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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맹 Dec 23. 2022

엄마밥 먹는 행복

스위스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날 저녁은 된장찌개였다. 제대로 씹지도 못하는 중이었지만, 강력한 항생제 덕분에 염증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찌개는 그래도 먹을 수 있겠지?”

“그럼 그럼!”

집안 가득 퍼지던 된장찌개 냄새. 스위스에서는 (아니 한국에서도) 도저히 내가 흉내 내보려 해도 되지 않던 엄마의 된장찌개였다. 그날 저녁 식사는 황홀 그 자체였다. 아픈 치아는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냥, 된장찌개가 맛있으니까 다 괜찮았다.



스위스에서 열 달 반 만에 한국에 왔으니 먹고 싶은 게 참 많았다. 나는 심지어 꼭 먹어야 할 것들의 목록까지 만들었다. 그 목록을 부모님께 보여드리니, 아빠는 굶다 왔냐며 뭐 이렇게 먹고 싶은 게 많냐고 했다. 엄마는 목록 중 몇 개를 기억해 두셨다.


부모님 댁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내가 먹고 싶은 음식 목록들을 하나씩 도장 깨기 하듯 먹었다.  우리는 삼겹살에 소주를 먹고 동네에서 가장 맛있는 치킨을 시켜 먹었다. 시장에 나갔다가 순댓국을 포장해 오기도 하고, 바다를 보러 갔다가 회를 떠 오기도 했다. 그리고 엄마는 참치 김밥도 말아줬고, 냉동실에 있던 절편을 잘라서 떡볶이도 해줬다. 내가 너무 애정하는 엄마표 김치 만두도 빚고, 찹쌀로 손수 인절미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모든 음식이 순조롭게 뚝딱 하고 나왔던  아니었다. 참치 김밥을  때에는 밥이 살아 있었다. 김밥에 들어가는 밥은 조금 끈덕져야 김에 착착 달라붙어 들뜸 없이  말아지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김밥이 제대로 말아지지 않고, 헤벌레 하고 틈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김밥은 두껍게 썰어야 했다. 두껍게 썰어도 옆구리가 터졌다. 그래도 맛만 좋았다.



“스위스에서 저번에 김밥 얼마에 먹었다고? 만 구천 원? 아이고, 있을 때 많이 먹어 둬.”

아빠가 말했다. 그날은 사실 우리가 추위에 덜덜 떨며 감을 깎은 날이었다. 삼일 연속 감을 깎은 날 중 마지막 날. 이 매거진을 읽고 계신 분들이라면 짐작이 가실 것이다. 콧물을 흘려가며 온몸이 추워 절절매던 때였다는 것을. 엄마는 그 힘든 와중에도 굳이 김밥을 싸주신 것이다. 나는 그것이 너무 고마웠다. 김밥을 와구와구 입에 욱여넣으며, 엄마의 정성을 골고루 삼켰다.


김치 만두를 만들 때에도 약간의 에러가 있었다. 엄마의 김치 만두는 정말이지 찌거나 국을 끓여 먹으며 몇 끼 연속으로 먹는다 해도 질리지 않을 맛이다. 김치 만두의 생명은, 모든 김치가 들어간 음식처럼 역시 김치 맛이 좌우하니까. 그리고 엄마 김치는 늘 끝내주니까.


그런데, 문제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에서 나왔다. 바로 다진 돼지고기. 고기 질이 안 좋았던 건지 고기 누린내가 심하게 났다. 다진 고기는 그런 경우가 허다하니, 만두 속을 만들기 전에 엄마는 고기에 생강즙을 충분히 넣고 볶았다. 누린내가 날 것을 대비한 것이었는데, 누린내는 생강으로도 지워지지 않았다.


뽀얗게 잘 익은 찐만두를 잔뜩 기대에 차서 한 입 베어 물고 씹는데, 그만 돼지 누린내에 인상을 찌푸리게 되었다. 나는 돼지 누린내나 물 비린내에 굉장히 예민한 편이다. 너무 그리웠던 김치 만두라, 앉은자리에서 쉬지 않고 야금야금 베어 물어야 제맛인데, 그러지 못했다.


“아이고 어쩌냐, 고기를 넣지 말걸 그랬나 봐. 냄새가 어찌 이렇게 심한 거야.”

나보다 더 속상해하는 건 엄마였다. 같이 만두 피에 속을 넣고 채우면서 만두 먹을 생각에 들뜬 것은 엄마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만두 한 번 하려면 은근히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엄마는 전날부터 속을 만들어 두었다. 전날의 수고로움마저 한 번에 누린내에 발목을 잡힌 것 같았다.



만두를 빚으면서 동시에 찜기에 올렸기 때문에, 아직 빚지 않은 만두 속에 엄마는 또 다른 비책을 부렸다. 그런다고 고기 누린내가 확 잡히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속수무책으로 누린내에 지배당하는 것보다야 나았다. 혹시나 싶어, 이미 완성되어 찐만두를 구워 보기도 했다. 구울 때 와인을 넣었다. 와인 향이 만두에 베어 들어가면서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다행히도 두 방법 다 효과가 있었다. 물론 (내가 아주 예민하기 때문에) 간간히 누린내가 나의 비위를 공격하긴 했지만, 훨씬 나았다. 누린내에 민감한 아빠도 느끼지 못할 정도였으니 엄마의 비책은 성공이었다.



엄마는 목록에 없는 것도 만들어주었다. 꼬막무생채비빔밥이 그것이었다. 시장에서 갓 사온 통통하게 살이 무르익은 꼬막, 그리고 온갖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한 잘 익은 무의 만남. 엄마표 매콤 새콤한 양념이 골고루 베어 들어갔다. 서로 다른 질감이 기기 막히게 어울렸다. 이가 맞물릴 때마다 행복함이 씹혔다. 원래도 입맛이 좋았지만, 더 입맛을 돋우는 맛이었다.



꼬막무생채비빔밥을 꼭꼭 씹어 먹으며 무 채를 써는 엄마의 손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질서 정연하게 썰려서 빠른 속도로 가지런히 놓이는 무 채들. 그리고 이어서 이미지를 채우는 엄마의 손끝에서 나온 무수한 음식들. 그동안 내가 먹고 큰 수많은 엄마 밥이 떠올랐다. 지칠 줄 모르고 부지런히 움직여 매번 짠하고 맛있는 걸 내어주는 엄마의 손, 이 세상에 그보다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손이 또 있을까.


엄마밥 먹는 것은 정말이지 행복이었다. 감사하다는 말로는 한참 부족한 마음으로, 나는 부모님 댁에 머무는 동안 엄마밥을 참 열심히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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