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는 스스로 성장하고, 성인의 길을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었다
금주 27일째. 어제저녁부터 휴대폰이 진동하며 재난문자가 계속 날아들었다. “오늘부터 모레까지 많은 눈이 예보되어 있습니다. 차량 운행 시 감속운행 및 차간 거리를 충분히 확보하시기 바랍니다.” 평소 같으면 스쳐지나갈 문구였겠지만, 명절이 코앞이라 고향으로 가는 이들에겐 꽤나 골치 아픈 상황이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정작 나에게는 이번 명절이 그다지 특별한 움직임이 없는 시기라, 그 경고도 조금은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혹시나 해서 창문을 열어봤다. 그러나 역시 대구는 대구였다. 하룻밤 사이 녹았다고 하기엔 아예 흔적조차 없는 눈. 대신 창밖엔 촉촉한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걸 한참 바라보다 문득 손을 내밀어보았다. 예상보다 비는 차갑지 않았다. 온몸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겨울바람도 불지 않아, 비에 스치는 손끝이 그저 적당히 상쾌하고 부드럽기까지 했다.
순간적으로 어떤 충동이 올라왔다. 창문을 열고, 오늘만큼은 베란다에 앉아 비와 빗소리를 가까이에서 느껴보고 싶었다. 그런 여유가 요즘 내 삶에 얼마나 필요한가, 생각하며 마음속이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나는 조용히 앉아 흘러내리는 빗소리를 귀로 담으며, 가만히 멍하니 명상에 잠겼다.
그 순간만큼은 시계도 멈춘 듯했다. 바깥세상이 어떤 움직임으로 분주하든,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난 기분이었다. 이런 평온이 명절의 본질이 아닐까 싶었다. 소란 속에서도 고요를 발견하고, 그 속에서 나를 다시 찾는 시간.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시 책상 앞에 앉았다. 창밖의 비와는 다른 무게를 가진 시간이 책상 위로 내려앉는다. 설 연휴의 첫날, 세상은 명절다운 풍경으로 흘러가겠지만, 나는 나의 루틴을 이어가며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하루를 채워 나가기로 했다. 오늘은 서양철학과 기독교라는 두 거대한 축을 머릿속에 새겨 넣는 날. 책장을 넘기며 수천 년의 시간과 지식이 내 손끝에서 내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소크라테스에서 시작된 서양철학은 그의 제자인 플라톤의 이데아론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원론이라는 형태로 정립된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치며 뿌리를 내리더니, 칸트의 관념론에 이르러 다시금 일원론의 가능성을 엿보았다. 이 철학적 여정은 단순히 지식의 나열을 넘어, 인류의 사고와 존재의 방식을 어떻게 정립하고 또 끊임없이 변화시켜왔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기독교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일 역시 흥미로웠다. 모태신앙으로 자라 결혼식마저 성당에서 치른 나지만, 정작 바울이라는 인물이 예수의 이념을 어떻게 전파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조금은 부끄러웠다. 바울의 서신들이 단순히 종교적 교리를 전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서양철학과 신앙의 접점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했다는 점은 내게 놀라움과 깨달음을 동시에 주었다.
내가 이 책을 선택한 것이 정말이지 단 1%의 후회도 남지 않는 선택임을 확신했다. 무거운 사상과 신앙, 그리고 그 관계를 탐구하는 시간이었지만, 그 속에서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다. 아마도 내가 잊고 있던 질문들, 나를 이루는 근본에 대한 궁금증과 마주한 덕분일 것이다.
그렇게 오늘 오전, 지대넓얕 0편을 완독했다. 금요일 아침에 첫 장을 열었으니, 사흘이 걸린 셈이다. 읽기 전에는 이 책을 선택하는 일이 어쩌면 조금 부담스러운 도전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책의 두께도 만만치 않았고, 제목에 적힌 "138억 년 전의 시간여행"이라는 문구가 특히 나를 망설이게 했다. 철학에 대한 깊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내가, 인간의 탄생부터 시작되는 방대한 이야기와 철학적인 용어들을 과연 소화해낼 수 있을까?
하지만 그 망설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전에 읽었던 지대넓얕 1, 2권에서 느꼈던 저자의 친절함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저자는 독자들을 압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철학적 사고와 복잡한 개념들을 쉽게 풀어주고,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문체로 안내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속삭이듯 설득했다.
이번에도 저자는 준비되지 않은 나 같은 독자들을 위해 또다시 손을 내밀어줄 것이라고. 결국 이 기대감이 나를 책 앞으로 이끌었다.
결과적으로, 저자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대 이상이었다. 책은 우주의 탄생에서 시작해 문명과 신의 등장, 종교와 사상의 발전,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는 과정을 다루었다.
