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루 May 27. 2019

쑤저우 가는 길

#2 어쩌다가 '강남수향', 최부崔溥와 쑤저우 


항저우에서 쑤저우로     

   

11시 05분 발 쑤저우행 고속열차를 타기 위해, 항저우 중심지 핑하이平海루 근처의 지하철 1호선 롱샹치아오龙翔侨 지하철역에서 출발하여 항저우 훠처동짠역에서 내렸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1층으로 올라가면 항저우 동역(杭州东站) 매표구가 나온다. 공항만큼 큰 항저우동역의 규모에 당황하기도 전에, 1층 가장 왼쪽 매표구에서 줄을 서 여권과 예약번호를 보여주고 서울에서 예매한 기차표를 받아 들었다.   

        

항저우에서 상하이 홍차오역을 지나 쑤저우까지는 약 1시간 30분, 정확한 시간에 도착한다. 이제는 웬만한 오지까지도 들어가는 고속철로 인해 신장이나 티베트 지역 등 보안이 강화된 특별한 구역을 제외하고는 중국 땅은 세계 어느 곳 보다도 여행 인프라가 매우 훌륭하다.      

   

역시 규모가 큰 쑤저우(북) 역에서 표를 보이고(표는 나올 때까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람들을 따라 오른쪽으로 나오다 보면 왼쪽으로 택시 승강장이 보인다. 타자마자 미터기가 꺾인다. 감동이다. 중국에 오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택시기사와 다툴 일은 반비례한다. 호텔 이름을 말하기가 무섭게 택시는 쑤저우 성 밖 북쪽 중앙에 위치한 역을 빠져나오더니 바로 성안으로 들어와 교통이 수월한 서쪽 운하 물길인 外城河를 끼고 달린다. 춘추시대(기원전 770~기원전 453) 오吳나라의 도읍이며 중국 귀족문화의 중심지 강남江南에 들어온 것이다.        

    

하늘에는 천국, 땅에는 쑤저우와 항저우     

  

쑤저우 성은 춘추시대(기원전 770~기원전 453년) 오吳나라의 합려闔閭 왕 때 재상이었던 오자서伍子胥로 하여금 성을 쌓게 하였다고 하니 도시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중국 학자가 쓴 저서에는 기원전 514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589년 수 문제 시절 쑤저우苏州로 명칭 했는데 쑤저우의 서북쪽에 있는 고소산의 이름에서 왔다고 한다. 고소姑蘇란 쑤저우의 옛 이름이다. 그 이후로도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놓치지 않았던 쑤저우는 언제나 항저우와 더불어 강남지역의 중심지였다.      


변방이었던 강남이 눈에 띄게 경제적으로 발전한 시기는 누가 뭐래도 오나라와 월나라가 춘추오패가 되었던 춘추시대(기원전 770~기원전 453)였을 것이다. 오나라가 춘추시대의 패자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쑤저우 인근 우시無錫에는 주석광산이 있어 양질의 무기와 농기구를 만들 수 있었다.(한나라 이후 주석이 없다는 뜻의 도시 이름 無錫이 되었다) 농기구의 발달로 개간의 속도도 빨라졌고 인구가 많아졌으며 돈이 많아지니 특히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당시 오나라의 재상이었던 오자서伍子胥( ~기원전 484)는 이웃나라인 초楚나라 사람이었으며 손자병법으로 더 알려진 손무孫武(기원전 545년경~기원전 470년경) 역시 제齊나라 사람이지만 오나라 왕 합려闔閭의 군사軍師가 되었다.         


박물관에 있는 오吳나라 당시 사용한 검을 보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칼의 곡선과 문양은 아름답고 견고하다. 명검을 많이 가지고 있기로 소문난 오나라의 왕 합려闔閭는 죽을 때 검 3,000개를 무덤에 넣었다고 한다. 전국시대가 끝나고 나라를 통일한 진시황제는 합려의 명검을 찾아 쑤저우에 있는 합려의 무덤을 파헤쳤지만 검은 발견하지 못했다.

