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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몬도 Jul 15. 2020

상담사가 되는 일, 사는 일

상담사가 된다는 건 그들의 삶에 상담이 필요한 사람이란 걸 말하기도 해.


심리치료사는 모두 심리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이야.

대학원 시절, 교수님은 때때로 말했다. 처음 들은 날엔 마음이 움찔했다. 심리검사와 정신장애진단 수업을 차례로 수강 중 자기 분석 보고서를 제출한 직후였다.


심리학도는 다른 사람에게 심리검사를 실시하기 전 먼저 수검자가 되어보는 경험을 가진다.

임상심리사의 입장에서  본인을 내담자로 가정하여 심리검사 결과를 해석하는 자기 분석 보고서는 전공수업 <심리검사> 과제였다. 심리검사에 대한 정보가 최대한 없는 상태 ‘오염’ 없는 때에 검사를 받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렇게 한다.  


학부 4학년 전공수업에 연달아 대학원 수업까지 지도교수님 한 분께 연달아 과제를 내다보니,

교수님이 ‘설마 나를 두고 한 이야기 셨나?’하고 당황한 기억이 난다.


십수 년 전 대학 캠퍼스를 누비며 졸업과 대학원 입시로 불안정한 시기를 보내던 나의 내면이 심리검사 결과지에 그대로 인쇄되어 있다. 시간이 오래 지나 보고서는 어떻게 적었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결과지를 받아 들고서 고개를 들 수 없던 부끄러운 감정은 선명하다.

 ‘신경증적 프로파일과 수동-공격형 성향을 겸비하고 있는 미성숙함의 끝판왕’

그저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이다.



다행히 교수님은 수업 때  최고(古)의 정신과 의사가 한 말을 인용해 주었다.

내 앞에 앉은 환자(내담자) 중에 내가 가지지 않았던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환자는 한 명도 없었다.




지금껏 만나온 상담사들은 실제로 본인의 삶에서 심리치료 및 상담이 필요했던 적이 있고, 도움을 받은 경험이 있어 대학원까지 진학한 경우가 많았다. 나도 그랬다.




학부에서부터 대학원으로 바로 진학해서 나이가 어린 경우였는데 같이 공부한 대학원 동기는 크게 둘로 나뉘었다.

1) 나처럼 학부 때부터 심리학을 해서 대학원까지 스트레이트로 온 20대 중반 전후의 연령대

2) 내 나이보다 10, 20년 정도 더 높은 소위 만학도의 연령대



심리학도로서 학사만 졸업한다면 할 수 있는 일을 고르는 데 제한이 많아 보였다.

유일하게 좋아하는 게 공부이고, 공부를 잘하고 싶었다. 대학원에 가서는 연구를 더 할 수 있다고 했다. 박사, 외국 유학, 교수라는 막연한 꿈을 갖고 당연하게 대학원으로 나아갔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 시기에 늦게 공부를 시작한 분의 수많은 인생 경험과 지혜를 부러워했다. 그들은 사람을 만나온 세월 동안 겪은 모든 것들이 교과서 속 텍스트를 춤추고 있는 생물로 보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육아를 한 동기는 발달심리 전공과목을 함께 들은 후에 내게 이렇게 말했다.

수업 때마다 아이를 키우던 양육과정과 아이의 발달 과정이 모두 지나가.


그들은 한 살, 아니 하루라도 젊은 뇌가 좋다면서 더 빨리 암기하고 좋은 학점을 받으며, 졸업 이후에도 박사과정이나 수련 과정에서도 나이 제한 없이 달릴 수 있는 나를 보고 좋은 때라고 했다. 그러니까 서로는 현재 시점에서 가질 수 없는 것들을 부러워하는 관계였다.




처음 상담 현장에 들어간 건 20대 후반이었다. 줄곧 학생이었으니 몇 없는 쟈켓 중에 점잖으면서도 최대한 노티가 나는 늙수그레한 옷을 입고 한 대학의 ‘인턴’ 상담사로 출근했다. 지금은 어려 보이려는 노력을 서슴지 않지만 당시엔 나이가 더 많이 들어 보이려 애를 썼다.

이력서에 붙일 증명사진을 찍으러 가서 나는 말했다.

  상담사처럼 보이게 찍어주세요.

사진사는 웃으며 답했다.


상담사스러운  없으니 본인이 생각하는 상담사 이미지에 맞추어 웃어 보세요

우문현답이었다.



초심자였기에 나이로 평가받아 위축되는 일이 신경 쓰여 그때 남자 친구였던 Y에게 커플링을 하자고 졸라서 커플링을 했고 매일마다 끼고 다녔다.

눈 앞에서 ‘선생님은 결혼 안 하셨죠?’하는 질문이 날아오는 부모 상담하러 가는 날에는 특히 더.


내가 만난 내담자들에게서도 과거 내가 미술치료사, 상담자 했던 것과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받았다.

‘저도 상담을 공부해보고 싶은데요.’

이론을 공부하고 달려오면서 눈 앞에 빨리 상담심리전문가 자격증을 따는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잘 알고 있다고 믿으며 짜둔 인생 플랜이었다. 학부 때부터 자기 분석 보고서를 과제로 부단히 쓰고, 상담을 하면서 상담을 받는 나는 나를 나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입시와 학위의 수련의 성취를 해내며 나는 심리학에 인생을 던졌다. 나는 내가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내 학업에 의미를 부여했다.


예측하지 못한 인생의 절박한 시간을 지나면서 상담심리전문가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삶에서 계획하던 것에 처음으로 이탈하여 ‘이혼을 하고’ 오랜 친구를 만났을 때 친구가 내게 웃으면서 해준 한 마디가 있다.


마몬도, 너 인생의 흔적 하나 남겼네. 그래. 앞으로 더 좋은 상담사 될 거 같아.
삶의 나이테 한 줄

이 말은 위안이 되었다.


껍데기로만 전문가 옷을 입으려 노력했던 삶에서 한 마디로는 설명되지 않는 인생을 살게 된 게 더 나은 삶의 시작이었다.


이렇게 글을 적을 수 있는 지금. 몹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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