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rocco - 사하라의 황금 도시 시질마사
사하라
토드라 계곡을 지나서 사하라Sahara로 가는 길에 거의 하나밖에 없는 레스토랑, 사람들로 북적이는 것이 사하라로 가는 이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쉬어간다. 지금 먹어두면 늦은 밤에나 음식을 먹을 것이니 맛은 둘째치고 일단 배를 채워야 했다. 스파게티도 닭고기가 들어간 타진도 먹을 만했다. 여행 중에는 없던 식욕도 생기는지라 웬만하면 감사해하면서 먹는 편이다. 어쨌든 쉬면서 다른 여행객들도 만날 수 있고, 야외 테이블이 있어, 살짝 여유를 즐길만한 햇살도 좋다.
메르주가가 가까워지자 사하라에서 나온 화석을 가공하는 공장이 보인다. 마라케시에서 아틀라스 산맥을 넘을 때 휴게소에서 팔고 있었던 화석들에는 “그 옛날 바다였던 아틀라스에서 화석이 많이 나오는구나,”생각하면서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갑자기 무더기로 눈앞에 보이는 수만 년 전의 생소한 생물들의 모습에는 그저 놀라웠다. 박물관에서는 볼 수 없는, 가공하기 전의 귀한 암모나이트, 삼엽충 등의 화석들이 햇살 속에서 나른한 숨을 쉬듯 누워 있다.
화석이란 말은 살아있는 것이 돌로 변화했다는 뜻인데 라틴어가 어원인 Fossil이란 말은 ‘땅에서 파낸 기묘한 물건’이란 뜻이라고 한다. 화석에 대한 지식이 짧아 자세히는 모르지만 연잎 모양을 닮은 식물의 화석은 마치 추상화 작품을 연상시키며 탄성을 자아낸다. 파울 클레와 칸딘스키의 작품을 닮은, 공간 속을 부유하는 지질시대의 생물들과의 만남은 ‘Fossil’이란 단어의 뜻처럼 정말로 기묘했다.
내부의 전시장에는 부유한 손님을 기다리는 화석을 가공하여 만든 테이블과 각종 생활도기들이 눈길을 끈다. 동양인들, 특히 돈 많은 중국인들이 많이 구입한단다. 소용돌이 형태의 소라 화석으로 만든 작은 테이블 하나쯤 곁에 두면 먼 옛날 바다이야기를 들려 줄까?
사하라의 황금 도시‘시질마사Sijilmasa’
화석 공장 앞에서 허허벌판을 바라보니 호텔로 보이는 큰 규모의 카스바만이 이 길목이 여행객들이 많이 지나다닌다는 것을 알려준다.
8세기도 훨씬 전부터 이 길은, 아니 이 지역은 황금으로 전대가 두둑한 카라반들이 주인이었던 길목이었다. 짐을 실어 나르는 마차와 단봉낙타들을 연결한 줄로 길목이 번잡했으며, 높은 망루가 있는 화려한 카스바 여관들은 즐비했다. 메르주가에 가까이 온 것이라면 이 지역은 8세기에서 14세기까지 중계무역으로 번창했던 카라반 대상로의 중심도시 ‘시질마사’가 있었던 곳이다.
남쪽의 가나 왕국에서 사하라를 넘어온 카라반의 행렬은 시질마사Sijilmasa에서 금과 노예, 목화 등을 내려놓고 쉬었다가 가나 왕국으로 가지고 갈 소금과 직물 등을 실었다. 시질마사에서 분배된 물건들은 아틀라스를 넘어 모로코의 대도시와 이집트, 다마스쿠스나 바그다드,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으로 흘러들어갔다. 14세기 경 Berber왕조에 점차 흡수되면서 시질마사의 역할은 점차 잊혀 갔지만, 도시의 흔적으로 남은 폐허는 메르주가에서 약 40km 떨어진 Rissani와 가까운 타피라레트Tafilalt oasis에 있는 River Ziz강을 따라 지금도 5마일이나 놓여있다고 한다. 시질마사는 14세기까지 중세 마그레브Maghreb 서부사하라 무역루트의 전설적인 황금도시였다.
메르주가Merzouga로 내려갈수록 마을이나 지나가는 사람들의 피부색은 어두워진다. 흑인들은 모로코의 도시에도 많지만 베르베르인 중에도 흑인들만큼 피부색이 검은 경우가 있다. 마그레브에 흑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것은 사헬(사하라 이남 접경지역) 지역과 흑아프리카(사헬지역 아래)가 사하라와의 왕래가 많았기 때문이다. 사하라를 넘어 지중해 상권인 마그레브와의 교역은 시작점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역사가 깊다. 로마 점령 시절에도 로마가 들여온 단봉낙타를 이용한 카라반의 주요 물품은 서아프리카의 금을 비롯한 무역품은(점차 소금과 피혁 등) 모로코로 운반되었다.