        

춘추시대(기원전 770~453)의 지도, 붉은 색 동그라미는 춘추오패이다.


쑤저우는 과 한나라 때에도 비단과 쌀 등 물산이 풍부하여 강남 최대의 도시로 발전했지만, 304년~439년경 중원이 흉노와 선비 등 북방 이민족들인 오호五胡의 세력권 안에 들어갔던 오호십육국 시대에는 지속적으로 이어진 대규모 북쪽 이주민들로 인해 강남은 더욱 번창한다. 당시 동진東晉 인구의 약 1/6이 강북에서 내려온 이주민이었다고 한다. 중원에서 내려온 귀족들은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물산을 바탕으로 강남에서 그들의 귀족문화를 태동시켰으며 그들이 비웃었던 만이(오랑캐)의 땅에서 진정한 중화문화의 꽃을 피웠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던 대다수가 소수민족인 토착민들은 도미노처럼 남쪽으로 밀려나는 신세가 되었다.

        

당나라를 거쳐 장강 삼각주 평야의 개간 작업은 가속도가 붙어 송 대(960~1279)에 와서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러 강남의 토지는 중국 최고의 생산지가 되었다. 민간인들의 상거래가 자유로워지자 화폐가 발달하였으며 바다와 물길로 인해 사통팔달인 강남은 바야흐로 중국 최고의 경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게다가 송이 강북을 금나라에게 빼앗기고 강남 이남으로 작아진 남송 시기였던 1127년부터 1279년 몽골의 쿠빌라이에게 멸망하기까지 쑤저우, 항저우를 비롯한 강남땅은 명실상부 중국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다. “하늘에는 천국, 땅에는 쑤저우와 항저우가 있다”라는 흔한 말로 강남의 존재감은 귀결될 만큼 현재도 중국인들이 가장 살고 싶은 도시 중의 하나이다.       

 

최부崔溥와 쑤저우  

      

쑤저우苏州 구 시가지를 지도에서 보면 남북으로 대략 4킬로미터 동서로는 3킬로미터에 해당하는 성을 장방형의 물길이 감싸고 있다. 자연스럽게 물길은 해자 역할을 하는 셈이다. 내가 달리고 있는 서쪽 운하가 있는 물길은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조선시대(성종 연간)의 젊은 선비 최부崔溥가 바다를 표류하다가 중국 동쪽 해안에 도착, 갖은 고초 끝에 운하를 타고 쑤저우에 호송되어 올라온 곳이기도 하다.      

    

최부崔溥(1454~1504)는 1487년 추쇄경차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몇 개월 후 1488년 제주도에서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관료 및 수행원들과 고향인 나주로 가던 중에 폭풍우를 만나 14일간 표류하다가 명나라의 해안(지금의 저장성 해안)에 도달했다. 왜구로 오인받아 생사를 넘나드는 갖은 고난 끝에 명나라 조정의 도움으로 소흥, 항저우, 가흥을 지나 소주 양주를 거쳐 대운하를 타고 북상하여 베이징을 지나 표류한 지 6개월 후 43명 전원이 귀국했다.


