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돌고래의 드림 프로젝트
광주에서 친해진 대표는 회사에 한번 놀러 오라고 했다. ‘매직 돌핀’이라는 회사였다. 그렇다. 나에게 변호사를 소개해준 바로 그 대표님이었다. 사무실에 들어가는 순간, 알아보는 분이 있었다. 어? 왜 여기 계세요? 내가 정식으로 입사한 첫 회사. 피처 폰 게임을 만들던 그곳의 이사님이셨다. 너 아직 게임 업계에 있었냐? 이사님도요.
식사 자리에서 이사님과 대표님은 회사 상황을 이야기했다. 자금이 몇 개월 치 남았다며 회사를 접기 전에 직원들에게 선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 선물은 게임이었다. 경력에 남을만한, 혹은 이 회사에 온 것을 긍정적으로 기억할만한 게임을 만드는 것이 마지막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훌륭한 분들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빚만 남을 텐데. 마지막을 직원들을 위해 쓰겠다고? 그 디렉팅을 해줄 수 있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며칠 뒤,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으로 다시 찾은 회사에는 나 외에 다른 PD 예정자가 와 있었다. 봄 AD라고 하자. 우리는 여러 모로 비슷한 점이 많았다. 둘 다 사업을 했고 실패했다. 빚이 많았고 개인 회생을 진행하고 있었다. 디렉팅 경험도 비슷했지만 봄 AD는 아트 기반이었고 나는 기획 기반이라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둘 다 중증의 오타쿠였다. 시간을 받아 단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서로를 인정했다. 이후 대표님과 이사님이 들어오셔서 둘이 같이 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회사 사정이 좋지 않았음에도 두 명의 디렉터를 고용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가 있었다. 둘 다 개인 회생 중이라는 점이었다. 우리는 지정된 급여 이상을 받을 수 없다. 받게 되면 신고를 해야 하고 납부 금액이 더 증가한다. 하지만 이 회사는 기간이 정해져 있다. 괜히 높이면 이후 우리만 더 힘들어지는 것이다. 다시 낮출 수는 없으니까. 급여는 둘 다 최저로 받기로 했다. 마지막 회사 시절의 급여와 비교하면 30% 수준이었다. (일곱빛깔 본부장) 하지만 이 금액으로는 가족들의 생활비와 비싼 월세를 감당할 수 없다. 결국 주말 투잡을 허용받는 조건으로 PD를 담당하기로 했다. 나는 프로젝트 디렉팅을, 봄 AD는 아트 디렉팅을 하는 체제로 우리는 함께하기 시작했다.
내부에 캐릭터 리소스가 하나 있었다. 이를 살펴보는데 놀라웠다.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3D로 구현한 느낌이었는데 셰이더가 무겁지도 않았다. 이 정도 기술이 있다면 자본이 들어올 때 훨씬 좋은 것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매직 돌핀’은 침몰하는 중이다. 투자 같은 불 확실한 이야기는 의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대표님과 이사님이 각각 사업과 마케팅으로 나보다 훨씬 뛰어난 분이셨다. 진작 알아보셨겠지. 나는 직원들 개개인을 분석했다. 각자의 취향과 만들고 싶은 게임을 조사하기 위해 말을 걸고 함께 취미 생활을 하기도 했다. 모두가 오타쿠였기 때문에 보다 쉽게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 같다. 기존 캐릭터 리소스를 기반으로 모두의 니즈에 맞는 최후의 게임을 개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봄 AD의 생각은 달랐다. 6개월 후 동경 게임 쇼가 있습니다. 그때까지 이 캐릭터 리소스로 페이크 게임 영상을 만드는 게 어떨까요? 투자를 끌어올 수 있을지 모릅니다. 매우 도전적인 제안이었다. 대표님과 이사님은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반응이었을까? 투자의 성공 여부를 따질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직원들이 페이크 영상 만으로 만족할 것인지를 물었다. 진짜 멋진 분들이다. 봄 AD가 웃으며 말했다. 그건 마이즈 님이 설득해 주실 겁니다. 에? 갑자기? 그러기 위해 직원들 하나하나 친해지고 있거든요. 아니, 그건 그래서가 아니었는데.
