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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May 29. 2019

대나무가 울창한 망사원의 담장을 걸어봤을까?

#4 어쩌다가 ‘강남수향’, 쑤저우 박물관苏州博物馆


오전 10시 30분경 생각보다 긴 시간 졸정원拙政園을 여유 있게 즐기며 누비고 다녔더니 아침을 먹지 않고 달려온 것도 잊어버렸다. 출구에서 나와 큰 길가로 조금 걸어 나오니 깨끗해 보이는 스낵 집이 보인다. 배고픈 김에 죽과 바오즈(만두) 등 예쁜 음식들을 이것저것 고르니 가격은 꽤 올라가지만 달달하고 심심한 것이 딱 내 취향이다. 음식점 이름은 ‘어희전전魚戲田田 노소주老蘇州’가볍게 먹는 아침으로는 제격이다.  

  

죽이나 훈툰같은 국물있는 음식과 같이 먹으면 든든하다.


이오 밍 페이 I. M. Pei 

 

4대 중국 원림이라는 졸정원과 유원보다도 가장 궁금한 곳은 쑤저우 박물관이었다. 졸정원과 담을 맞대고 있는 박물관은 쑤저우 성 안팎으로 꾸며진 많은 전통 원림처럼 황족이나 귀족, 재력가나 사대부 등 소수를 위한 공간이 아닌, 처음부터 일반 서민들을 위해 꾸며진 현대식 원림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쑤저우 박물관을 설계한 건축가 이오밍 페이 I. M. Pei(1917~2019. 5. 16)는 중국계 미국인으로 1935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MIT와 하버드에서 수학하였다. 이글을 다 쓰고 난 5월 16일 밤, TV앞에서 채널을 랜덤으로 돌리고 있는데 NHK가 잡혔다. 순간 자막에 내가 알고 있는 이름이 보이는 것이다. “I. M. Pei died”라고 적혀있다. 102세, 고령이긴 하지만 충격이었다. 그의 작품을 단 두 개밖에 못 봤으며 그의 작업여정을 궁금해 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1917년생인 그는 중국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에 태어났지만, 남들과는 달리 부유한 집안배경으로 인해 비참하거나 잔혹한 시절을 비껴간 것으로 보인다.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건축가로서 탄탄대로를 걸었으며 1983년 세계 최고의 건축가 상인 프리츠커 Pritzker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89년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앞마당에 세운 유리 피라미드로 인해(에펠이 에펠탑을 세웠을 때처럼) 독설과 나쁜 여론에 휘말리기도 했지만 오히려 덕분에 그의 이름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루브르박물관 유리 피라미드의 일부분


지금은 모나리자나 에펠탑처럼 루브르의 유리 피라미드는 파리에 가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 철제와 합성 유리를 이용한 유리 피라미드는 고색창연한 옛 건물들 사이에서 생뚱맞아 보일 수도 있지만, 단연 시선을 압도한다. 유리 피라미드의 마름모형 트러스는 그가 즐겨 사용하는 그의 건축원형이기도 하다. 셀 수 없는 많은 관람자들을 피라미드가 삼키듯 빨아들이면 지하로 들어온 사람들은 승리의 니케 상을 보기 위해, 밀로의 비너스상과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사람들의 등을 보며 따라 들어간다.


박물관 입구지만 시내 지하철과도 연결된 피라미드 지하 시설은 공항의 게이트처럼 가고 싶은 목적지로 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시설이기도 하다. 특별한 모뉴멘트 역할을 톡톡히 하는 유리 피라미드 건축가의 존재를 오래 전 그때는 몰랐었다.   

  

쑤저우 박물관의 설계자가 루브르 피라미드의 설계자라는 사실을 안 순간 그의 작품들을 찾아보았다. 아, 하는 한숨과 함께 그가 추구하는 세계가 한눈에 그려진다. 그는 중국인이며 중국의 산천과 그 땅의 생명들을 사랑했으며, 사자림獅子林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가 쑤저우 전통 원림에서 추출한 다양한 패턴은 그의 건축 언어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1982년 자신의 모국에서 처음으로 작업한 샹산 호텔香山酒店과 1990년 세운 홍콩 중국은행 Bank of China Tower은 가까이 있어 빠른 시일 내 언젠가는 가 볼 수 있는 곳이다. 쑤저우 박물관을 몰랐다면 이오밍 페이는 프리츠커상 수상자 정도로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었다. 이렇듯 여행은 지식의 징검다리이며 사고의 확장이다.   

