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소적인 내가 엄마가 되었다
나를 잘 모르거나 가볍게 아는 사람들에게 긍정적이라는 오해를 살 때가 있습니다. 제가 습관적으로 미래지향적인 말들을 대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 봅니다. 정말 타고나게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은 긍정 로봇 같은 말을 되풀이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건 나의 근본이 냉소주의자라는 증거일 것입니다.
저는 냉소주의자입니다. 부정보다 나쁜 것이 냉소입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불평이라도 하지 냉소적인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까요.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질려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 필사적으로 에너지를 얻으려 합니다. 굳이 따지자면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냉소인이라 할까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문장 부호는 느낌표, 음악 장르는 펑크 (그중에서도 조선펑크), 색깔은 명도가 높은 밝은 색입니다. 이렇게 온몸을 밝고 힘찬 것으로 둘러싸야 중간이 찾아지는 기분입니다. 저의 마이너스 근본과 살고자 하는 플러스 의지 사이에서요!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 머릿속으로 내적 사투를 하느라 저의 멘털은 살짝 지쳐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거나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 피곤한 걸 왜 되풀이하고 싶겠어요.
그런 제가 요즘 딸을 보며 겪어보지 못한 감정을 느낍니다. '아이로 한 번 다시 살아보고 싶다'라는 감정입니다. 요 한두 달간 흘러지나 간 딸의 일상을 봅니다. 저 재미난 표정을 보면 이해하지 못했던 퍼즐 한 조각을 발견한 기분이 듭니다. 어떤 퍼즐이냐면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마약 중독자들은 일상생활에서 깊은 우울을 느낀다고 합니다. 약으로 경험한 도파민의 양과 일상생활의 그것이 괴리가 크기 때문입니다. 도파민 수치만 보면 약의 힘을 빌리는 자들이 더 행복해야 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자신이 설정한 기쁨의 기준과 일상 사이의 간격이 행복과 우울의 정체인 것입니다.
그 간격이 좁을수록 행복한 사람, 넓을수록 우울한 시람이 되는 것이겠지요. 아이들의 행복한 얼굴이 이해가 되는 설명입니다. 행복감을 가져다주는 호르몬인 도파민 최대용량을 매일 갱신해 가는 과정인데 얼마나 짜릿하고 충만할까요.
지금 와서 아이들처럼 행복의 최대치를 갱신할 수 있을까요. 아마 힘들 것입니다. 조바심에 말초적인 기쁨을 찾기도 합니다. 달고 짠 음식이나 술 뭐 이런 것들에서요. 순간의 기쁨은 즐겁지만 그게 다입니다. 허무함을 느끼지 않으려면 조금 덜 재미있더라도 일상을 사는 게 낫습니다. 맛있는 건 라면이지만 주식은 집밥이어야 하는 것처럼요.
일상은 우리를 평안하게 하지만 지루하기도 합니다. 내 평생이 이렇게 흘러가는 걸까 아쉬운 마음도 듭니다.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어른이 되어서 행복을 좇는 건 허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손쉬운 방법은 아이로 다시 사는 것일 것입니다만 허무맹랑한 바람일 뿐입니다. 저는 짜릿한 행복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행복이라는 단어 자체가 19세기에 서양에서 들어온 개념으로 일본이 한자어로 번역한 신조어라고 합니다. 행복은 한자어로 다행 행, 복 복 자를 씁니다. 복은 lucky의 복입니다. 복이라는 것은 우리가 노력한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하려고 할수록 그것이 멀리 달아나는 기분이 드는 건 착각만이 아닌 것입니다.
일본이 신조어를 가져오기 전 우리나라에서는 안녕이라는 말을 행복 대신 주로 썼다고 합니다. 불어로 행복은 bonheur (보너)입니다. Bonheur는 bon(좋은) + heure(시간) 두 단어의 축약형으로 좋은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lucky와 bon heure, 행복과 안녕. 비슷하지만 다른 두 단어의 어감의 차이에서 저는 또 대답을 얻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행복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이 얼굴 외에는 행복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행복은 내 것이 될 것 같지 않지만 안녕이라면 가능할 거 같습니다. 행복은 딸의 얼굴에 양보하려고 합니다. 행복은 아이의 것. 엄마가 된 나는 안녕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