혹독한 사하라를 건너기 위해서는 인적자원이 많이 필요하다. 대상들은 노예 계약을 맺은 흑인들을 데리고 다녔는데 이동 도중에 죽지 않고 마그레브에 도착한 사람들은 계약이 끝난 후, 오아시스에 정착하거나 토산물을 파는 상인이나 군인 등에 종사하면서 마그레브 사회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예를 들자면 모로코의 왕궁을 지키는 군인들은 대부분 흑인들이다.
메르주가Merzouga는 모로코 남동쪽의 작은 마을로 약 50Km 밖에 알제리 국경이 있다. 지금은 모로코 사막 여행의 베이스캠프로 많은 관광객들을 위한 호텔이 사막과 연결되어 있다. 일 년 내내 비 한 방울이 아쉬운 이 지역이 2006년 갑자기 순식간에 쏟아진 홍수로 인해 많은 인명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홍수 이후 지하에 자연스럽게 어마어마하게 큰 지하수층이 생겼는데 결론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홍수가 남아있는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생명수인 셈이다.
Erg chebbi Desert
모로코에는 에르그 쉐비Erg Chebbi 사막과 에르그 시가가 사막이 있다. 메르주가에 인접한 사막은 에르그 쉐비 사막이다. Erg 란 사구가 사방으로 이어지는 광대한 모래사막을 말하는데 사막에 들어가자마자 사구들이 바다의 큰 파도처럼 출렁이면서 이어지는 아름다운 모래사막을 경험할 수 가 있다.
메르주가는 사막여행의 중심지로 사막여행을 경험하기 위해 여행자들이 모여든다. 해넘이를 볼 수 있을 때 사막에 낙타나 지프를 타고 들어가서, 베르베르인들의 천막에서 베르베르식의 저녁을 먹고 그들의 리듬을 들으며 사막의 별을 보고 텐트에서 잠이 든다. 다음 날 새벽 일출을 보면서 메르주가의 호텔로 돌아와 아침을 먹고 도시로 출발하는 일정이다.
각지에서 모인 여행자들은 넘어가는 해로 인해 생긴, 긴 그림자를 즐기며 단봉낙타 등에 탄 카라반의 행렬처럼 남쪽을 향해서 내려간다. 앞에서 모래땅에 빠지지도 않고 가볍게 턱턱 걸어가는 낙타몰이를 하는 푸른색 전통복장을 한 베르베르족 청년에게서 강인함과 이국적인 매력이 느껴진다. 알제리에서나 튀니지에서도 느꼈지만 베르베르인들을 보면 카리스마가 보이는 강인한 남성성과 전통적 분위기에서 오는 우아한 아름다움이 뒤섞여 있다. 그러다가 말을 하면 환상이 깨지곤 한다.
지금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것, 사막 투어가 끝나면 청년은 배낭에 해머와 작은 곡괭이를 넣고, 광대한 먼 옛날 큰 바다였다는 사하라에서, 돈이 되는 화석을 찾아다닐 것이다.
해넘이를 보고 사구와 사구 사이에 있는 베르베르족 텐트에 도착했다. 사하라에서 해가 떨어지면 모래바람이 불고 기온이 내려간다. 그나마 텐트가 있는 움푹 들어간 웅덩이처럼 생긴 지역은 바람이 잠잠하다. 금방 내려앉은 어둠으로 보이는 것은 떨어질 것 같은 수많은 별빛보다도 검은색 둥근 하늘이 아늑하다. 마치 천문대에서 천정에 그려진 둥근 하늘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어둠에 낯선 몸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텐트 안으로 기어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으니 옆에 앉은 남자는 부부가 함께 온 미국인이다. 매우 반가워하는 것이 한국에서 2년 동안 어학원 교사를 했었단다. 이곳저곳 다녀온 한국 이야기를 하는데 반가웠다.
베르베르인의 리듬이 깊어가는 밤, 이곳에서 조금만 더 남쪽으로 내려가도 알제리 국경이다. 알제리와 모로코, 튀니지는 지구 상에서 가장 사이가 좋은 나라들이다. 사막지대를 제외한 이들의 국경은 먼 옛날부터 만들어졌고 한 나라로 통일되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모로코와 알제리가 서사하라를 놓고 갈등이 생겼다. 이유야 유럽의 강대국들이 식민지에서 늘 하던 식대로, 스페인과 프랑스가 싸움을 붙여놓고 빠져버린 것이다.
서쪽의 땅, ‘마그레브’와 서사하라
모로코에 다녀온 후 3월 말, 나의 관심을 끄는 뉴스를 볼 수 있었다.
