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막을 내리고 40대에 만나요 (답장 늦은 자의 변명 포함 주의)
은진님께 마지막 서신을 받고 그 사이 3개월이 지났네요. 보름에 한 번 주고받기로 한 서신인데, 대체 마감을 얼마나 지난 건지 계산하기가 부끄럽습니다. 서신 시작만 여러 번 쓰다 글머리만 남아있는 글이 세편이더라고요.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맥락을 잃은 채, 중단된 글들이 헤엄쳐 흩어졌고 저는 새로운 글을 다시 시작합니다. 올해가 지나기 전엔 꼭 답장을 쓰겠다 마음먹었거든요.
시간을 내기 위해 아이와 함께 도서관에 왔어요. (이번 주는 학교도 학원도 다 방학이에요) 엄마가 내년엔 마흔이 된다고 그랬더니, 그럼 자기를 낳은 지 벌써 10년이나 되어가냐고 하더라고요. 그래 그러니 엄마에게 딱 한 시간만 주겠냐고, 그 시간 동안 엄마는 글을 쓸 테니 너는 책을 읽자고 제안했어요. (현대판 신사임당은 떡 대신 글을 쓰는 콘셉트ㅋㅋㅋ) 그러겠다고 해서 나란히 앉아 저는 글을 씁니다. 말 시키면 한 시간에서 조금 더 늘어날 수 있으니 우리 묵언수행을 하자고 했어요. 과연 제가 이 글을 다 쓸 때까지 수행이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며칠 전 은진님이 지리산 근처에서 북한산이 있는 이곳까지 사진을 찍으러 왔었지요. 창고살롱에서 줌으로만 가끔 만난 지 1여 년이 흘렀고, 드디어 실물을 마주하는 순간이었어요. 어릴 적 친했는데 10년간 만나지 못한 오래된 친구를 만나는 느낌이 이런 느낌일까요? 친밀감은 깊숙한 곳에서 고개를 내밀고, 설레고, 또 함께 있던 2시간 반이 흐르는 게 아쉽고도 너무 짧게 느껴졌어요. 무엇보다 은진님의 가족을 함께 만날 수 있어서 더 좋았답니다. 내 가족을 누군가에게 소개해주는 일은 저에겐 좀 특별하게 느껴져요. 나의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거든요. 세 분이 산청으로 떠난 후 혼자 사진관에 앉아서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이런 인연을 만들어 준 창고살롱이 고맙더라고요. 그때 마음이 정말 좋았는데, 그걸 언어로 다 표현해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네요.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저는 연대, 환대의 힘을 느낀 해였어요. 창고살롱을 시작으로 비슷한 가치관이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의 커뮤니티에 들어가게 되고, 커뮤니티라는 공간이 안전하고 든든한 장이 된다는 걸 경험했지요. 다양한 서사와 가치를 나누는 시간들이 있어서 최근 몇 년을 돌아봤을 때 올해가 가장 깊이 있는 시간을 보낸 순간들이 아니었나 싶어요.
혼자만 고민하고 힘들게 느껴지고, 때론 많은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괴로웠던 마음들을 나눌 수 있었고, 때때로 해답을 발견하기도 했어요. 새로운 시도와 생각들을 지지하고 응원해주며, 두 팔 벌려 환대하는 사람들, 각자 광대하고 혼란스러운 우주를 맴돌다 만났지요. 코로나로 어떤 부분에서는 단절되고 힘들었지만, 그 속에서 어느 때보다 제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많았던 것이 참 아이러니하기도 해요. 오히려 이런 시기라서 더 간절했던 걸 수도 있겠어요. 그래서 더 특별해요. 창고살롱도, 은진님도.
지난 봄, 벚꽃놀이를 갔던 만우절날 거짓말처럼 넘어져서 다리를 다치고 수술도 하고 5개월 정도 일상생활에 거동이 불편한 시간들이 있었어요. 그때 sns에 사진관에 있는 식물들을 걱정했더니 동네 빵집과 책방을 운영하는 사장님이 메시지를 보내주셨어요. 다리를 회복하는 동안 식물들을 자신의 가게로 옮겨 돌봐주겠다고요. 폐를 끼칠까 봐 감사한 마음만 받고, 가족들에게 부탁하여 식물을 돌보긴 했지만 그 손길이 얼마나 다정하던지요. 평소 그냥 저는 빵과 책을 사러 가던 손님이었는데, 그때 그 메시지가 저에게 어떤 계단 하나를 내어주었어요. 다음 스텝으로 넘어갈 수 있는 디딤돌처럼요. 언젠가 저도 이웃에게 그런 손을 내밀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니까요.
은진님이 제게 서신을 주고받아 보자고 제안한 일 또한 그런 계단 같아요. 그 계단을 밟고 우린 지금까지 경험해본 적 없는 새로운 친밀한 세상에 한발 내디딘 느낌이니까요. 그런 계단들이 저를 조금 다른 세상으로 이끌어 줬어요. 성장보다는 확장에 가까워요.
지난 여름 인사글로 시작한 서신교환 [멀리 있는 존재를 마주하는 일]
인사글을 제외하고 2021년 총 6편의 편지를 주고 받았네요.
https://brunch.co.kr/@maandocumentary/30
가끔 서신이 늦어진다는 메시지를 보내거나 그런 내용을 드러낼 때마다, 은진님은 그러셨지요.
“잊지 않으셨으면 그걸로 됐습니다. “
라고요. 왜 기다리지 않으셨겠습니까만은 부담 주지 않으려 애써 기다려준 마음 감사해요. 언제고 은진님께 글을 쓰고 싶을 때면 쓸 수 있도록, 미안함 대신 기다려주신 시간에 대한 고마움을 한 껏 담아 보내드립니다.
오늘은 제30대의 마지막 날입니다. 저와 동갑인 은진님에게도 마찬가지겠지요.(어쩔 수 없이 동갑이라는 사실이 더 친밀감을 높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은진님은 3년간의 휴직을 마무리하고 복직을 앞두고 있어서 조금은 더 감회가 새롭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어요. 은진님의 지난 한 해, 그리고 다가올 시간들에 대한 요즘 마음은 어떤가요?
30대가 끝나기 전 간신히 만난 우리, 40대에도 언제나 반가울 그대. 항상 따뜻한 온기를 품은 채 마음껏 환대해드릴게요. 누군가에게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또한 꽤나 근사한 일인 것 같아요. 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