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나 올 해에도 찾아온 김장철. 지난 11월 초에 김장 날짜를 잡고, 날을 잡자마자 괜히 긴장이 되었다. 내가 한국에 있을 때, 그것도 이렇게 여유롭게 시간이 많을 때 함께 김장을 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얼마나 힘들까 걱정이 된 것은 사실이다.
우리 집 김장하는 규모는 제법 크다. 우리 집은 4 식구이지만 부모님은 친척들의 김장까지 한다. 이젠 그냥 우리 먹을 것만 하라고 했지만, 부모님 마음은 그게 아닌가 보다. 여전히 올해에도 어마어마한 김장을 했다.
김장의 날 사흘 전부터 서서히 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마늘을 깠다. 자그마치 마늘 100개. 와, 정녕 이 많은 마늘을 다 깔 수는 있는 건지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엄마 아빠와 뒷마당에서 슬슬 까다 보니 또, 역시 지나고 나면 금방이었다. 마늘은 깨끗하고 하얀 속을 드러냈고, 내게 남은 건 엉덩이와 손가락의 고통이었다.
다음으로는 생강을 깠다. 역시나 우리 집 밭에서 수확한 생강이었다. 생강을 캘 때 진하던 그 향기가 아직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제각각 모양의 생강을 까기 편하게 쪼개고 껍질을 벗겨내는데, 역시 생강 까기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오른손이 도대체 요즘 왜 이렇게 안 하던 짓을 자꾸 하는 거냐고 내게 항의했다.
김장의 날 이틀 전에는 무와 배추를 준비시켰다. 무에 대한 작업을 하면서 우리는 셋이서 역할 분담을 확실히 했다. 가장 먼저 아빠가 무를 몸통과 무청을 문리를 시켰다. 그럼 엄마는 무청을 엮었고, 나는 무 몸통을 크기 별로 세 분류로 나누었다. 보관해서 두고 먹을 무들은 신문지에 하나씩 싸 놓기도 했다.
그다음에 이어서 배추를 뽑아야 하는데, 사실 정말 너무 힘들어서 뽑다가 포기했다. 배추가 너무 정말 너무 컸다. 왜 이렇게 배추가 실하게 잘 컸는지, 참 무겁고 거대했다. 끼고 있던 목장갑은 배추에 축축하게 젖어들어갔고, 11월 초의 햇빛은 또 왜 이렇게 뜨거운지 온몸에 땀이 났다. 그 와중에 배추를 아빠가 뽑아주면 바로 그 자리에서 허리를 숙이고 겉면의 지저분한 이파리들은 떼어냈다. 허리가 아파한 손으로 들고 한 손으로 떼어내려 해도, 배추가 너무 무거워 차마 내 팔근육이 버텨주지 못했다. 배고프면 예민해지는 성격인데, 하필 또 배까지 너무 고팠다. 난 결국 우거지상이 되어서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사실 부모님이 나보고 배추 꼭 뽑아야 한다고 시킨 것도 아닌데, ‘도와드려야 해.’라는 강박 때문이었다. 결국 아빠가 말했다.
“아이고, 이거 아빠가 혼자 해도 충분해. 아빠 혼자 슬슬 해다가 나르면 돼. 작년에도 혼자 다 했는데 뭐. 일단 들어가서 밥이나 먹자.”
근데 정말로 나는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자버렸다. 엄마는 또 엄마대로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아빠는 결국 혼자 오후 내내 배추를 모두 뽑아 날라놓았다. 이제 아빠도 연세가 있는데, 나이 생각 안 하고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배추 밭에서 폭발해버린 나 자신이 미웠다.
김장의 날 전날이 밝았다. 아침 7시에 화장실을 갔는데 밖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화장실 창문 너머로는 뒷마당이 보이는데, 아빠가 그 아침부터 아궁이에 물을 끓이고 있었다. 우리 집은 늘 보리차를 끓여 먹는다. 어릴 때부터 단 한 번도 집에 보리차가 없었던 적이 없다. 눈 건조증이 심한 날 위해 내가 부모님 댁에 있는 동안 아빠는 결명자도 듬뿍 넣어서 끓여 주었다. 뿐만 아니라 아빠는 아침부터 김장 속에 들어갈 무도 다 닦아 놓았다고 한다. 김장만 끝나면 그래도 올해 큰 일은 끝나는 거니 어서 김장 끝나고 부모님이 제대로 좀 쉴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엄마와 나는 쪽파와 대파를 다듬었다. 역시나 햇빛이 좋았다.
오후에는 배추 절이기를 했다. 배추를 총 80포기 넘게 준비했는데, 배추가 너무 커서 그것도 4등분을 해야 했다. 배추를 가를 때 보니 속도 참 알차게 익어 있었다. 아빠가 배추를 4등분 해서 자르면 엄마가 거다란 고무 대야 세 개에 나누어 배추를 절였다. 어제 내가 잔뜩 힘들어한 탓인지 부모님은 나에게 힘든 건 시키지도 않았다. 나는 옆에서 배추를 집어 주고 필요한 것을 가져다주는 등의 잔심부름 정도만 할 뿐이었다.
