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은 비워진 듯 채워졌고, 채워진 듯 비워졌다. 마치 동양 철학 처럼
금주 26일째, 아침 일찍 준비를 하고 볼링장으로 향했다. 10시 시합 전에 아내를 데려다 주고 난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오후까지 시합이 예정되어 있어 집으로 돌아와 독서를 다시 시작했다.
어제는 우주의 탄생, 생명의 탄생, 세계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를 따라갔다. 빅뱅이라는 거대한 폭발로 시작된 이 우주의 역사는, 그 자체로 경이로움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보다 더 가까운 이야기, 지구의 생명체의 탄생까지의 신비함을 경험한 시간이었다.
오늘은 인류와 문명의 탄생과 발전, 그리고 이 책의 또 다른 중심축인 거대한 사상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손에 든 책은 여전히 신비롭고, 책장을 펼칠 때마다 내가 또 어떤 새로운 질문과 발견을 마주할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다.
지구라는 행성 위에 첫 생명체가 탄생하는 과정은 단순히 유기물과 무기물의 결합이라는 과학적 사실로 설명될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는 그 너머의 어떤 불가사의한 신비가 깃들어 있다. 아무것도 없는 지구의 표면에 생명이 깃든다는 것은 단순한 과학적 사건이 아니라, 우주와 자연이 빚어낸 경이로운 예술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 생명은 점차 복잡 해지며 진화했고, 마침내 인류라는 존재가 지구 위에 발을 디딘 순간,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나는 오늘 이 책을 통해 인류의 발자취를 따라갈 것이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호모 에렉투스, 그리고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진화 과정은 마치 거대한 서사시처럼 흐르고 있다.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던 시절을 지나 문명을 만들고, 더 나아가 스스로의 존재를 고민하며 철학과 종교를 창조한 인간. 인간은 단순한 생명체를 넘어, 스스로의 의미를 탐구하는 존재가 되었다.
책장을 넘기며 다시 한번 느낀다. 이 책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책이 아니다. 그것은 질문을 던지고, 내가 답을 찾도록 이끌어주는 여정이다. 나는 오늘도 그 질문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 준비가 되었다. 우주와 생명의 탄생에서, 인류의 사상으로 이어지는 이 여정은 어쩌면 나라는 존재를 새롭게 발견하게 할지도 모른다.
인류의 진화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대서사시를 읽는 듯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시작하여 현생 인류, 호모 사피엔스에 이르는 과정은 자연선택설이라는 원리에 따라 흘러간다. 그리고 그 진화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치밀하게 이어져, 마치 잘 짜인 각본처럼 느껴졌다. 책장을 넘기며 이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든 나는, 어떻게 이렇게 쉼 없이 읽어왔는지조차 스스로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진화된 인간은 약 20만 년 전 지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각 대륙으로 흩어졌고, 약 7천 년 전부터 지구 곳곳에 문명을 꽃피웠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황하 이 4대 문명이 시작된 것이 겨우 7천 년 전이라는 사실은 신비를 넘어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인간이 창조한 문명이라는 결과물이 얼마나 거대한가를 생각하면, 인간이 가진 능력과 상상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은 이제 인류가 문명을 만들고 살아가는 방식을 고민하기 시작했던 시대로 나아간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인류가 처음으로 기록한 신화인 ‘길가메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솔직히 나 역시 길가메시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그저 현대의 창작물 속에 등장한 캐릭터라고만 생각했다. 내가 알고 있던 세계관이 얼마나 얕았는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저자가 풀어낸 길가메시 신화는 7천 년 전에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인간이 불멸을 꿈꾸지만 결국 유한한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과정.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여정. 이런 이야기가 수천 년 전부터 인간의 고민 속에 있었고, 그것이 문자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경이롭다 못해 압도적이었다.
결국,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 짧은 여정을 의미 있게 만들고자 했다는 것이 역사의 증거로 남아 있다.
그러면서도 나는 문득 이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비록 철학적 질문은 답을 내리기보다는 더 많은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라지만, 나는 그 과정이 인간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새삼 느꼈다.
철학은 인류의 삶 속에서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문명을 기반으로 한 인류는 이제 단순히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단계를 넘어섰다. 그들은 이제 '살기 위한 삶'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저자가 말하는 종교와 거대한 사상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첫 발걸음이었다.