그리고 우리는 6개월을 달렸다. 일본의 유명 애니메이션 대학 출신이며 동시에 오타쿠인 봄 AD의 연출력은 실로 뛰어났다. 그가 생각한 연출에 맞추기 위해 추가 채용을 진행했다. 광주의 게임 개발자 양성 과정에서 내가 가르친 제자가 있었는데, 신입임에도 게임 이펙트의 천재라고 부를 수준이었다. (버티기) 문제는 자폐가 있다는 점이었다. 다른 직원들과 커뮤니케이션이 힘들긴 했지만, 비용 대비 실력이 뛰어났다. 자폐의 특성상 하나에 꽂히면 주변을 보지 않는다. 그는 회사에서도 이펙트, 퇴근하고도 이펙트, 주말에도 이펙트만 파댔다. 재능이 있는데 노력이 더해지니 대단했다. 장애인 학교에서 가르쳤던 학생들이 결국 취업을 거부하며 받은 상처를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내려가는 삶의 경사면)
동경 게임 쇼. 우리는 페이크 게임 영상을 만들어 참가했다. 나의 제안으로 중간에 조작도 넣었다. 말하자면 게임처럼 보이는 인터렉티브 영상을 만든 것이다. 따라서 100번을 플레이해도 똑같은 상황이 100번 발생할 뿐이다. 하지만 시연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어차피 관람객들은 한 번씩만 플레이할 테니까. 엄청난 사기극을 펼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월척이었다. 매직 돌핀 일본 대표님의 인맥 영향도 있었겠지만, 우리는 일본의 유명한 게임 개발사와 계약을 하게 되었다. 당시 모바일에서 세계 최고 매출 기록을 경신했던 게임의 개발사였다. 무엇보다 오타쿠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회사였다. 단순한 투자가 아닌 공동 개발. 그리고 총괄 디렉터는 나였다. 기획은 한국에서 하기로 했으니까. 달이 차오른다.
이사님이 생각하는 리더의 자질은 독재자였다. 너는 실무에 손대지 말고 관리만 해라. 수없이 말씀하셨다. 하지만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사업이 무너지며 혼자서 뭐든 해야 했고 그것이 기준이 되어 있었다. (생존형 개발자) 웬만하면 직접 처리하고 도저히 안될 때만 중요도가 떨어지는 일만 넘기고 싶었다. 타인을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직접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모두의 취향과 니즈를 맞출 수 있을까? 다들 자기 색이 뚜렷한 사람들이었다. 가급적 모두가 원하는 게임으로 방향을 끌고 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사소한 것들도 직접 손대야 했다. 하지만 결국 이사님의 강요로 인해 실무에서 손을 놓게 되었다. 관리에 집중하는 한편 모든 작업물을 감수하고 판단했다. 그러자 또 새로운 세상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사님이 말씀하시던 것이 바로 이거였구나. 역시 나는 아직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큰 가르침을 주신 이사님에게 감사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이미 게임 개발사의 이사였던 분이신 만큼 업계에서는 큰 어르신이었다. 이사님을 따르는 분들 중에는 첫 회사에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신 김 부장님도 있었다. (김 부장의 멘토링) 덕분에 또다시 재회했고, 김 부장님의 회사 이야기도 많이 나눌 수 있었다. 인연이 여기까지 이어져 내려오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나는 가장 빨리 출근했고 가장 늦게 퇴근했다. 여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는데, 당시 집이 화성시였기 때문이다. 해피 트리에서 회사까지는 2시간 반 정도가 소요되었다. (언 해피 트리) 왕복 5시간을 쓸 수는 없었기에 월요일 새벽에 옷을 싸들고 서울로 출근했다. 그리고 찜질방 또는 회의실에서 지내다가 금요일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갔다. 어차피 잠깐 잠만 자는 거니 늦은 퇴근도 이른 출근도 당연한 일이 되었다. 이 회사에서는 거의 매일이 야근이었고 철야도 자주 했다. 하지만 나는 그저 즐거웠다. 이 회사에 들어오기 직전까지 빚에 쫓기고 자살 충동을 버티며 지냈으니까. 다른 것에 신경 쓰지 않고 게임을 만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편안했다.