이러한 거대한 주제를 저자는 역사적 사건들과 연결하며 자연스럽고도 설득력 있게 풀어나갔다. 558페이지라는 두께를 앞에 두고도 결코 압도당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 필체 덕분이었다. 이야기처럼 술술 풀려가는 설명은 때로는 강의처럼, 때로는 대화처럼 다가왔다.
내게는 책장이 넘어가는 순간마다 조금씩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철학적 개념과 우주의 역사라는 방대함 속에서도, 나는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몰입했고, 책의 마지막 장에 닿을 때까지 단 한 번도 그 무게를 체감하지 못했다.
이 책은 단순한 독서를 넘어 하나의 여정이었다. 138억 년이라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시간을 훑으면서도, 그 끝에서 결국 나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여정. 나는 그 길 위에서 조금 더 단단해진 기분이다. 그리고 한 가지 확실히 깨 달았다. 어떤 망설임도, 그것을 넘어섰을 때 얻을 수 있는 충만함 앞에서는 결국 사소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을.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방대하고 깊다. 그것은 우주의 시작에서 인간 내면의 탐구에 이르는 거대한 여정이지만, 한 권의 책이나 일기로 다 담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그 중심에 있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관점의 변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저자가 강조하는 동양과 서양의 시선 차이는 이 책이 제시하는 핵심적인 질문 중 하나였다. 동양철학은 자신과 세계가 하나라는 일원론에 기반을 둔다. 반면, 서양철학은 자신의 내면과 외부 세계를 구분하는 이원론을 바탕으로 발전해왔다.
이러한 시선의 차이는 단순히 철학적 담론의 차원을 넘어, 인류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다르게 형성했다. 그리고 저자는 이를 다양한 역사적, 철학적 배경을 통해 명확하게 풀어냈다.
놀라웠던 점은,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일원론과 이원론이라는 개념조차 명확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상 속에서 내가 느끼고 사고하는 방식이 자연스레 이원론에 더 가까웠다는 사실을 깨 달았을 때, 마치 거울 속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분이었다. 세상을 나와 분리된 무엇으로 보고, 내 안의 것과 바깥의 것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살아왔다는 점에서, 내가 이미 서양적 사고의 틀 안에 있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 깨달음은 단순한 지식의 습득을 넘어, 내가 가진 관점을 다시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다. 동양적 일원론이 주장하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고방식은 어쩌면 지금의 나에게 부족했던 조화와 균형의 단초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고자 한 질문 중 하나일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동양철학의 일원론적 사고를 점점 잃고, 서양의 이원론적 사고에 젖어들게 된 주요 원인을 역사 속에서 찾는다. 서양인들이 수많은 전쟁을 일으키고, 세계 곳곳을 식민지로 삼는 과정에서 동양의 사고는 서양의 사고에 영향을 받았고, 그 결과 우리는 점차 이분법적 세계관에 익숙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이원론적 사고가 가지는 단점이다. 그는 선과 악, 천국과 지옥, 백인과 흑인, 부와 빈, 진보와 보수 등 모든 것을 두 가지로 나누어 바라보는 사고방식의 부작용을 지적한다. 세상을 단순히 양극단으로 나누어 판단하다 보면, 결국 우리는 그 사이의 스펙트럼과 연결을 보지 못한 채 한쪽에 갇혀버리고 만다. 이 분열된 시각은 결국 대립과 갈등을 키우고, 이해를 막아버리는 장벽이 된다.
문득, 저자의 이러한 주장이 최근 내가 읽었던 '범죄사회'라는 책과 닿아 있다는 것을 깨 달았다. 그 책에서 강조되었던 내용은 범죄자를 단순히 "악"으로 규정하는 시각의 위험성이었다. 형량을 마친 범죄자는 다시 "선"의 세계로 돌아와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이란 점을 강조하며, 범죄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 자체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 메시지를 단순히 새로운 관점으로 받아들였을 뿐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것 이야말로 일원론적 사고방식에 가까운 시선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저자가 이원론적 사고가 반드시 나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이원론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점을 비판하며, 한쪽에 치우친 사고방식이 만들어내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이원론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그 것만을 고집하다 보면 우리는 반대편에 있는 다른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저자는 이러한 맹목적인 사고방식이 얼마나 우리를 좁은 세계 안에 가두는지를 보여주려 한다.
"자신이 보지 않은 것은 믿지 않는 사람,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 자신의 세계에 갇혀 반쪽짜리 삶 만을 보는 사람들에게 저자는 강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단순히 "생각을 바꿔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관을 넓히라고 촉구한다. 이원론적 사고와 일원론적 사고의 균형을 찾고, 내가 보지 못한 또 다른 가능성의 세계를 받아들이라는 메시지가 책을 통해 강렬하게 전달되었다.