이제 나는 신비로 가득 찬 이 여정의 다음 장을 준비하며, 저자가 이야기하는 거대한 사상의 중심으로 다시금 빠져든다. 인류가 만들어온 문명과 그 속에서 피어난 사상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그리고 나에게 어떤 질문을 던질지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찬 마음이다. 이 여정이 내 생각의 경계를 얼마나 확장시킬지, 그것을 탐험하기 위한 준비가 되었다.
문명을 이룬 인간은 사회라는 구조 속에서 살아가며 수많은 예상치 못한 일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자연재해처럼 외부에서 오는 거대한 충격도 있었고, 인간들 간의 관계에서 비롯된 복잡한 문제들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지나며 사람들은 점점 "왜?"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질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았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이 세상은 무엇인가?"라는 존재에 대한 의문이었다.
이 질문들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인간이 본질적으로 자신의 존재와 세상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 중 일부는 이 질문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나아가 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연선택설처럼, 인간의 사유와 사상도 진화하는 것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같은 질문을 품지만, 그중에서 특별히 선택된, 진화된 이들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거대한 사상가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모든 사유의 시작은 언제나 뿌리로부터 시작된다. 그 뿌리, 동양 철학의 첫 걸음은 “베다”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기원전 6천 년, 인류의 종교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사유는 여기서 출발했다. 그리고 이 오래된 뿌리는 다양한 가지로 뻗어나가며 동양의 대표 철학과 종교를 형성했다.
인도 힌두교의 범아일여는 나와 우주가 하나임을 말한다. 이와 연결된 중국 도가사상의 도덕일체, 그리고 불교에서 말하는 붓다의 일체유심조. 이 세 가지의 가르침은 모두 하나의 진리를 향해 있다. 그것은 '나와 세계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일원론적 사유이다. 동양 철학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이 사상은 결국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나와 세계의 경계가 사라지는 통합의 철학을 이야기한다.
오늘도 나는 이러한 사상에 깊이 잠식되었다. 머릿속에는 동양의 일원론적 사유가 가득 차 있었고, 마치 그 무게와 깊이를 감당하지 못해 책을 덮었다. 어제와 같은 이유로.
생각의 무게는 가끔 우리의 머릿속을 질식시키는 듯하다. 지금 이 상태에서 서양 철학, 그리고 서양 종교인 기독교의 내용을 억지로 밀어 넣는 것은 스스로의 뇌용량을 초과하는 무리한 일일 것이다. 동양의 철학적 사유와 서양의 관념이 조화롭게 공존하려면, 그 사이에 쉼표 하나쯤은 필요하다. 오늘 나는 그 쉼표를 선택했다.
오늘 잠시 책을 덮는 순간, 마음속은 비워진 듯 채워졌고, 채워진 듯 비워졌다. 마치 동양 철학이 말하는 '비움 속의 충만함'을 경험하는 것처럼.
주말은 운동에서 벗어나 근육을 쉬게 하는 날이다. 일주일에 다섯 번, 정해진 루틴에 따라 몸을 움직였으니 이틀 정도는 내 몸도, 그리고 머리도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주말에는 간단한 스트레칭으로만 근육을 풀어주고, 유튜브 영상이나 정보의 홍수로부터도 나를 분리해왔다. 주말은 온전히 휴식의 개념으로 만들어 가기로 한 나만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번 주말, 그 휴식의 틈새에 책 한 권이 들어왔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책은 나를 차분하게 만들고 머릿속도 정리해 주었어 야 했다. 그러나 반대로 책은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동양 철학의 깊이와 역사를 담은 문장들은 나를 끝없는 사유의 길로 데려갔고, 머리는 가득 차오른 생각들로 조금은 무거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는 없다. 나를 가득 채운 그 생각들 이야말로 책이 준 선물이었다. 이 복잡함 속에는 단순히 사유의 무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확장시키는 지식의 축적과 기쁨도 자리하고 있었다. 한 권의 책은 내게 새로운 시선을 열어주었고, 이로 인해 나는 더 나아질 수 있었다.
