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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Jun 04. 2019

휘몰아치다가 굳어버린 돌덩어리

#5 어쩌다가 '강남수향', 쑤저우 사자림狮子林

  

괴이한 돌덩어리, 태호석이라고 했다.     


엄청나게 크거나 휘몰아치다가 굳어버린 듯 주름이 많거나, 침식으로 뚫린 것 같은 구멍들이 나 있는 회색빛 석회암을 닮은 덩어리들이 쑤저우 난위엔 호텔南园宾馆 뜰에는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여기저기 서 있었다. 거친 돌덩어리지만 가벼워 보이는 입석들 곁을 지나다니면서 이리 보고 저리보고, 자꾸 눈을 주니 괴이하기까지 한 낯설었던 돌들은 저마다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한국에서 수석은 소수가 집안에서 즐기는 감상의 대상이며, 수석의 조건이 되는 형태와 질감, 색깔이 아무리 좋아도 두 사람 이상이 옮겨야만 하는 큰 돌은 수석에서 탈락이다.


 하지만 중국 원림에 서 있는 돌은 한국에서 즐기는 수석 차원이 아닌 원림에서 단연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며 그중에서 태호석은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태호석은 쑤저우 인근 太湖타이후 지역에서 나오는 돌로(인근의 다른 지역에서도 생산된다) 태호석이라 불렀다. 석회암이 오랜 시간 침식과 풍화를 거쳐 형성된 것으로, 가치가 있는 훌륭한 태호석은 구멍이 있어야 하고, 확실한 선이 나오도록 여위어야 하며 기품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바다처럼 넓은 타이후에서 채취한 오랜 세월 바닷속에서 침식당했거나(太湖(타이 후)는 옛날에는 육지 사이에 낀 좁은 바다였다), 호숫가에서 풍화되어 야위고 구멍이 난 돌덩어리를 가져다가 원림을 꾸미기 시작했다. 남북조 시기라고 하지만 언제부터였는지 콕 집어서 말하기는 힘들 것 같다. 강남지역에서 원림을 꾸미고 살 만큼 정치, 경제, 문화가 발전했던 시기였을 것이다. 태호석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애호가들은 구멍과 주름이 많고 굴곡지고 비틀린, 더욱 기묘한 형태의 태호석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태호석으로 꾸민 원림, 유원에서
선인장 같기도 한 양쪽에 있는 주름진 태호석, 구멍이 있는 태호석은 많이 봤으나 주름진 태호석은 드물다.


휘종과 건륭제拙政園    


송 대의 뛰어난 화가였던 휘종 황제는 ‘화석강花石綱’이란 운송 조직을 두었다. 서민들의 배 열 척을 하나의 강綱으로 묶어, 말 그대로 귀한 꽃(식물)과 기괴한 태호석을 운하를 통해 강남에서 수도인 카이펑까지 가져왔으며 거기에는 백성을 수탈하는 데 앞장선 재상 채경蔡京이 있었다. 화석강뿐이었을까, 어리석은 휘종은 채경을 통해 백성을 자신의 예술적 포만감을 위해 착취했으며 급기야 장강 이북의 강토는 금나라의 발굽 아래 내주어야 했다. 자신과 아들은 물론 많은 백성들까지 금나라에 포로로 끌려가기에 이르렀다.


송나라 휘종 황제의 예술품 탐닉의 그림자는 나라를 빼앗기는 종말을 가져왔다. 반면에 청대의 강희제와 옹정제 특히 6대 건륭제(1711~1799년)의 예술품 애호는 후세에게 막대한 문화유산으로 돌아왔다. 그는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했을 뿐 아니라 황제 자신이 문인화에 조예가 깊었으며 수집 및 책을 간행하는 것에도 열성이었다. 그 덕으로 현재의 후손들은 풍부한 선조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장제스 정부가 가지고 간 타이베이의 고궁박물관에 수장한 대부분의 작품은 건륭제의 소장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그는 특별히 쑤저우의 원림을 좋아하여 강남에 올 때마다 원림에 들렸으며 1765년에는 사자림獅子林에 ‘진취眞趣’라는 편액을 남기기도 했다.

     



중국 전통 원림에서는 되도록 태호석을 쌓아 신선들이 사는 산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가산假山이라고 하며 태호석으로 쌓은 가산假山의 정수를 이곳 사자림獅子林(스즈린)에서 만날 수가 있다.  

   

쑤저우 박물관에서 약 150미터, 원림로에 가득한 사람의 행렬을 따라 사자림에 들어간 시간은 오후 1시경이었다. 가까이 있으니 들어간 것이지, 인파를 보고 원림 감상은 이미 의욕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사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월량문月亮門 안으로 살포시 보이는 풍경은 빨리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동할 만큼 아름답다.

     

월량문(둥근 문) 너머 태호석이 있는 뜰과 함께, 여전히 앉아있는 사람들을 찍었다.


그러나 연못의 남동쪽에 넓게 조성된 가산은 처음에 봤을 때는 충격이었다. 멋있다는 느낌보다는, 답답하게 거친 돌에 둘러싸인 연못 같았다. 선승들과 은일을 꿈꾸는 사대부 화가들이 설계에 참여했다던 원림은, 엄청난 돈을 들여 탐욕스럽게 가산을 조성한 것처럼 보여 살짝 반감마저 들기도 했다. 원의 반을 차지하는 가산 때문에 동쪽과 북쪽에는 제법 건축물이 많은데도 그쪽으로는 시선이 가지 않는다.   