결국, 이 책은 사고방식의 전환을 요구하는 책이다.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고, 서로 연결된 하나의 흐름으로 바라보는 일. 그것이 우리의 관점에 작은 균열을 만들어내고, 그 틈새로 더 넓고 깊은 세계가 들어오게 할 것이다. 저자는 아마도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 책을 덮으며, 나는 그 질문에 대해 답을 찾아가야 할 책의 연장선 위에 서 있었다.
책을 읽고 나서 머릿속에 지식이 쌓인다는 느낌을 생기는 아주 짜릿한 경험을 하게 하는 훌륭한 책이었다. 그리고 곧 무한편도 반드시 읽을 것이라는 다짐을 하며 책을 덮고 운동을 시작했다. 오늘 페달을 밟으며 시청한 내용은 얼 나이팅게일의 <진짜 부자를 만드는 생각>이라는 책의 내용이었다.
“삶에서 주어진 시간에 즐거움을 느끼고 다른 사람의 행복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주어진 삶에 어떤 성취를 보탤 것인지 각자에게 달렸다. 그것이 세상의 잣대로 보기에 그리 대단하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그 자체만으로 우리는 승리했다. 마침내 삶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이 모든 것들이 영화 필름의 이미지처럼 갑자기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렇게 편안히 쉴 수 있다.”
하와이 대저택 / 얼 나이팅게일
내 삶의 주인공도 “나”이고, 감독도 “나”라는 깨달음이 오늘 하루를 꽉 채웠다. 어떤 영화를 만들어갈지는 결국 나의 몫이다. 내가 구상하고, 내가 선택한 장면들로 채워나가는 삶. 운동을 마치며 이런 소중한 교훈을 떠올렸고, 오늘은 그 교훈에 어울리게 한층 강도를 높인 페달을 밟았다. 종아리에서 시작된 뻐근함이 허벅지까지 이어졌지만, 그 무게감이 오히려 뿌듯하게 느껴졌다. 내가 조금 더 노력한 흔적 같아서.
운동을 끝내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그 뒤로는 소파에 기대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졌다. 아내와 나란히 앉아 나른한 오후의 평온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 막내가 방에서 나와 우리 앞에 섰다. 설 명절인데 이렇게 각자 방에만 있는 건 재미없지 않느냐며 뭔가 함께할 것을 제안했다. 아이의 목소리에는 설렘이 묻어났고, 동시에 가족들 간의 연결을 잇고 싶어하는 마음이 전해졌다.
그 말에 순간 멈칫했다. 어쩌면 매일의 일상 속에서 이런 특별한 날조차도 관성처럼 흘려보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막내의 한마디가 나를 잠시나마 깊은 생각에 잠기게 했다. 우리가 각자 공간 속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가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오늘의 영화에 또 하나의 장면을 추가할 준비를 시작했다.
명절 놀이를 떠올리려 했지만, 사실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가족끼리 모여 전통적인 놀이를 즐긴 기억은 이미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어머니까지 포함해도 가족 구성원이 고작 여섯 명인 우리는, 명절이라는 개념을 잊고 지낸 지 벌써 10년은 되어가는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시간과 관성에 떠밀려 명절을 그저 길어진 주말 정도로 여겨왔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막내의 말을 듣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조금 찌릿했다. 명절이란 무엇인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됐다. 어쩌면 가족이 많고 적음을 떠나, 하루라도 의미를 담아 지낼 수는 있었을 텐데. 그동안 나는 너무 무심했던 게 아닐까 하는 미안함이 들었다.
그 순간, 작은 변화라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별다른 계획이 없으면 집에 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딸은 저녁에 간단한 약속이 있다며 대신 내일 오후부터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했다. 그 통화 한 통으로 우리는 계획을 세웠다. 점심 즈음에 만나 볼링을 치고, 간단히 쇼핑을 한 뒤, 대구 중심가에서 외식을 하기로 했다.
그 대화는 마치 가벼운 바람처럼 집 안에 새로운 기운을 불러왔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계획을 세우는 그 순간, 명절이 그저 흘러가는 하루가 아니라 소중한 무언가를 만들어갈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족이 함께하는 작은 순간들이 우리가 잊고 있던 명절의 의미를 다시금 새겨줄 것만 같았다.
사실 이번 연휴에 볼링장에 가고, 대구 중심가에서 외식을 계획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내 금주 결심이었다.
