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글쓰기가 별거냐

by 낭랑한 마들렌

주말에 혼자 외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평일에 각자의 일상으로 분주했던 가족들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온 가족이 함께 식사하고 담소를 나누는 것은 평일에는 전혀 불가능하며 주말과 휴일에 두 끼나 세 끼 정도 겨우 가능해진다. 그런 상황에 혼자 외출한다는 것은 제법 민망하고 미안하기까지 한 일이다. 당연히 가급적 그런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약속이 되었고, 불가피한 일이 생긴다면 미리 양해를 구하거나 최소한 통보라도 하곤 했다.


그날 나는 혼자 외출할 일정을 만들었는데,

전에 남편에게 함께 가자고 슬쩍 얘기했으나 예상대로 반응이 좋지는 않았었고 그래서 혼자 가기로 했던 일이다. 사실은 예의상 물어본 것이었다. 둘이 함께 외출하고픈 일은 더 이상 없다.


여하튼 그날은 특히나 혼자 외출이 곤란한 두 가지 사안이 있었는데,

하나는 남편이 콩국수를 해주겠다고 설친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입원한 엄마를 온 가족이 함께 병문안하기로 한 일이다.


남편은 며칠 전에 메주콩을 주문했고 전날 밤에는 그것을 씻어서 담가둔 것이다.

드디어 점심에 콩을 삶고 믹서에 갈며 준비를 했다. 남편이 요리에 능숙한 것도 아니어서, 내가 국수 삶는 일이라도 도와야 아름다운 그림이 되는 상황인 것. 그리고 나 없이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장모 병문안을 가는 일도 썩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차를 내가 사용해야만 하니 대중교통이나 택시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것도 불편과 비용을 유발하는 상황이었다.


외출 용건은 벌써 몇 주 전에 신청해 둔 낭독회.

전부터 한번 가보고 싶었던 ‘젊은 괴테의 집’에서 열리는 <괴테네 낭독회>에 신청한 것이다. 참가비도 입금했고 나는 이날을 손꼽아 기다렸던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이러하니 가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하고 취소하려 했지만, 담당자는 문자 메시지에 답장을 주지 않았다. 가지 않으면 참가비 3만 원만 버리게 되는 상황인데 나는 그게 싫었다. 사실 돈보다도, 기대하며 기다렸던 일을 포기하는 것이 싫었다.


남편이 콩을 삶는다, 믹서에 간다, 분주한 때에

나는 혼자서 먼저 대강 점심을 먹고 있었다. 마음은 최종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여전히 갈팡질팡했다. 안 가는 게 낫겠는데... 참가비를 다음 낭독회로 이월해 주기라도 하면 좋겠구먼... 이런 생각을 하며 담당자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내 볼까, 전화를 해볼까 궁리하였다.



forest-8684668_1280.jpg 이미지 출처: PIXABAY



그러다 문득 옛일이 떠올랐다.

‘가만! 나는 왜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안 돼? 남편은 그랬잖아! 고만고만한 어린애들 키우며 내가 고군분투할 때, 굳이 거길 가야 하나, 하는 일에도 갔잖아. 내가 가지 말라고 해도 갔잖아. 한 번도 아니었잖아. 그런데 나는 왜 안 되는 건데?’


나는 다시, 아니 이제야 진정 뻔뻔스러워질 수 있었다.

내가 혼자 외출하려는 일이 조금은 적절치 못한 행동일 수 있으나, 뭐, 그 정도일 뿐 아주 미친 짓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남편은 더 나쁜 놈이었다. 20년 가까이 지났어도 여전히 내 마음에 분노를 일으키고 있는 행위들을 했지 않았는가.


나는 죄책감 없이 외출했다.

오히려 ‘너도 좀 당해봐라.’하는 마음이 되었다. 쌤통이었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나는 더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래도 좋았다. 네가 못 살겠으면 이혼 요구하던지! 하는 마음이 되었다.