   

연못가에 조성된 가산에는 튀어나온 것이 사람인지 태호석인지 분간을 못할 정도다. 울긋불긋한 것들이 움직이니 사람으로 인식할 뿐이다. 가산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어 한 번 들어가면 많은 이들이 쉽게 돌아 나오지 못한다고 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로 인해 연못을 한 바퀴 도는 것도 쉽지가 않다. 튀어나온 태호석의 갈기에 머리라도 부딪칠까 조심조심 가산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가다가 오는 사람에 막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태호석에 뚫린 수많은 구멍은 지나가는 사람들로 막혀 차경을 감상하는데 방해가 되기도 한다.


연못과 가산은 원대의 것이라고는 하지만, 전하는 그림에 보이는 호젓한 사자림과는 거리가 있다. 연못의 다리와 연결된 호심정 주변으로 보이는 건축물도 너무 많아 공간감이 부족하다. 원대에 자리를 잡은 원림은 시간의 흐름 위에 수리와 보수, 확장을 반복하였음이 분명 하나 과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진리를 간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자림에서. 태호석 사이로 보이는 호심정

사자림은 원대(1271~1368)를 대표하는 원림이다. 1342년 원대 말기에 승려 유칙惟則이 조성하였으며 선승들의 거처가 되었다. 그의 스승이 살았던 저장성 천목산 사자암의 이름을 본떴다고 하는데, 가산을 조성한 태호석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사자와 같은 맹수를 닮아있기도 하다. 아예 小方亭 북쪽 원에는 ‘아홉 마리의 사자’라는 구사봉九獅峰이 원 중앙에 놓여있다. 태호석으로 붙여 만들어놓은 사자 모습이다.  

 

당시 사자림의 설계에는 선승과 사대부 및 예술가들이 참여했던 것 같다. 그중 설계에 관여했던 예찬은(1301~1374)은 황실 후손인 조맹부(1254~1322)의 뒤를 이어 원대의 회화 발전에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황공망, 오진, 왕몽과 함께 원 사대가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쑤저우에서 가까운 우시 출신으로 부유했으며 진정한 풍류를 즐기는 화가였다. 당시 쑤저우는 정치에 소외된 한족 출신 사대부와 지식인, 많은 화가들이 활약하던 중심 지역이었다. 예찬의 주변에는 황실 후손들과 명망 높은 사대부들이 많았으며 사자림은 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을 것이다. 사자림을 그린 그림이 많이 전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왼쪽은 ‘아홉 마리의 사자’라는 구사봉九獅峰
월량문 안에 팔각형의 문, 이것 하나만으로도 만족할만큼 아름다웠다. 원대에 사찰원림이었던지라 불교의 향기가 났다.


설계에 참여한 예찬과 주덕윤이 그린 원대의 그림을 찾다가 발견한 왕몽의 그림을 보니 사자림은 아니지만 느낌은 매우 비슷하다. 당시의 취향이 이러하니 잘생긴 자연을 닮은 태호석의 가치는 가늠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왕몽은 송 황실의 후손인 조맹부의 외손자로 예찬에게 영향을 받은 원 사대가의 한 사람이다.   

  

명대(1368~1644)에 사원으로 사용했던 원림은 청대(1636~1912)에 장 씨 부자에 의해 사가 원림이 되었다. 강희제와 건륭제가 자주 찾았던 시절이었다. 1736년 이후에는 황흥조黄兴祖와 그의 아들에 의해 수리 복구되었다. 청 말기 다시 황폐해진 사자림을 강남의 부유한 안료 거상이며 은행가였던 패씨 가문이 1917(또는 1918)년경 구입하여 확장 복원하였으며 이때 원림 안에 새로운 건축물들이 세워진다.


1954년 패씨는 사자림을 국가에 헌납하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인 이오밍 페이 Ieoh Ming Pei貝聿銘(1917~2019. 5. 16)는 사자림에 기거했으며(아직도 사자림에는 패씨 가문의 사당이 있다) 사자림은 그에게 꿈을 펼칠 수 있는 원천이고 마당이었다. 옆에 위치한 졸정원과 옛 수저우 박물관은 그의 놀이터였다. 이곳은 세계적인 건축가의 자궁이었던 셈이다.     

왼쪽은 사자림을 연상케 하는 왕몽의 작품, 오른쪽은 사자림 설계에 관여한 예찬의 작품이다.
몬드리안이 생각나는 색깔이 있는 창문, 왼쪽 대나무 뒤로 보이는 누창(뚫린 창)이 정말 아름다웠다.

 

쑤저우를 다녀와서 중국화집을 자주 들여다보게 된다.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생길 수 없을 것 같았던 화가들의 그림이 내 눈앞에서 생동감 있게 살아나는 느낌은 새롭기도 하다. 우리 선조들의 그림을 더없이 사랑하지만 중국화에 비하면 소박하다.     


중국 여행을 더할수록 하나씩 무너져가는 것은 중국에 대한 관념과 편견이었다. 특히 중국의 회화를 애써 알려고 하지도 않고 ‘과장된 표현’이라고 단순하게 치부했던 젊은 시절이 무지하고 민망했다. 알고 보니 중국의 화가들은 그들의 산천을 있는 그대로 묘사해왔으며 그들의 그림을 모방한 조선초기의 화가들에 의해 우리에게 낯선 중국식 산천이 그려졌던 것이다. 그들의 그림 속에는 그 시절의 문화와 철학, 작가의 신념까지 담겨있다. 이제 와서 그걸 깨닫다니, 어리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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