영화 회식을 종종 했고, 건프라 데이도 했다. 모두가 오타쿠였기에 고향에 온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애니메이션 이야기나 농담도 대부분 서로 알아들었고 자기 작품을 열심히 영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전까지 다닌 회사 중 최고의 회사는 '가정형 회사'였다. (만약에) 대기업인 N사가 아니라 급여가 밀린 회사가 최고였다는 말이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제 내가 다닌 최고의 회사는 ‘매직 돌핀’이 되었다. 나는 사람들의 동기 부여에 집중했다. 이렇게 야근이 많다면 회사의 보상 같은 물질적인 것으로는 불만을 막아낼 수 없다. 스스로 만들고 싶은 게임,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게임에 넣을 수 있도록 조율했다. 모든 직원이 신나게, 즐겁게 함께 하는 개발을 추구했다. 여기에서부터 이사님과 나의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직원들을 위한 게임이 아닌 너를 위한 게임을 만들어. 그게 디렉터인 네가 해야 할 일이야. 상황이 달라지면 기준도 달라지는 것이 맞다. 하지만 나는 조금 더 모두의 꿈을 지키고 싶었다.
갑자기 세무서에서 연락이 왔다. 900 만원의 세금이 미납되었다는 것이다. 네? 저 개인 회생 중인데요? 회생 들어가기 전 해의 세금이 이제 나온 겁니다. 하지만 제 소득은 이미 신고한 것으로 뻔히 보일 텐데요, 계좌도 만들 수 없고 재산은 전부 압류당해서 그렇게 큰돈을 마련할 수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그럼 급여 계좌가 압류될 것이고 개인 회생도 폐지될 겁니다. 끔찍한 선고였다. 어떻게든 해야 했다. 이사님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평일 저녁에도 알바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건 곤란해. 우리 회사는 겸업 금지야. 하지만 저에게 주말은 허용하셨잖아요. 내가 언제? 지금 하고 있으면 다 그만둬! 필요하면 회사 돈을 빌려 줄게. 다만, 확실히 하기 위해 차용증은 쓰자. 눈앞이 깜깜해졌다. 이번에도 문서화를 안 한 탓이구나. (아홉 번의 실수) 처음 입사 시에 주말 외주 허용 문서를 작성했어야 하는 건데. 이렇게 또 한 번 배웠다.
900 만원은 어떻게 마련했을까? 외주나 겸업을 못한다면 다른 방법이 없지 않나? 당시 잔고는 항상 30만 원 이하였다. 매달 급여일이 오면 회생 납부금으로 빠져나가니까. 돈을 모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결국 그동안 모은 게임을 팔았다. 나름 레어 한 타이틀들이 섞여 있어서인지 아슬아슬하게 금액을 맞출 수 있었다. 이 즈음 외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우리는 아파트를 잃고 구로 디지털 단지 인근으로 이사했다. (어느 제주 소년의 일생)
어느 날 대표님, 이사님, 봄 AD와 네 명이서 면담을 하자고 요청했다. 판결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퀴벌레 재판) 모든 상황을 설명했다. 만약의 경우, 제가 못 나올 수도 있습니다. 형이 확정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끌려간다고 합니다. 우리 프로젝트에 민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인수인계하고 그만두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봄 AD가 처음부터 저와 모든 것을 함께 했으니 잘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표님은 걱정 말라며 혹시 잘못되면 보석금을 내서라도 어떻게든 꺼내어 오겠다고 말했다. 어떤 상황인지는 변호사 친구에게 들어서 대강 알고 있다고 했다. 다혈질인 이사님은 분노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 놈들 리스트 적어! 이런 놈들이 업계 안에서 활보하도록 놔둘 수는 없지! 영향력이 강한 분이긴 했지만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이건 그들과 나의 문제였으니까. 봄 AD는 이 프로젝트는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다며 강하게 이야기했다. 곁에서 지켜본 나의 디렉팅의 장점과 자신이 할 수 없는 부분을 말하며 나의 자존감을 세워주었다. 세 분의 반응이 감동적이긴 했지만, 민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만약을 대비해서 예약 메일을 걸었다. 내가 선고일에 귀가하지 못한다면 자동으로 세 분에게 메일이 갈 것이다. 봄 AD 키보드 아래에는 편지와 구글드라이브 비밀 번호를 남겨두었다. 그리고 그날 밤 새벽까지 인수인계 문서를 작성했다.
선고에서 집행 유예가 나온 덕분에 회사로 복귀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매일 점심 저녁으로 두부 메뉴가 끊이질 않았다. 직원들 하나하나가 나에게 두부 요리를 사주고 싶어 했다. 너무 감사하긴 했지만 솔직히 지겹기도 했다. 세상에서 스스로를 지우려 했는데, 이들은 나를 더욱 선명하게 그려주었다. 역시 최고의 회사, 최고의 동료들이었다. 이들과 함께 우리 프로젝트를 끝까지 할 수 있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