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by 마부자


오전 독서를 마친 후 창밖에서 밀려든 바람은 예상을 깨고 뜨거웠다. 구름이 가득한 잿빛 하늘 아래였지만 바람마저 후끈하게 덥게 느껴졌다.


병실 안은 조용했고 나는 창가 쪽 침대에 앉아 책 한 권을 읽었다. 그리고 운동을 대신한 루틴처럼 한 편의 영상을 시청했다.


오늘은 하대 작가가 소개한 도야마 시게히코의 <생각의 도약>이라는 책이었다. 짧은 문장 하나가 오래 마음에 남았다.


“잘 잊어야 제대로 창조할 수 있다.
망각은 단순한 기억의 삭제가 아니다.

머리를 정리하고 사고를 최적화하는 과정이다.

끊임없이 잊고 정리하고
진짜 중요한 것만 남겨야 한다.”

하와이 대저택 제공


망각.

몸이 아프고 병원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머릿속에는 그동안 살아온 삶의 장면들이 무작위로 떠오르곤 한다. 잘한 일과 후회되는 일, 기쁘고도 아팠던 기억들.


그런데 정작 그 수많은 기억들이 내게 지금 어떤 의미로 남아 있는지를 묻는다면 쉽게 대답할 수 없다.


기억이 많다고 해서 삶이 풍부해지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 반대다. 쌓여 있는 기억들이 오히려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


과거의 잘못된 선택이나 상처 또는 부끄러운 순간들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망각은 그래서 꼭 필요한 감정이다. 의도적 삭제가 아니라 스스로 나아가기 위한 정리의 기술이다. 우리는 자주 새로운 삶을 원하면서도 과거를 끌어안은 채 움직이지 못한다.


마치 이미 지나간 일을 곱씹으며 현재를 붙잡고 있는 듯한 모순된 삶을 산다. 나 역시 그랬다. 과거의 어느 말, 어느 표정, 어느 관계 속에서 내가 했던 기억들.


그 기억들로 인해 맴도는 마음은 지금의 나를 소진시키곤 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조금씩 깨닫는다. 망각은 어떤 감정의 배신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선택이라는 것을.


병을 통해 나는 망각의 진짜 의미를 체감한다. 고통은 기억 속에 오래 머문다. 그러나 그 고통조차 잊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모든 치료는 고통을 기억하지 않으려는 몸의 의지에서 시작된다. 오늘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어제의 고통을 접어두는 일. 그것이 망각의 첫 걸음이다.


그렇게 망각은 우리를 회복하게 만들고 다시 삶의 중심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기억은 쌓을수록 무거워진다. 그러나 망각은 그 무게를 덜어준다. 기억이 과거에 내린 쌓인 눈이라면 망각은 미래를 위해 쌓인 눈을 녹이는 햇살이다.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 선택적으로 남기는 기억과 과감히 지우는 감정들 사이에서 나의 사고는 정돈되고 나의 삶은 가벼워진다.


잘 잊는다는 것은 단순한 무관심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정교한 선택이다. 중요한 것을 남기기 위해 다른 것들을 덜어내는 일.


비워야 채울 수 있고 잊어야 다시 쓸 수 있다. 창조는 언제나 여백에서 출발한다. 생각의 도약은 바로 그 여백의 존재에서 생겨난다.


망각은 잊어버림이라는 의미로 분류한다면 도망의 의미로도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결코 도망이 아니다. 외면도 아니다. 그것은 삶을 계속해 나가기 위한 하나의 태도다.


기억의 무게에 눌려 주저앉지 않기 위해 우리는 때때로 덜어내야 하고 잊어야 한다. 무언가를 잊는다는 것은 그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더 중요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함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내 마음을 온전히 남겨두기 위해 나는 다른 불필요한 기억들을 비워야 한다. 생각도 감정도 기억도 모두 그렇게 순환된다.


나는 오늘 ‘망각’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망각은 지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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