운전해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OO동의 아웃렛 거리에서 정차하는 자동차 한 대를 보았다. 신호 대기 중에 보니, 조수석에서 여성이 내리고 운전석에서 남성이 내려 서로 자리를 바꾸어 다시 차에 올랐다. 운전하던 남성은 허리를 부여잡고 경직된 몸을 힘겹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허리가 아파 운전하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서로 자리를 바꾸기 위해 차를 멈추고 각자 내려서 반대쪽으로 다시 타는 것인데, 남성은 운전석에서 내려 차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었다. 여성은 조수석 문을 열어둔 채 반대쪽으로 왔는데 말이다.


“저런! 남자 놈들은 늘 저런 식이라니까! 지가 허리 아파서 여자가 운전하려고 자리 바꾸는데 문을 닫아버려? 세상 이기적인 놈들. 남자새끼들은 배려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지!”


그렇다. 그런 것이었다.

남자들은 그런 존재인 것이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라고?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라고? 그게 문제라는 거다. 배려는커녕 기본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생각 자체가 없으니 자신도 모르게 문을 닫는 거다. 걔들은 그런 존재다.


(남성 독자들께 미안합니다. 얼마나 맺힌 것이 많으면 저러겠나, 너그럽게 봐주십쇼.)



오전에 아빠와 함께 피부과 진료를 받고 온 딸이 가스활명수와 쌍화탕을 가리키며, 엄마 때문에 아빠가 이거 사셨잖아요, 하고 말했다. 나는 속으로 비웃으며 진심을 다해 말했다.


“설마! 아빠 때문에 사셨겠지.”


성의를 곡해한다고 나를 비난할 필요는 없다.

나는 늘 그런 대우를 받으며 살아왔으니. 결혼한 이래로 그에게 나는 언제나 우선순위에서 두 번째, 세 번째 이후였다.


하지만 괜찮다.

이젠 나도 남편을 우선순위에서 두 번째, 세 번째 이후로 두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앞으로 살아갈 날이 지금까지 함께 살아온 날의 배 이상이 될 것 같다. 잘 버텨 보시오, 남편. 안 되겠으면 백기 드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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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행사는 서울대 독문과 교수로 은퇴하신 전영애 교수님의 괴테 자서전 낭독회였다. 시골 할머니 같은 모습의, 그러나 독일에서도 인정받은 괴테 전문가인 연로한 교수님이 낭독하고 해설하는 [시와 진실]은 너무나도 흥미로웠다.


그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집필 배경을 설명해 주셨다. 젊은 괴테는 불가능한 사랑을 했고, 자살이 결코 용인될 수 없는 사회에서 수차례 자살을 생각하며 침대에 칼을 두고 자기도 할 정도로 괴로워했다고.


하지만 그는 자살사고를 실행에 옮기는 대신 한밤중에도 일어나 책상에 앉아 글을 썼다고 한다. 이게 뭘까. 그 답을 얻기 위해 이 작품을 썼으며 베르테르는 죽였지만 자신은 죽이지 않았다고. 고통스러웠던 시기, 4주 만에 완성한 작품이라고. 그렇게 소설을 쓰며 그 시기를 극복했다고 한다.


그 마음을 알겠다고 하면 교만이겠지만, 나도 흉내는 좀 내보련다. 소설까지는 바랄 수도 없고, 나의 변화무쌍한 내면의 표정을 쏟아내 보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치유의 시간이 된다. 정신과 의사들도 처방한다는 치유의 글쓰기가 별거냐! 쓰고 보니 속 시원타, 싶으면 그거지.



이 글은 시작부터 공개할 수 없는 글이었다. 공개하지 않을 요량으로 쓴 글이었고 쓰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그래서 공개한다. 이게 나니까. 글은 볼품없고 남성혐오자인가 의심스럽겠지만, 괴테의 치유 글쓰기도 지질하기가 이를 데 없는 인물을 탄생시켰지 않나. 글을 쓰며 극복하는 일, 글로써 나를 치유하는 일. 그걸 나도 시작해 본다.


그날 저녁 돌아오는 길에, 나는 괴테마을 근처의 디저트카페에서 비싸고 맛 좋은 빵을 사 오는 의리를 보여 주었다. 가족들은 맛있게 먹었고 나를 용서했(을 거)다. 용서 못한 대도 괜찮다. 내가 용서했으니까.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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