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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May 28. 2019

‘창문마다 물을 향해 열려있네’

#3 어쩌다가 '강남수향',  쑤저우 졸정원拙政園

    

        

쑤저우에는 오나라와 동진 시기, 당과 송으로 이어진 원림의 전통을 이어받아 부유한 상인들과 지주, 고관들이 살아 자연스럽게 저택들과 함께 원림이 꾸며졌다. 더욱이 퇴직한 관료들은 하나둘 모여들어 아름다운 원림을 조성하였으며 교류를 하였다. 그 시절 만들어진 쑤저우 원림은 중국 원림의 전통이 되었다. 성안에는 이 시대(송)의 원림인 창랑정滄浪亭이 남아있다. 쑤저우에서 가장 오래된 원림이기도 하다.


원림园林이란 우리말의 ‘뜰’, 일본식 말로는 ‘정원’을 말한다. 창랑정 이외의 남아있는 원림은 대부분 명, 청 시대의 것으로 청나라 말기에는 쑤저우성의 안팎으로 약 170여 곳의 원림이 있었다고 한다.    

     

졸정원拙政園은 쑤저우의 대표적인 원림으로 인근에 사자림과 쑤저우 박물관이 있어 같이 둘러보기가 편하다. 하지만 길에 가득한 사람들의 행렬을 피하기란 매우 어렵다. 졸정원을 그냥 건너뛸까 생각도 해봤지만 졸정원을 안 보고 쑤저우 원림을 말할 수가 있을까.

   

졸정원拙政園


“넘치는 사람들 때문에 원림의 진면목을 느낄 수가 없었다.”라는 후기가 많아 서둘러 아침 일찍 찾았다. 오전 7시경 호텔 맞은편 망사원網師園(왕쓰위엔) 정류장에서 쑤저우 박물관과 사자림, 졸정원 행 버스가 많아 쉽게 7시 30분 개관시간에 맞춰 들어갈 수 있었다. 단체 손님들이 몰려드는 9시경까지 충분히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다. 전날 망사원에 다녀왔던 터라 졸정원의 풍격은 저절로 망사원과 비교가 되었다. 망사원은 아름답고 섬세한 작품처럼, 한 치도 흐트러짐 없이 정교하게 계산해서 창조한 3D 조각 작품 같다면, 졸정원拙政園은 망사원에 비해 많이 넓은 공간과 어느 정도는 격식에서 자유로운 배치로 인해 나 자신이 기꺼이 풍경 속에 하나의 점이 될 수 있도록 허락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쑤저우의 대표적인 원림 졸정원拙政園(줘정위엔)은 쑤저우성 북동쪽에 위치한다. 원림의 이름은 “어리석은 사람이 정치를 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현재 정치를 하고 있는 자들과 정치에서 내려온 자신을 낮추어 지은 이름이다. 입구에는‘Humble Administrator's Garden’이라는 영문명이 새겨져 있다.    

  

녹의정绿漪亭, 초록빛 잔물결이란 예쁜 이름이다. 물놀이를 위한 배는 정자에 없어서는 안될 멋진 장식이다.

   

졸정원과 문징명   

     

졸정원 자리는 당 시대부터 저명인사들의 거처가 있었던 곳이며 원림 일부는 원元대부터 대홍사大弘寺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명대 조정에서 두 차례나 정치적 대립에서 밀려 낙향한 왕헌신王献臣(1474-1551)은 당시에 거의 폐허였던 자리에 1509년 졸정원을 짓기 시작했으며 당시 친분이 두터웠던 화가인 문징명(1470~1559)에게 설계를 맡겼다. 1526년까지 약 16년에 걸쳐 원림을 완성한 후에도 문징명은 1533년과 1551년 두 번에 걸쳐 당시 졸정원의 모습을 그린 졸정원도책을 시와 함께 남겼다. 그가 엮은 화첩은 말년까지도 졸정원에 드나들었다는 흔적이다. 자신이 설계한 졸정원도책 속 졸정원은 지금보다도 훨씬 소박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졸정원은 명대 최고의 문인화가였던 문징명이 사랑했던, 그의 철학이 구현된 원림인 것이다.   