주말 운동은 쉬어 갔지만, 내 머리는 오히려 더 바빴던 시간. 그러나 행복했다. 그 바쁨 덕분에 한 권의 책 속에서 발견한 모든 것들이 결국 나를 더 나 답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복잡함 속에서 느끼는 충만함 이야말로 휴식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오후 4시. 나는 아내를 태우기 위해 볼링장 앞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이제 막 게임을 끝낸 아내가 피곤한 표정으로 차에 올라탔다. 아침 9시에 볼링장에 도착해서 오후 4시까지, 무려 7시간 동안 그곳에 머물며 경기에 몰두한 것이다. 함께 참가했던 사람들 역시 대단한 열정으로 하루를 보냈을 테지만, 무엇보다 내 아내의 열정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 안에서 아내는 오늘의 성적이 좋지 않았다며 투정을 부렸다.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아 몸이 더 피곤한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피곤해 보인다는 맞장구를 쳐주며 그녀의 기분을 위로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내가 7시간 동안 볼링장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열정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때 아내에게 부족했던 체력과 의욕이 돌아왔다는 증거였다. 오랜 시간 건강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던 그녀가 다시 한 번 좋아하는 스포츠에 몰입할 수 있는 체력을 키워냈다는 사실이 내 겐 대견했다. 성적이 좋지 않았던 오늘의 결과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아내가 이토록 오랜 시간,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몸을 맡길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아내가 투정을 부릴 때마다 나는 피곤하다는 그녀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속으로는 조금은 웃음이 났다. 그녀가 그 자리에 설 수 있는 자신감과 체력을 되찾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값진 하루였으니까. 열정이란 것은 때로 성과로만 판단할 수 없는 것 같다. 결과가 어떻든 그 순간을 견디고 즐길 수 있는 에너지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차 안에 가득 찼던 피곤한 분위기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점차 사라졌다. 나는 아내의 열정과 회복을 보며 더 큰 위로를 느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그저 끝까지 해내는 마음과, 그렇게 함께하는 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돌아오는 길,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하늘의 밀도 속에서 곧 눈이 내릴 것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하루 종일 책과 씨름하느라 일기예보를 미처 확인하지 못했지만, 집에 돌아와 보니 내일 대구에도 제법 많은 눈이 내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집으로 돌아오자 아내는 샤워를 마치고 나는 저녁 준비에 들어갔다. 이른 저녁을 먹고 나서 우리 가족은 자연스럽게 TV 앞에 앉았다. 어제에 이어 호주오픈 테니스 남자대회 결승전을 잠시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조코비치. 내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테니스 선수였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 그는 4강전 첫 세트를 지고 부상으로 기권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나 아쉬웠을까?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자신과 싸우며 훈련했을 텐데, 역대 최대 그랜드 슬램 우승이라는 역사적인 기록을 눈앞에 두고 포기해야 했던 그의 마음은 아마 그 자신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결승전은 세계 랭킹 1위 시너 선수와 2위 츠베레프 선수의 경기였다. 그러나 첫 세트를 지켜보면서 초반에는 대등하게 보이던 두 선수의 대결이 후반부로 갈수록 실력 차이가 조금씩 드러나는 듯했다. 어제의 여자 결승전이 긴장감 넘치는 드라마 같았다면, 오늘의 경기는 상대적으로 흥미가 덜한 평범한 흐름처럼 느껴졌다.
결국, 나는 서재로 들어와 일기를 쓰며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오늘은 2025년 설날 연휴의 첫날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조용하고, 연휴의 흔한 설렘조차 느낄 수 없는 하루였다. 아니, 어쩌면 연휴인지도 모른 채 보낸 그런 날이었다.
하지만 이 고요한 하루가 싫지만은 않았다. 연휴라는 특별함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졌던 건 책과 함께한 시간이었다. 익숙한 루틴을 따라 고독을 즐기며 보낸 오늘이, 다른 어떤 흥겨운 명절보다 내게는 더 행복하게 다가왔다. 고독 속에서도 느낄 수 있는 이런 소소한 행복 이야말로 내가 사랑하는 일상의 조각이었다.
하늘은 여전히 눈을 품고 있는 듯 묵직했다. 하지만 오늘의 하루는 마치 그 눈이 내리기 전의 고요처럼 평화롭고 만족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