“......반 총장은 3월 5일 북아프리카 순방 중 알제리의 스마라 난민촌에서 모로코에 대해 서사하라 지역을 ‘점령’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중략.... 반 총장의 ‘점령’ 발언에 분개한 모로코는 유엔 서사하라 총선 지원단의 민간인 직원을 철수하고 군사 연락사무소를 폐쇄하는 한편 총선 지원단에 대한 자금 지원도 끊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서사하라와 관련된 부적절한 발언에 모로코 정부에 사실상 사과했으나, 모로코 정부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는 AFP 통신 보도가 있었다.”
모로코의 역사는 알제리와 튀니지 리비아와 함께 많은 부분 역사를 공유한다. 동쪽의 아랍 이슬람 지역에서 ‘서쪽의 땅’이란 뜻으로 불렀던 마그레브라는 지명을 그들은 사랑하는 것 같았다.(마그레브라는 지명을 많이 사용한다)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는 마그레브란 연합으로 오래전부터 함께 했던 역사와 함께 묶였으며 나중에 리비아와 모리타니가 마그레브연합에 합류했다. 이들이 사랑하는 정신적 문화적 근간의 뿌리는(모로코의 인구분포는 이주민인 아랍인은 65%, 베르베르족은 35% 내외이며 남부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과 유럽인, 유태인 등으로, 베르베르족이 아랍족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임에도 불구하고) 베르베르족과 베르베르 어이다.
역사는 기원전 2000년대 말경 베르베르족이 모로코에 들어왔다고 적고 있다. 이후 지중해는 기원전 12세기경에 페니키아가 기원전 5세기경에는 카르타고, 그다음에는 로마라는 큰 물결이 근간을 이루는데, 7세기 말에 아랍에서 온 이슬람교도의 침략을 받았으나 모로코는 독립을 지켜냈다. 711년 이베리아 반도에 이슬람 세력이 도래한 이래 세계적으로 학문과 문화가 융성했던 코르도바 칼리판테가 1031년 멸망하자 11세기와 12세기 초까지 베르베르 왕조인 알모라비드 왕조(1040~1062)와 Almohad 왕조는 스페인의 이슬람교도 지역까지 통치했으며 13세기경부터는 점차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뒤를 이어 마리니 왕조와 1550년경에는 사디 왕조가 등장했으며 1492년, 기독교 국가들의 레콩키스타로 인해 약 800년간의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세력은 막을 내린다.
1884년 베를린 회의, 유럽 국가들 아프리카를 나누다. 서 사하라 분쟁의 시작이었다.
16세기 이후 유럽 국가들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앞 다투어 식민 영토를 확장해나갔지만 정작 지중해 앞바다에 있던 그들의 역사권과 맞닿아 있던 코앞의 북아프리카에게는 19세기가 되어서야 식민의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830년 이후 북아프리카에 대한 프랑스, 영국, 스페인의 호시탐탐 탐욕의 이빨을 드러내는 간섭이 심해지면서 스페인은 1859년 모로코에게서 중요한 영토를 얻어냈으며 1884년 비스마르크의 중재로 열린 베를린 회의에서 유럽 국가들은 아프리카 분할을 합의하여 지금의 분쟁지역인 서 사하라는 스페인이 점유하게 된다. 1906년에는 서사하라에서 주민들의 반 스페인 봉기가 일어났으며 모로코는 결국 1912년에 프랑스 보호령이 되었다. 1934년 당시 모로코를 점령하고 있었던 프랑스는 게릴라 식으로 일어나는 서 사하라의 반란을 진압한다.
1956년 프랑스에서 독립한 모로코는 서 사하라 북부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으며 서 사하라 해방운동단체를 중심으로 반 스페인 국지전이 일어난다. 이에 1973년 유엔은 이곳을 국제 분쟁지역으로 결정하였으며 국제 사법 재판소는 서 사하라의 독립 필요 의견을 제시했으나 모로코 정부는 이에 반대, 서 사하라 북서지역에 군대를 진주시킨다.
이미 복잡해진 이 지역에서 1976년 스페인은 아무런 대책 없이 군대를 철수하자 서사하라는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으로 독립한다. 강대국들이 늘 그렇듯이, 이미 국제적으로 뜨거워진 감자를 어찌하지 못하고 알제리의 지원을 받는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의 폴리사리오POLISARIO(사하라 민족해방 조직 단체)와 모로코와 모리타니아가 서로 싸우도록 만들어버리고 원인이 되었던 스페인은 슬쩍 빠져 버린 것이다.
이런저런 갈등 끝에 1989년 모로코와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 간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으나, 국지전은 계속되었고 1991년 정전협정으로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에는 유엔의 평화유지군이 주둔하게 된 것이다.
사하라에는 생각보다 많은 마을과 도시들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사막을 근거지로 살아간다. 알제리는 모로코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멀찌감치 빠져 있는 시점에 유엔이 모로코의 심기를 건드려 악화시킨 사건인 것 같아서 마음이 언짢았다. 모로코와 알제리 모리타니아와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 간의 지혜로운 접점을 찾는데 유엔 사무총장의 지혜로운 역할이 아주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