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만이 아니라 진짜로
외국에 살 때 친구들이 늘 하던 이야기,
“내가 진짜 꼭 놀러 갈게!” 혹은
“기다려봐, 내가 다음 휴가는 어떻게 해서든 길게 빼서 간다.” 아니면
“나 재워줄 거지?”
몸만 오라고 해도, 제발 오라고 해도, 구경 다 시켜준다고 해도 사실 그렇게 말한 친구들은 정말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물론 내가 한 나라에 진득하니 있었던 것은 아니라 그럴 수도 있겠다. 탄자니아야 워낙 접근성이 힘들다 치고, 스위스는 그래 물가가 너무 비싸다 치고, 그런데 프랑스는… 심지어 친구가 가이드를 하고 있는데도 안 왔단 말이다. 같은 대륙에 있어서 편하게 놀러 오거나, 내가 있던 근방 지역을 여행하다 연락을 한 (재워달라고 하지 않는) 지인들만 있을 뿐이었다.
곡성은 좀 다를 거라 생각하고 있다. 적어도 비행기 탈 필요는 없으니까. 물론 대부분의 친구들이 수도권에 포진하고 있기 때문에 생각보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말들은 다들 잘한다.
“이참에 내가 곡성에 한 번 가봐야겠네!” 혹은
“곡성 맛집 다 알아놓아야 해!” 그리고 역시나
“나 재워줄 거지?”
곡성으로 이사한 지 4주가 채 되지 않았을 때, 친구 하나가 놀러 왔다. 말로만 놀러 온 것이 아니라 진짜로 놀러 온 것이다. 입사 초반부터 계속된 근무로 인해 쌓인 초과근무를 갑작스레 사용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친구가 시간이 되어 3월의 어느 금요일에 곡성으로 1박 2일 짧은 콧바람 여행을 오게 된 것이다.
용인에 사는 친구는 서울까지 가서 KTX를 타는 것이나, 느리더라도 수원에서 기차를 타는 것이나 똑같다는 계산을 마쳤다. 이름도 찬란한 서해금빛열차를 타고 그녀가 곡성으로 내려왔다. 나는 집에 손님을 들일 준비를 마치고 곡성역으로 그녀를 마중 나갔다. 역시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아침부터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멈추지 않았다. 호기롭게 우산 없이 나온 나는 편의점에서 우산을 하나 집어 들었다. 앙증맞은 투명 비닐우산이었다. 친구를 만나고 얼마 지나서 비는 그쳐서 우산은 쓰고 다닐 필요가 없게 되었다.
대학 동기로 만난 우리는 집이 가까워 학교 통학을 같이 하는 경우도 많았고, 겹치는 친구들도 많아 자주 시간을 보냈다. 한마디로 결이 맞는 친구였기에 오랜 시간 동안 서로의 근황을 알 수 있었다. 내게 그만 좀 돌아다니고 정착하라고, 술 좀 작작 마시라고, 실비 보험 좀 가입하라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친구지만 그마저도 애정으로 느껴져 내가 참 사랑하는 친구이기도 하다.
친구를 데리고 들어간 식당. 내가 곡성에서 했던 외식 중 가장 내 입맛을 사로잡았던 곳이기도 하다. 친구 역시 연신 맛있다는 말을 뱉으며 고기를 열심히 씹어 삼켰다. 우리는 열심히 고기쌈을 먹고, 또 신나게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평소 가보고 싶었던 카페에 함께 갔고, 그다음에는 곡성의 대표적인 가볼 만한 곳인 기차마을에 갔다. 흐릿한 날이 계속되었지만 오히려 운치 있고 좋았다. 친구는 어째 남쪽 지역이 더 춥냐고 하면서도 오히려 쨍한 날보다 돌아다니기는 좋다고 했다.
기차마을에서 우리는 사진도 여러 장 찍고, 관람차도 타며 온갖 낭만을 부려보았다. 그리곤 기차마을의 자랑, 대한민국 유일의 관광용 증기기관 열차를 타고 가정역이란 곳까지 이동하기도 했다. 기차 안에서 보는 섬진강은 너무 아름다웠다. 나에게뿐만 아니라 친구의 눈에도 섬진강이 상당히 아름답게 비치고 있어서 내심 기분이 좋았다. 우리는 ‘멋있다!’를 연발하며 증기기관차가 주는 매력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두 번째로 타는 것이지만 오랜 친구와 타는 맛은 또 달랐다.