  

루브르박물관의 유리피라미드가 생각나는 창살, 충왕부 건물
이오밍 페이, 그의 건축언어의 원형들이다. 왼쪽아래는 박물관 기념품 샵, 오른쪽아래는 충왕부에서


중국에서 박물관은 표를 사서 들어가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 무료로 입장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시안西安 박물관은 무료지만, (때로는 입장할 수 있는 관이 제한적일 수도 있다) 여권을 보여주고 표를 사서 빨리 들어가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표를 사는 줄도 너무 길어서 끈기를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시간은 오전 11시, 길게 늘어선 줄이 야속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입장이 가능했다. 입소문을 들었던 건축물이어서 소장된 유물들은 다음 기회에 보기로 하고 오늘은 온전히 건축물만 섭렵하기로 했다.  


박물관 입구부터 직각삼각형, 직사각형, 마름모꼴 등의 흰색 벽과 진한 회색으로 이루어진 담장과 기하형의 유리를 이용한 트러스 구조가 현대건축의 색깔을 드러낸다. 흰색의 벽은 중국 남부지역의 주택에서 나타나는 담장과 벽에 칠하는 흰색이며 마감재로 쓰인 철제나 돌의 진한 회색은 전통주택의 기와를 연상시킨다. 들어가자 마주치는 건너편 수변공간이 있는 뜰의 풍경은 로비로 온전히 들어와 있다. 다시 한번 졸정원의 원향당에 서있는 것 같다.    


박물관의 입구로 들어오면 맞은편 로비를 통해 연못의 풍경이 들어온다. 긴 병풍그림을 마주하듯, 졸정원의 원향당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전시실은 자연채광과 인공조명을 적절히 사용했으며 복도나 계단 등은 자연채광을 최대한 많이 끌어들여 설계하였다. 전시실과 전시실 사이에는 원림에서처럼 차경의 한 방법인 ‘근차近借’를 이용한 공간을 두었다. 그곳에서 관람객들은 휴식도 취하면서 또 다른 전시실을 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또한 건물 외부에서 흐르던 물이 내부까지 흐르도록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실내에서도 자연을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한 것도 전통 원림 조성 방법 중의 하나이다.   

  

전시실을 돌다 보면 박물관의 중심 수변공간으로 나오게 된다. 원림 조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물’이다. 중국 원림 조성에서 물은 풍요와 생동감을 뜻하며 거울과 같이 정적인 요소를 기본으로 꾸민다. 간접차경을 위해서이다. 원림의 중심이 연못인 것처럼 이곳 역시 박물관의 중심이다. 수변공간에는 두 겹 처마를 가진 정자(원림의 정亭보다는 매우 커 보여 루樓 일수 있다고 생각했지만)를 현대식으로 형상화시켰다. 연못의 돌다리는 원림에서 본 꺾어진 돌다리의 차용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중국인들이 송나라와 명나라 혹은 청나라 시대의 귀족들처럼 수변에서 현대의 원림을 즐긴다.  

   

쑤저우 박물관의 대표적인 차경인 '근차'
수변에서 바라본 박물관 정경, 연못에 비친 반영은 간접차경이다.


쑤저우 박물관에 표현된 이오밍 페이의 기본 패턴은 전통 원림의 창살이나 대나무 등의 식물에서 가져왔다. 수변공간에서는 물을 가장 많이 이용한 졸정원의 느낌을 많이 받았으며, 차경에서도 근차近借를 이용한 창문은 사자림과 유원留園에서 이미지를 많이 가져왔다.

    

흰색 벽에 만든 가산假山의 형상은 언뜻 보면 배경색으로 인해 히말라야 산맥이 연상이 된다. 전통 원림에서는 실제의 자연을 모방하여 원림을 조성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가산假山이다. 가산 조성은 자연의 비례를 그대로 살려 표현하여야 한다. 가산을 전통적인 흰색 벽과 물을 이용해 극대화시킨 부분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묵었던 호텔과 가까워 들고 나면서 서너 번 망사원網師園이 있는 대나무가 있는 흰색 담장이 있는 골목을 끼고 걸었다. 망사원 내부로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다시 흰색 벽이 이어진다. 다른 원림보다 규모가 매우 작은 망사원의 흰색 벽은 원림을 넓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내부 벽에는 그림처럼 살았거나 죽었거나 아름다운 식물들의 잔해가 얽혀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오밍 페이도 대나무가 울창한 망사원의 담장을 걸어봤을까.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 가산假山의 이미지


정신없이 화살표를 따라다녔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순간 현대식 전시관을 빠져나가는 회랑과 마주한다. 밝은 곳에서 어둠으로 들어가는, 현대에서 과거로 들어가는 입구처럼 시간이 켜켜이 쌓인 회랑을 지나면 묘한 긴장감에 휩싸인다.

