적이었을 것입니다. '비상(飛上)'은 '높이 날아오른다'라는 물리적 거리의 솟구침만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 시야를 통해 다른 세상을 보아 버린 것이니까요. 바다를 본 물고기는 강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 그가 이 여인을 그렸습니다.
여인이라고 하기엔 어려 보이지요? 열 너덧 살 되었을까요? 볼과 팔이 통통한 소녀입니다. 옷이나 스카프의 디자인이나 광택만으로는 농노인지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부유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소녀가 우릴 봅니다. 일에 열중하다 잠깐 낯선 소리에 고개를 든 표정입니다.
닦아 놓은 렌즈처럼 투명한 눈, 자를 대고 그은 듯 반듯한 코, 가볍게 미소 띤 입술, 숱 많은 눈썹, 선량하고 맑고 깨끗합니다. 귓불에 닿은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은 귀엽네요. 가느다란 실 이어링은 소녀의 앳됨을 보여줍니다. 보빈을 잡고 있는 팔은 보석을 들고 있는 듯 우아하고, 핀을 집는 손가락은 연주를 하는 듯 섬세합니다. 빛이 떨어진 뺨과 목덜미에서 유순하고 부드러운 내면, 단정한 태도 속에서 숨은 열정이 보입니다. 얼굴에도 몸짓에도 레이스를 뜨는 고된 노동은 한 조각도 보이지 않습니다.
바실리는 누구보다 농노의 삶을 뼈저리게 체험했을 것입니다. 무지막지한 노동의 양과 강도를 익히 알 것입니다. 특히나 옛 여성들은 세탁기도, 밥솥도, 청소기도 없는 시대에 하루종일 허리를 펼 시간 없이 일했습니다. 레이스나 피륙을 짜는 일은 주로 한밤중, 잠을 아껴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작품 속 어디에도 고통이 묻어 나오지 않습니다. 호들갑이 없습니다. 조용히 바라볼 뿐입니다.
신음 한번 없이,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지 않고 치러내야 하는 동류(同類)의 삶을 깊이 이해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자신이 만든 흉터든 세상에서 얻은 상처든, 째고 자르고 꿰매고 기우는 동안 내면도 외면도 너덜너덜해진 우리에게 '삶'이란 저렇듯 순순하게 열중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요. 한 코도 빠지지 않도록 촘촘하게 엮고 충실히 매듭짓는 것이니 수다스럽지 말라고, 우리에게 당부하는 것일까요.
전 아기 누빔 옷이 걸린 상점을 급히 돌아 나왔습니다. 소녀의 해맑은 눈동자처럼 바느질하던 상점 여인의 보드라운 눈길과 미소에 당황해서 진열대를 살필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마치 제 마음속 바위와 자갈과 모래를 들킨 것 같았습니다.
"그리 악착같이 열심히 살았는데 왜 빈 손인 거야? 왜 아픈 거야? 저리 평온하지 못하고 왜 오늘도 불안한 거야?"
이 작품은 74.7*59.3cm입니다. 이렇게 아담한 캔버스에 앉아 숨소리도 내지 않고 소녀가 레이스를 뜹니다. 생활을 쓰다듬고 어루만져 빛나게 하는 손길입니다. 노동의 효용, 가치, 의미 등 관계를 통한 정의를 묻지 않고 그저 일, 자체에 몰입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랬듯, 우리 모두가 그랬듯, 그녀는 스러질 듯 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삶의 연속적 무늬를, 삶의 과제를, 삶의 불분명성을 뜨고 있을 것입니다.
바실리는 농노 출신임에도 노동에 숨은 사회적 갈등을 드러내고 삶의 불평등을 외치지 않고 현실을 미화하고 무마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런 비판도 분명 타당한 구석이 있을 것입니다. 사회적 부당함을 방조했다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겠지요. 다만 제 마음이 약해져서인지 오늘은 레이스를 뜨는 손가락이 보여주는 일상에 대한 소중함, 쓸쓸함을 덮어주는 보드라움을 만나고 싶습니다. 어제에 대한 성찰이나 책망, 오늘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예의와 존중을 갖춘 위로를 듣고 싶습니다.
그림엔 헤아리기 벅찬 함의(含意)와 단단한 알맹이들이 있습니다. 마흔넷이 넘어서 자유를 찾았던 바실리 트로피닌은 자신을 비판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당신은 아직 삶을 헤아리기에 다양하고 충분히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오래 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