   

정원의 바닥은 조약돌로 표현한 각종 문양으로 포장되어 있다.
졸정원 중원의 연못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배치가 되어 있다.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탑은 쑤저우의 랜드마크인 북사탑이다.
소박한 원림의 얼굴
삼십육원앙관, 보랏빛 유리로 만들어진 창을 열면 서로 다른 풍경들이 들어온다.


미술사는 전공과목 중 하나였지만, 중국화 특히 문인화는 단순한 지식일 뿐 내게 관심 밖이었다. 그냥 명대 吳파의 대표 화가로만 알고 있던 문징명을 긴 시간이 지난 후 쑤저우의 원림에서 만났다. 뜻밖의 인물인 그가 500년 전 졸정원의 회랑에서 바쁜 걸음을 내딛거나, 물 위 정자에서 고심하고 설계하는 분주 하거나 차를 마시면서 사색하는 그의 모습이 스냅사진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사람의 인연이란 묘하고 묘하다. 졸정원이 문징명과 나를 이어준 것이다.     

    

서울에 돌아와서 그의 그림들을 먼지 쌓인 책장에서 찾아보았다. 오랜 시간 묵어 있던 명대의 그림책 안에서 담담하지만 세련된, 때론 힘이 느껴지는 그의 작품들을 만났다. 부드러운 갈필渴筆(붓에 물기를 적당히 빼고 그리는 기법으로 거친 느낌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한다)을 사용해 섬세함이 돋보이는 1531년도 작 ‘품다도品茶圖’에서는 찾아온 친구에게 새로운 차를 대접하는 노년(당시 60세가 넘었다)의 여유롭고 평화로운 그의 생활이 느껴지며 그림 속에서 졸정원의 풍정이 오버랩되어 나타난다. 그림 위에 있는 화제畵題(시)를 읽고 싶어, 검색을 하고 한자의 뜻을 찾아가며 어렵게 대충 알아들었다. 한자에 문맹인 내가 참 부족하다.       

  

碧山深處絕纖埃(벽산심처절섬의) 푸른 산 깊은 곳, 속세를 떠나니

面軒窓對水開(면헌창대수개) 창문마다 물을 향해 열려있네.

榖雨乍過茶事好(곡우사과다사호) 곡우가 막 지나 차 따기 좋은 시절

鼎湯初沸有朋來(정탕초비유붕래) 찻물 끓자 벗이 찾아오는구나.    


한자의 뜻을 찾아보다가 정 ‘鼎’이 솥을 뜻하는 것을 처음 알았다. 자꾸 보니 고대에 제사에 주로 사용하는 다리가 있는 솥처럼 생겼다.         


‘죽난도’는 언제 작품인지 나와 있지 않지만 젊은 시절에 그린 것처럼 밝고 활달하며 구김이 없다. 품다도와 마찬가지로 60세가 넘어 그린 작품인 1532년 작 ‘虞山七星檜圖’는 가로로 길게 그려진 거침없는 소나무 그림이다. 늙은 소나무는 누구도 꺾을 수 없는 힘찬 기운이 느껴지며 추상적이기까지 하다. 그림책 속 그의 그림들은 거의 타이베이의 고궁박물관 소장이다. 타이완에 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순서대로 품다도, 그림부분만 확대, 죽난도이다. 책에 있는그림을 찍으니 옆 부분이 잘렸다.
1532년 작 ‘虞山七星檜圖’ 부분


차경借景, ‘창문마다 물을 향해 열려있네’     

   

‘차경借景’의 의미가 어디에서 먼저 시작이 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사실 이것은 중요하지 않다) ‘경치를 빌려오다’라는 뜻의 차경借景은 우리나라 원림 조성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풍광이 뛰어난 곳에서 이미 만들어진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개울 옆에 소박한 정자 하나 얹어 놓거나, 계절로 바뀌는 담 밖의 풍광을 감상하기 위해 나지막이 담장을 낮추거나 하는 것이 소쇄원이나 명옥헌 등 16, 17세기 우리나라 별서원림에서 보여주는 ‘차경’의 의미였다.     