 

   

이수성李秀成과 태평천국   

 

꽤 규모가 큰 사합원 형식의 건물이 나타나는데 현대식 쑤저우 박물관이 지어지기 전에 박물관이었다고 한다. 건물 곳곳에 ‘태평천국’이라는 낯선 글자들이 붙어있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은 거의 무정부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불안한 사회의 기운을 틈타 일어난 태평천국(1851~1864)은 14년 동안 장강 이남 지역을 중심으로 중국 민중을 사로잡았던 기독교계 정권(?)이다. 승승장구하던 태평천국 천왕天王 홍수전은 1953년에 천경(난징)을 수도로 삼았다.     


쑤저우는 당시 태평천국의 중요한 관저였던 충왕부忠王府가 있던 곳이다. 태평천국의 수장(천왕)은 홍수전이었지만 실질적인 전투에서의 전략은 젊은 이수성李秀成(1823~1864)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충왕부 안에 전시된 해상도가 낮은 당시의 사진(또는 그림)들 안에 이수성이라고 생각되는 인물의 모습은 게릴라전에 능한 전략가로 보기에는 수긍이 안 갈 정도로 잘 생겼다. 14년 동안 태평천국 군이 백전백승에 가까운 승리를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명장이었던 충왕忠王 이수성李秀成이 있었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만든 상군의 지도자 증국번曾國藩(1811~1872)은 1864년 이수성을 사로잡은 뒤 쉽게 처단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10년 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이수성과 전투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증국번의 요청에 의해 이수성은 감옥에서 태평천국에 대한 모든 것을 적었다고 한다.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증국번에게 "같이 힘을 합쳐 평등한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고 제안했던 젊은 피 이수성, 그의 죽음으로 태평천국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혁명의 영향력은 가속화되어 마침내 1911년 쑨원을 중심으로 한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청나라가 망하고 오랜 전제정치에 마침표를 찍었다. 당시 國民政府와 人民政府 모두 태평천국을 혁명으로 보았으며 특히 현 중국 정부의 인정은 태평천국 충왕 부가 쑤저우에 남아있는 이유이다.

 

이수성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교황 알렉산드르 6세(1431~1503)의 아들이었으며 15세기 말 16세기 초, 이탈리아 반도를 피로 물들인 체사레 보르자 Cesare Borgia(1475~1507)가 생각났다. 출신성분이야 극과 극이지만, 빼어난 용모를 지녔으며 전략가 또는 계략가이기도 했던, 판단이 빠르며 단호한 지도자로서의 적지 않은 부분이 서로 닮았다. 전쟁에서 짧은 생을 마감한 것까지.

   

충왕부에 있던 이수성 흉상, 살짝 시니컬해 보이기까지 한다.
충왕부, 당시 사용했던 '포'와 여전히 아름다운 창문
충왕부 건물 출구쪽에 태평천국이라는 글자가 붙어있다.


기원전에 역사를 두고 있으나 남북조 시대부터 원림을 즐기는 전통이 생겼던 중국의 역사를 보면 원림이 서민들의 품으로 돌아온 것은 최근의 일이다. 대부분의 원림은 통치자와 서민 사이에서 지배계층을 형성하고 있는 소수의 관념이 만들어낸 그들만의 세상이었다. 정계의 실세에게 밀려 낙향하여 졸정원을 만든 왕헌신과 설계를 맡은 문징명 그들은 일반인들이 아닌 소위 사대부라 부르는 소수의 관념을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지배계층으로 지식인이었으며 권력의 핵심이었고 또한 지주였다.    

 

쑤저우 박물관은 애초부터 다수의 인민을 위한 원림으로 만들어진, 쑤저우 전통 원림에 대한 사랑과 오마주로 만들어진 이오밍 페이貝聿銘가 해석한 현대식 전통 원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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