증기기관차는 우리를 다시 기차마을에 데려다주었다. 흐린 날씨 탓에 낮이 부쩍 더 짧은 느낌이었다. 기차마을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걸린다. 차가 없어서 친구를 괜히 고생만 시키는 것 같아 미안했다. 차가 있었다면 더 좋은 곳을 많이 데려갔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친구는 걷는 것을 나만큼이나 좋아했고, 아쉬움이 남아 다음에 더 올 수 있는 기회를 엿볼 수 있었다. 집에 가는 길에 우리는 슈퍼에 들러 저녁거리를 사고, 동네 빵집에 들러 곡성의 특산물인 토란이 들어간 빵을 비롯해서 몇 가지의 제과를 샀다.
“집 생각보다 괜찮네! 상태보고 잔소리 잔뜩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잔소리 안 해도 되겠구먼? 깔끔하니 잘해놓고 사네!”
나는 친구에게 내가 너에게 칭찬을 다 듣는다며 어깨가 한껏 올라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식탁도, 빈백도 없어서 집이 휑했다. 그 빈구석을 친구가 채워주는 것 같았다. 나는 친구를 위해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자신 있는 요리, 가지버섯파스타를 메뉴로 골랐다. 배고픈데 빨리 밥상을 차리라는 귀여운 호통 속에서 나는 조금이라도 더 진국인 파스타를 내놓고자 애썼다.
비록 파스타 접시가 없어 그냥 넙데데한 그릇에 음식을 올리고, 포크가 없어 젓가락으로 먹어야 했지만 친구는 개의치 않아 했다. 샐러드까지 올려놓으니, 비록 예쁜 식탁 위가 아닌 바닥에 상을 펴놓아도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내가 살다 살다 네가 해주는 요리도 다 먹어본다. 내가 너네 집 놀러 갈 때마다 요리해 줬었잖아.”
맞다, 집주인은 나지만 요리를 못하는 날 위해 늘 요리를 해주던 건 친구의 몫이었다. 그래도 곡성까지 친구가 먼 걸음을 했는데 또 요리를 시킬 수야 없지. 친구는 맛있다며 나의 레시피까지 물어보았다. 엄청난 발전이다.
우리는 잠들기 직전까지 수다를 떨었다. 주고받는 이야기는 멈출 줄 몰랐다. 원체 관심사도 비슷하고 서로의 취향을 알고 있다 보니 주거니 받거니 우리는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갔다. 친구와 이렇게 하루종일 시간을 보내는 게 참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었다. 꽤 많이 걸어 피곤할 법도 한데 또 언제 이렇게 시간을 보내겠냐는 마음이 커서였을까, 우리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다음날, 집에서 아침을 먹고 좌식 카페에 갔다. 온돌 바닥에 엉덩이를 잔뜩 지지며 전날 못다 한 수다를 마저 마무리 지었다. 토요일마다 열리는 플리마켓도 구경했다. 그러다 보니 정말로 친구가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기차역으로 가기 전 플리마켓에서 친구가 반지 하나를 선물해 주었다. 우리는 같은 반지를 나눠꼈다. 와, 이런 건 또 얼마만이야 우정반지! 곡성표 우정반지였다.
이제 정말로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엄청나게 먼 곳으로 다시 친구를 보내는 것도 아니지만, 괜히 남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친구와 함께 한 짧지만 길었던 일박이일이 조심스럽게 소화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더욱더 음미하고자 놓지 못하고 꼭 끌어안고 있었다.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친구는 내게 마지막 잔소리를 남겼다.
“나 다음에 곡성 다시 올 때까지 중고차든 스쿠터든 사! 그래서 운전해서 데리러 나와~”
친구는 마치 전철을 타고 헤어지듯 쿨하게 기차 위로 올라갔다. 나는 친구가 멀리 떠나려 공항버스를 잡아 탄 것처럼 배웅을 시작했다. 기차가 움직이자 나도 따라 움직였다. 서서히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기차 창문을 사이에 두고 여전히 장난스럽게 킥킥거렸지만, 내 마음만은 괜히 싱숭생숭해졌다. 친구가 고작 하룻밤을 자고 간 것뿐이지만 괜히 집에 돌아가면 친구의 빈자리가 느껴질 것만 같았다.
기차역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친구와 함께 걸었던 길을 다시 혼자 걸었다. 여기가 해외였다면 얼마나 기분이 요동쳤을까, 싶었다. 그래도 언제든 서로 보고 싶고 만나고 싶으면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이나 다니는 기차를 타고 친구를 만나러 갈 수 있다고 생각하자, 모나게 부어오르던 감정이 조금은 수더분해졌다. 매일같이 듣는 우울한 풍의 노래는 잠시 꺼두고 최대한 발랄하게 거리를 걸으려 노력했다. 그리곤 남은 주말을 바쁘게 보내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