저녁에 엄마는 풀을 만들고 육수를 내느라 바빴고, 나와 아빠는 무채를 썰었다. 아빠는 위험하니까 하지 말라고 했지만, 아빠 혼자 어마어마한 무를 가지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에 돕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며칠 전 아빠는 김장 중에 무채 써는 게 가장 힘들다고 말했다.
“가희는 좀 작은 것들로 하다가 무 작아지면 아빠한테 줘. 위험하니까. 조심해서 해야 해 해!”
아빠는 내가 손을 베일까 노심초사했다. 무채를 써는 채칼이 참 날카로워 보이긴 했다. 무가 아주 쓱싹 잘도 갈렸다. 나는 아빠 말대로 상당히 조심하며, 무 크기가 줄어들면 아빠에게 넘기곤 했다.
“아이고 부녀가 아주 보기 좋네.”
라며 엄마는 우리의 사진을 찍어 주기도 했다. 일을 다 마친 후에는 김장 통을 닦으며 대망의 내일을 준비했다.
그리고 드디어 김장하는 날. 새벽 6시 반에 일어났다. 어제 절여 놓은 배추를 씻기 위해서였다. 지금껏 김장을 도왔을 때에는 늘 속 싸는 것만 했었다. 그게 김장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절여진 배추를 씻는 것이 정말 제대로 된 김장 노동이었다. 엄마가 1차적으로 헹궈서 나에게 넘기면 나는 2차로 헹궈서 아빠에게 넘겼다. 그럼 아빠가 마지막으로 꼼꼼히 다시 헹구고 잘 씻긴 배추를 따로 옮겨 놓았다. 배추 담이 쌓이기 시작했다. 김장을 함께 해온 시간이 긴 만큼 부모님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 나는 그 사이에 껴서 뭐라도 하겠다고 애쓰고 있었고.
무채를 비롯한 속을 만들 때에는 총각무김치 때처럼 아빠가 고생해주었다. 그때와 같은 커다란 고무 대야에 엄마가 준비한 각종 것들을 넣고 아빠는 열심히 쓱쓱 비볐다. 그때쯤 옆 동네에 살고 계신 고모와 고모부도 건너왔다. (고모네는 며칠 뒤에 김장을 했고, 우리 셋은 고모네 김치도 도와주러 갔다. 이른바 김장 품앗이.) 어른들은 세상 가장 중요한 일처럼 간을 보았다.
김장 속이 준비된 후 고모, 고모부, 엄마, 나는 김장 속을 싸기 시작했다. 우리는 테라스 한편에 김장 매트를 펼쳐 놓고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아빠는 김장 통이 채워지면 빈 거로 바꿔주고, 김장 통을 옮기고, 배추를 새로 가져다주는 역할을 맡았다. 추가로 아궁이에 수육을 삶는 일까지 맡았다.
김치가 정말 너무너무 많았다. 그야말로 김장은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 속 싸는 시간이었다. 온몸이 아픈 건 물론이었고,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랐다. 네 사람이 쉬지도 않고 속을 싸고 있는데, 배추는 끊임없이 도착했다. ‘할 수 있어.’와 ‘죽겠다’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드디어 끝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는 툭 치면 온몸이 가루가 될 것처럼 힘들었다. 그래도 이제 곧 수육에 김치를 싸서 소주 한잔을 할 수 있다는 달콤한 희망이 날 살려 내었다.
올해 우리 집 김장은 역시 끝내주게 맛있었다. 2시간 동안 아궁이 솥에 삶아진 수육은 또 어찌나 그렇게 맛있던지. 흰쌀밥, 김치, 수육, 소주만 놓고 먹었는데 정말 김장의 노고에 대한 완벽한 보상이었다. 고모가 말했다.
“아니 도대체 김치가 매년 이렇게 맛있게 되는 비법이 뭐야, 나도 좀 알려줘 봐.”
“그건 우리 딸도 안 알려주는 비법이야.”
엄마 대신 아빠가 대답했고, 우리는 크게 웃었다. 김치 맛 술맛 고기 맛, 모든 게 완벽했다.
나는 그날 이후로 매년 김장을 해내는 모든 사람들을 존경하게 되었다. 모든 김치가 탄생되기까지 누군가는 며칠을 고생하고 또 고생했을 것이다. 애정을 쏟고, 관심을 기울여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먹을 한 해의 김치를 담그는 일. 요즘에야 워낙 사서 먹는 김치도 맛있고, 김장을 해도 또 절인 배추를 살 수 도 있는 만큼 방법이 편해졌다지만 그럼에도 굳이 고생을 하며 김치를 담그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은 것 같다. 그 모두를 존경한다.
김치 부자가 된 우리는 참으로 든든하다. 함께 이 든든함을 느끼는 모든 김치 부자들에게 김장하시느라 참 고생 많으셨다고 글을 통해 남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