 

하지만 쑤저우 중국 전통 원림에서 차경은 매우 적극적이고 계획적이면서 인위적이다. 졸정원의 많은 건물 중에서도 중원에 위치한 원향당远香堂(위엔샹탕)은 설계자 문징명의 생각이 그대로 투영된 건물이다. 사방으로 열린 원향당의 창문을 통해 바라보면 연못을 중심으로 원향당을 둘러싼 사방의 정경이 모양이 다른 정자나 누각을 끼고 있어 하나의 산수화처럼 제각각의 모습으로 들어온다. 차경借景 효과를 한 치도 틀림없이 표현한 모양이어서 설계자의 의도대로 열심히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원향당远香堂


스리랑카의 건축가 제프리 바와Geoffrey Bawa(1919~2003)가 콜롬보에 건축한 시마 말라카Seema malaka 사원- 베이라 호수에 떠 있는 듯한 사원으로, 밖에서는 들여다보이지 않지만 안에서는 사방이 열려있어 호수가 안으로 들어와 있다.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른  – 이 생각나면서, 한참을 원향당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닌 것이, 너무나 오랫동안 한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남자, 기다리다가 할 수 없이 그 남자와 더불어 원향당을 카메라에 담았다.  


Geoffrey Bawa, 콜롬보에 있는 시마 말라카Seema malaka 사원
시마 말라카Seema malaka 사원의 외부
시마 말라카Seema malaka 사원의 내부,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다.


원향당 뿐 아니라 졸정원의 많은 건물들 즉 의옥헌倚玉軒, 부취각浮翠閣, 견산루见山楼를 비롯한 정자 누각 등의 건물들은, 물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가산假山과 함께 풍경 속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또한 풍경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그것들은 풍경 속에서 돌출되지 않으며 경쾌하다. 뚫려있는 긴 창과 때로는 동그란 문을 통해 시선의 방향에 따라 또는 건축가의 의도에 따라 각기 다른 풍경들이 들어온다. 이처럼 가까운 곳의 풍광을 가져오는 방법을 ‘근차近借’라고 하며 쑤저우의 원림에서 보여주는 차경은 대부분 근차近借이거나 간접차경이다.


졸정원은 전체원림에서 차지하는 물의 공간이 약 5분의 3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당연히 멋진 간접차경이 많다. 그 중에서도 특히 향주香洲는 배 모양의 건물로 연꽃이 만개하는 여름에 오면 영락없이 연못 위에 떠 있는 배 모습이라고 한다.  

       

향주香洲,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한 건축물, 여름철에는 물과 향주사이에 만발한 연꽃으로 인해 더욱 배처럼 보인다고 한다.


원림을 돌아다니다 보면 세로로 길게 보는 것에 익숙해진다. 많은 것을 담아내는 가로 프레임의 그림이나 사진과는 반대로 창이 만들어 준 그림은 세로 화면 속 풍경이 많다.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은 세로보기의 발견이다.   

      

견산루見山樓는 1층에 둥근 입구가 있는 2층 누각이다. 매우 특별하며 아름다운 이곳은 태평천국의 난(1850~1864) 당시 태평천국 충왕忠王 이수성李秀成의 사무실 역할을 했다고 한다. 바로 옆에 위치한 쑤저우 박물관 한편에는 그가 머물렀던 충왕부가 남아있다. 뜨거웠지만 잔인했던 시절을 질주했던 아름다운 젊은 피, 이수성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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