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의 마지막, 일요일이다. 달력으로 보면 그저 쉬는 날 하나일 뿐인데, 마음으로는 일주일 치 생각을 한꺼번에 정산해야 하는 날이다.
이번 주를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단연 ‘한파’다.
추위가 아니라 거의 의지 테스트에 가까운 날씨였다. 밖에 나갈 생각이 들면 바로 창문을 열어 확인했다. 그리고 늘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아, 아직 인간이 나갈 수 있는 온도는 아니구나.”
이렇게 해서 나는 자연스럽게 집에 눌러앉았다. 눌러앉았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자발적 집콕이 아니라 기후에 의한 강제 수용 생활이었다.
대신 책을 읽고, 생각을 하고, 가끔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며 시간을 보냈다. 이번 주 나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지만, 대신 생각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이사를 다녔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대한이다. 24절기 중에서도 이름부터 차갑게 들리는 절기는 어릴 때는 시험에 나오는 단어였고, 지금은 무릎과 어깨가 먼저 알려주는 절기가 되었다.
대한은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말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지금은 뭘 더 하려고 애쓰지 마”라고 속삭였다. 나는 그 말을 아주 성실하게 따랐다.
덕분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를 죄책감 없이 보낼 수 있었다. 이쯤 되면 대한은 거의 내 편이다.
집에 머무는 날 중 하루는 우연히 텔레비전을 켰다가 프리다 칼로의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나는 그림을 잘 모르지만, 이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하드한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몸은 아팠고, 인생은 험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기 자신을 바라봤다.
천장에 거울을 달아 자화상을 그렸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잠시 나를 돌아봤다.
나는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들고 내 얼굴을 보는 것도 귀찮아하는데, 그녀는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림을 그렸다.
비교 자체가 실례지만, 그 순간만큼은 나도 자세를 바로 고쳐 앉았다. 최소한 리모컨은 내려놓았던 것 같다.
프리다 칼로의 이야기는 이번 주 내 생각의 한복판에 앉았다. 그녀는 고통을 극복한 사람이 아니라, 고통을 끌고 살아낸 사람이었다.
생각해보면 나도 이번 주 한파를 끌고 살았다. 물론 차원이 다르지만, 그녀는 예술로 남겼고, 나는 전기요금으로 남겼다.^^
한파 덕분에 책과 함께 사유하는 시간을 제법 많이 가졌다. 법에 관한 책을 읽으며 형량과 당위 같은 단어 앞에서 고개를 끄덕였고, 소유냐 존재냐를 읽으며 “오늘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게 과연 하루인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내렸다.
음 내가 결론은 이거였다. 아무것도 안 해도 존재는 성립된다.
오히려 아무것도 안 할 때 존재감이 더 선명해질 때도 있다.
특히 소파와 한 몸이 되었을 때.
아내와 텔레비전 속 먹방과 여행 프로그램을 보며 더 이상 설레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처음엔 나이 탓인가 싶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보고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가보기도 전에 다 아는 느낌. 먹어보기도 전에 맛을 아는 느낌. 그래서 설렘이 사라진 게 아니라, 미리 다 써버린 것 같았다. 설렘도 이제는 선불 시대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주의 유일한 외출은 치과였다. 치과는 약속이 아니라 집행이다. 아무리 한파가 몰아쳐도 연기할 수 없다. 롱패딩에게 두번 패하지 않았고, 지난주에 만났던 어르신의 안부를 물었다.
다행히 잘 치료받고 가셨다는 이야기에 치과에서 뜻밖의 따뜻함을 느꼈다. 이쯤 되면 치과는 치아보다 인생을 관리하는 곳인 것 같다.
돌아보니 역시나 이번 주는 특별한 사건은 없었다. 소소한 일들로 인해 웃고 울었으며, 설레였고 좀 더 진지했던 날들이었다.
몸보다는 감정이 더 많이 활동한 한주였던 것 같다. 그런 일요일의 나는 다음 주를 계획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도 이번 주, 나름 잘 버텼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한파 속에서도 웃을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웃으며, 나는 이 한 주를 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