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온기, 예상 밖의 만남
<작은 온기, 예상 밖의 만남> 2
그때, 휴대폰이 진동하며 주머니 속에서 가볍게 울렸다. 낯선 번호였지만 거래처에서 오는 전화일 가능성이 높았다. 종혁은 무심하게 전화를 받았다. 트럭 내부를 채운 퀴퀴한 매연 냄새가 순간 옅어지는 듯했다.
“여보세요? 예, 택배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뚝뚝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맑고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노인의 쩌렁쩌렁한 고성과는 대조적으로, 그 목소리는 마치 고요한 아침 햇살처럼 스며들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오종혁기사님 되실까요? 메멘토출판사 홍보팀 슬아입니다.
저희 쪽 택배 접수 드린 거 확인 전화드리려고요. “
종혁은 딱딱하게 굳어있던 표정을 저도 모르게 살짝 풀었다. 매일같이 듣던 서비스센터 직원의 무미건조한 응대만 듣다 이렇게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니 낯설기까지 했다.
“네, 맞습니다. 접수 확인됐습니다.”
그의 말끝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아, 다행이네요! 혹시 몇 시쯤 오실 수 있으실까요? 저희가 보내는 물량이 좀 많아서요. 미리 준비해 두면 기사님도 편하실 것 같아서요.”
슬아의 목소리에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투명하게 묻어났다. 물어보는 말 한마디에도 진심 어린 친절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종혁은 잠시 시간을 가늠했다. 시계는 이미 정오를 향하고 있었다.
“음… 한 시간 반 정도 뒤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정확한 시간은 도착 10분 전에 다시 전화드릴게요.”
“네, 괜찮아요! 그럼 미리 준비해 두고 기다리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파이팅 하세요!”
슬아는 마지막까지 따뜻한 인사를 잊지 않았다.
그 흔한 ‘수고하세요 ‘ 대신, 그의 하루를 응원하는 진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전화를 끊자마자 종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파이팅 하라니….‘ 건조하고 팍팍한 하루에 단비 같은 한마디였다. 마치 지쳐 쓰러지기 직전의 사막 위 여행자에게 건네진 한 모금의 물처럼. 그의 발걸음은 저절로 모먼트출판사 쪽으로 향했다. 트럭의 거친 진동 속에서도 발걸음마다 느껴지는 가벼움이 어깨의 육중한 짐을 잠시나마 덜어주는 듯했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조금 일찍 메멘토출판사에 도착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사무실 문을 열자, 화사한 미소를 지닌 여성이 종혁을 맞이했다. 마흔 중반쯤 되어 보이는 그녀는 송장 위에 '담당자 김슬아'라고 적어 놓았다. 그녀의 눈빛은 깊고 온화했으며, 그 미소는 억지로 지어내는 친절이 아니었다. 따뜻한 진심이 눈빛과 미소에 그대로 서려 있었다.
“어머, 기사님 벌써 오셨네요! 연락 주신다고 했는데, 괜찮아요! 저희도 다 준비했어요. “
슬아는 활짝 웃으며 사무실 한쪽에 차곡차곡 쌓인 박스들을 가리켰다. 박스들은 테이프까지 깔끔하게 붙여져 있었고, 송장도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종혁은 이런 완벽한 준비에 적잖이 놀랐다. 대부분의 거래처는 부랴부랴 박스를 찾고, 테이프를 붙이는 게 다반사였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다 준비해 주셔서 제가 편하네요.”
종혁은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드물게 온기가 실렸다.
“별말씀을요! 기사님 고생하시는데 저희라도 이렇게 해드려야죠.”
슬아는 웃으며 탕비실로 향했다.
잠시 후, 그녀는 작은 종이컵에 시원한 오렌지 주스와 함께 포장된 초코파이를 들고 나왔다.
“이거 드시면서 잠깐 쉬세요. 더운데 고생 많으시죠?”
컵에 맺힌 차가운 물방울만큼이나 그녀의 마음은 시원하고 다정했다.
종혁은 예상치 못한 간식과 음료수에 당황하면서도 따뜻한 마음에 울컥했다.
“아이고, 괜찮습니다. 이런 것까지….”그의 말은 흐릿하게 잦아들었다.
“괜찮으니까 드세요. 저도 예전에… 참, 일하다 보면 목마를 때 많잖아요.”
슬아는 빙긋 웃으며 종혁의 손에 주스컵을 쥐여주었다. 그녀의 진심이 담긴 미소는 차가운 박노인의 태도와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종혁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슬아의 다정함은 그의 마음에 따스한 꽃을 피워 올렸다. 잠시나마 굳어있던 얼굴 근육이 풀어지고, 피곤함이 싹 가시는 듯했다. 물건을 다 싣고 돌아서는 종혁에게 슬아는 다시 한번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조심히 가세요, 기사님!"
그녀의 목소리는 등 뒤에 남긴 잔향처럼 종혁의 마음을 감쌌다.
종혁은 트럭에 올라타면서도 그 미소와 달콤한 주스 맛을 잊을 수 없었다. 예의 바른 청년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너그러워져 뭐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들곤 하는데, 어쩌면 슬아에게 자신이 그런 존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마음속에 작게 피어난 꽃 한 송이가 여전히 그 향기를 전하는 듯했다. 무심했던 하루에 불어온 한 줄기 훈풍이 그의 메마른 일상에 작은 변화의 씨앗을 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