만약 내가 여전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하루가 되었을 것이다. 오후쯤 술 약속을 잡았거나, 아내와 둘이 낮술을 즐기며 하루를 소진했을지도 모른다. 설령 낮술을 피했다 하더라도, 저녁이 되면 결국 술잔을 기울이기 위해 집 근처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늘 가던 곳에서 늘 먹던 음식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며, 그저 나를 기준으로 한 외식이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불현듯 스쳐 갔다. 내가 매일같이 반복하던 그 습관들 속에서, 아이들에게도 자연스레 매일 가던 식당과 매일 먹던 음식들을 간접적으로 강요하며 살아왔던 건 아닐까. 그게 우리 가족에게 얼마나 지루하고 단조로운 시간이었을지 깨달으니 미안한 감정이 차올랐다. 명절답게 뭔가 특별한 계획을 세울 기회가 많았을 텐데, 그 순간을 너무 많은 술잔에 가볍게 흘려보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이번엔 다르게 살아보기로 했다. 앞으로는 가족들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이런 미안한 마음을 남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가장이라는 이름 아래 숨어 이기적인 선택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겠다고, 이제는 조금 더 나은 방향을 생각하겠다고.
금주를 결심한 뒤로 얻어지는 시간의 소중함을 조금씩 더 자각하고 있다. 술잔이 없는 저녁은 생각보다 길고 풍성하며, 술 냄새 대신 가득 차는 대화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훨씬 더 따뜻하다. 나 자신에게, 금주의 가치를 스스로 깨닫게 해준 나의 작은 변화에 감사한다. 가족과 함께 만들어가는 내일의 계획도 그 변화의 연장선에 있을 것이다. 이런 나날들이 쌓일수록, 내가 살아가는 영화는 조금 더 나다운 이야기를 품게 될 것이다.
간단히 이른 저녁을 먹고, 일기를 정리하고 책을 읽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오전에 막내가 무심히 꺼냈던 말—"명절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도 마음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왜일까? 명절이라는 단어가 가져오는 따뜻함과 아련함이 더 이상 우리의 일상에 깊이 스며들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일지도 모른다. 이대로 흘려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아내와 이야기를 나눴다.
셋이서 할 수 있는 간단한 놀이가 뭐가 있을지, 조금은 명절다운 느낌을 되살릴 수 있는 무언가를 고민하며.
그러다 아들에게
"뭘 하면 좋을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포커는 어때요?"
순간, 귀를 의심했다. 포커라니?
“너 포커를 할 줄 알아?” 물었더니,
아들은 수학여행 중에 친구들과 함께 배웠다며 당당하게 말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한편으로는 조금 웃음이 나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찝찝함도 남았다. 고등학생인 아들이 포커를 한다고 당당히 말할 때의 그 태도를 좋아해야 할까? 아니면 부모로서 "절대로 하지 말라"고 단호히 선을 그어야 할까?
그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은 이것이었다. 어차피 이미 배운 것이라면 내가 금지한다고 해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도, 내가 모르는 곳에서 배운 이 기술(?)이 정확히 어디까지인지 궁금해졌다. 아들은 어디까지 알고 있고, 어떻게 배우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나는 그의 태도 속에서 호기심과 성장, 그리고 어른스러움을 엿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부모로서 내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아들은 천진난만하게 이야기를 이어갔지만, 나는 그 순간 명절 분위기를 되살리려던 계획과는 또 다른 이야기의 중심으로 빠져들었다.
결국, 아내와 나, 그리고 막내가 함께 3천 원씩 들고 포커를 시작했다. 명절 놀이 대신 선택된 이 특별한 게임이 묘하게도 우리를 하나로 엮었다. 막내는 의외로 능숙했다. 초보 티를 낼 줄 알았건만, 그 모습은 나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30분쯤 게임을 즐기고 나서야 우리는 자연스럽게 마무리했다.
그런데, 게임을 하며 막내를 바라보는 동안 문득 깨달았다. 이제는 곧 어른이 되겠구나. 나와 마주 앉아 포커를 치는 모습에서 보이는 여유, 그리고 작은 손짓마저 성숙해 보였다. 아직도 어린아이 같다고만 생각했는데, 어느새 그는 어른으로 성장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마음 한구석이 묵직해졌다. 직장생활에만 매달리고, 아내의 병간호에 집중하느라 정작 막내에게는 신경을 덜 쓰고 있었던 시간이 떠올랐다. 그 시간 동안 그는 스스로 성장하고, 성인의 길을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 하지만 늦지 않았다. 막내가 사회에 잘 적응하고, 올바른 어른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올해는 그에게 조금 더 마음을 쏟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짧은 포커 게임과 함께 웃음소리가 가득했던 저녁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하지만 시계를 보니 아직 9시였다. 각자 남은 시간을 자유롭게 보내며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오늘은 특별히 평범하지 않은 하루였다. 단순한 놀이였지만, 그 안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았다. 여전히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웃음과 따스한 여운 덕분에 하루가 참 따뜻하고 풍성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