이후 성종의 명으로 1488년(성종 19) 표해록漂海錄을 집필하였는데 그가 저술한 표해록漂海錄(한길사, 페이지 239)에는 2월 16일 쑤저우 성에 도착하여 쑤저우를 운하에서 바라본 그의 심경이 잘 담겨있다. “3경(11시에서 새벽 1시)이 되어 소주 성을 동, 남, 서로 돌아 고소 역 앞에 도착했다. 보대교寶帶橋(쑤저우 남동쪽 운하를 가로지르는 긴 다리, 최부는 홍문(아치)이 55개나 있었다고 기록했다)에서 역에 이르기까지 양쪽 호숫가에 시가와 상점이 이어져 있었고 상선이 성시를 이루고 있어서 진실로 ‘동남 제일의 도회지’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이어 소주를 바라보며 감동적으로 술회하였는데(페이지 248) “소주는 옛날 오회吳會라고 불렸는데 동쪽은 바다에 연해 있으며, 삼강을 끌어당기며 오호(太湖)에 둘러싸여 있었다. 기름진 땅은 천리나 되고 사대부가 많이 배출되었다. 바다와 육지에서 나는 진귀한 보물, 즉 사紗나 라羅, 그리고 능단 등의 비단, 금, 은, 주옥, 그리고 장인과 예술인, 거상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든다. 예로부터 천하에서 강남을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했고, 강남 중에서도 소주와 항주가 제일이었는데, 소주가 더 뛰어났다. 낙교에는 상점이 별처럼 밀집되어 있으며, 여러 강과 호수가 흐르고 있어 그 사이로 배들이 드나들었다. 사람들과 물자는 사치를 자랑하고 있었고, 누대樓臺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또 창문과 부두나 나루터 사이에는 초礎와 민閩의 상선들이 핍주하여 운집해 있었다. 호수와 산의 맑고 아름다운 경치는 형형색색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배를 타고 고소(쑤저우의 옛 이름) 역에 도착했고 다음날 역시 떠나야 할 것이므로 뛰어난 경치와 기이한 유적들을 모두 상세히 기록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쑤저우를 더 관찰할 수 없음에 안타까워했다.    

     

쑤저우 반문고성 부근의 물길


표해록은, 1271년에서 1295년까지의 동방여행 이야기를 담은 베네치아인 마르코 폴로(1254~1324)의 ‘동방견문록과’, 당나라에 살았던 신라인들과 특별히 장보고에 관한 내용을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한 일본 승려 엔닌(79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더불어 중국 3대 기행문의 하나라고 한다.


최부는 죽음을 넘나드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뛰어난 관찰력과 지식으로 명나라의 교통과 물길, 기후, 풍습 등 다양한 방면에 걸쳐 기록하였다. 책을 읽다 보면 낯선 지명들이 이해를 더디게 만들기도 하지만 자세한 묘사 덕분에 당시의 상황이 영상처럼 그려진다. 이렇게 뛰어난 기행문이 한 번도 극이나 영화로 그려진 적이 없다는 것이(이미 나왔다면 다행이지만) 이상할 정도이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반문盤門고성이 나오겠구나 싶었는데, 택시는 왼쪽으로 꺾어 들어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것처럼 오래된 주택가의 꽤 넓은 저택 앞에 내려준다. 구시가지(쑤저우성) 남쪽 중앙에 위치한 전통 정원을 개조한 가든호텔쑤저우南園宾馆 에 3박을 예약했다. 저녁나절 호텔 안을 돌아다녀보니 현재는 호텔로 개조했지만 이곳도 쑤저우에서 꽤 이름 있는 원림인 南園이었다.


문화혁명 이후 마오쩌뚱의 후계자로 지목된 린뺘오林彪(1907~1971)와 그의 가족이 1960년에서 1970년 사이에 이곳에 머물곤 했다고 쓰여 있다. 차고에는 그가 사용하던 자동차가 박제처럼 아무 말이 없다.   

  

南園호텔의 내부
린뺘오林彪가 타던 자동차


그에 대해 찾아보니 1971년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소련으로 망명하다가 몽골 상공에서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했다고 한다. 그는 죽은 이후 중국 공산당에서 철저하게 부정되어왔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그의 이름이 자주 회자된다고 한다.    


여행지에서 호텔 선택은 주로 시내 중심이나 교통의 요지(버스터미널이나 기차역 부근) 등 들고나기가 편한 곳에 하는 편이지만 쑤저우에서는 오랜 시간 많은 이들이 밟고 지났을 조금은 조용하고 한적한 옛 도심을 느끼고 싶었다. 더군다나 호텔 주변에 망사원 등의 원림이 있는 것을 알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쑤저우에서의 첫 번째 목적이 쑤저우 원림园林을 만나는 것이었으니~  

매거진의 이전글 Prologue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