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하는 일 중에 크 의미를 두지 않고 지나가는 일들이 대부분이지만 어떤 일들은 두고두고 후회가 되기도 하고 어떤 일들은 정말 잘했다고 싶기도 하다. 그리고 그중 꽤 많은 것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평가가 변하기도 한다. 나에게는 늘 있는 일로 어제저녁만 해도 행복했던 식사가 다음 날 아침 체중계에 올라갔을 때 고통스러움을 안겨주는 그런 사소한 일들 역시도 그렇다.
시간 여행에 관련된 영화 중 기억에 남는 작품들이 많지만 그중에 가장 인상적으로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건 어바웃 타임이다.(물론 어벤저스 엔드게임을 빼놓을 순 없지만 이 영화에서의 시간 여행은 메인 요리가 아닌 조미료 정도 느낌이라 패스) 영화 자체가 주는 메시지나 대사, 그리고 연기 등이 주는 매력이 너무 큰 영화들이지만 내가 꽂혀버린 건 주인공이 시간 여행을 그만두는 그 이유 자체였다. 내가 그 영화 속에서 느낀 시간 여행은 주말 아침에 먹는 달달하고 고소한 옥수수 크림 같았다. 내 인생에 살포시 조금 더 나은 쪽으로 끌어주는 따뜻한 느낌의 그런 장치. 그 영화 속에서의 시간 여행은 주인공의 인생을 많이 변화시키지만 나비효과의 그것처럼 극적이거나 예측 불가하지 않고, 대부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켜 나가면서 주인공의 행복을 더해주는 역할을 한다.
보통 이런 영화 보면서 다들 할 법한 일인데 나 역시도 내 삶의 어느 시점으로 시간을 돌린다면 어떨지 생각을 해봤다. 고2나 고3 때로 돌아가서 수능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인생을 바꾼다거나, 로또 번호를 맞춰서 돈 걱정 없이 살아본다거나, 아니면 가끔 이불 킥을 하게 만드는 기억의 그 날로 돌아가서 입 다물고 얌전히 있는다던가 하는 그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어차피 이뤄질 수 없는 일일뿐더러, 나비효과의 시간 여행을 보면 어느 순간이 바뀐다고 해서 그 이후에 삶이 내가 생각한 대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다는 인식이 있어서 그런지 그런 상상은 그냥 잠시 희미한 행복을 안겨주고는 큰 의미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이런 영화를 보지 않더라도 세상에 무슨 이슈가 있을 때마다(보통은 나에게 안 좋은 이슈들) 이런 상상은 종종 하곤 한다.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서 미리 준비를 했으면 어떨까라던가, 아니면 작년 이맘때 주식을 사놓았으면 어떨까라던가.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고, 내 인생에서 최악의 일 년이라고 말할 수 있는 2020년을 고려해도 그렇다
그리고 나를 이렇게 만든 가장 큰 변곡점은 우리 아이이다. 너무 진부한 대답인가..
어쨌든 아이가 생긴 후부터, 혹시나 아내와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그 이전에 아내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 앞으로 내가 그때 당시의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식으로 하나씩 타고 올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하나 어긋났어도 지금 내 아이와 함께하는 순간이 없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렇다 보니 삶에서 크게 후회가 되는 순간이든, 발목이 돌아갈 만큼 이불 킥을 하게 만드는 순간이든 중요하지 않은 순간이 없다. 그렇다고 그때의 아픈 기억들이 미화가 되는 건 아니다. 그냥 그런 것들을 아주 살짝 더 편하게 안고 갈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어쨌든 아이를 처음 만났던 그 날을 위해서는 그 전의 모든 순간이 모두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흡사 어느 예술가의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 같다.
어떤 유튜브의 영상에서 어느 예술가가 대충 휘갈기듯 선 몇 개 그리고 점 몇 개 찍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걸 볼 수 있는데, 그 시작 장면만 보면 나중에 어떤 작품이 나올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빈 종이의 90% 이상이 채워져 가는 중에도 당최 무엇을 그리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런 작품은 거의 마지막에 다가와서 그 예술가의 손짓 몇 번을 더하고 나서야 모든 게 명확해지곤 한다.
나에게 있어서 아이는 예술가의 마지막 손짓이다.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던 하나하나의 선과 점들로 인생이 채워지고 있었지만 그 손짓이 있기 전까지 어느 것도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남으로 있어서
모든 것들이 하나의 주제를 향해 모여들고 각각의 부분들이 이전과는 다른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물론 그 순간만을 위해서 살아왔다고 하면 그것 역시 과장이다. 부모님과의 시간이나 지인들과의 순간들 역시 소중하고 그것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이를 만난 순간만큼 내 인생을 크게 바꿔 놓은 것은 없다. 또한 하나의 작품이 마무리되었다고 해서 거기서 끝나는 것도 아니며, 완성된 작품은 놓이는 위치나 다른 작품들과의 조화에 따라서 그 가치가 다시 변하기도 하고 관리가 잘못돼 망가지는 일도 있다. 그렇기에 앞으로의 내 인생에 대한 나 자신이 가지는 가치나 느낌은 많이 변할 수도 있다.
계속해서 미술품과 비교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내 인생이 예술가의 작품처럼 훌륭하다거나 완성도가 높다는 뜻이 아니다. 반대로 이 나이 먹도록 좋아하는 일이 뭔지도 모르고 무엇을 위해 사는지도 정확하게 모르는, 보통보다 조금 더 무료한 인생이었던 것 같다. 이런 인생의 가치를 완전히 바꿔놓았다는 것만으로도 아이와의 만남은 지금까지의 내 삶에서 가장 큰 사건이다.
이쯤에서 처음 던진 질문, 인생에서 되돌리고 싶은 순간이 있냐고 묻는다면, 난 그런 순간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