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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맹 Dec 11. 2023

오리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공원을 딱 네 바퀴 돈다. 크게 네 바퀴. 그럼 정확하게 1시간이 걸린다. 걷는 동안 도로도 지나가고, 나무들 사이도 걷다가, 운동장도 스치고, 저수지를 옆에 끼기도 한다. 그러니까 네 번씩 지나가는 거다. 운동장도 네 번, 저수지도 네 번.


저수지에 여름이면 연꽃이 만개하지만, 지금은 겨울이라 조금은 척박하다. 그런데 그 모습이 또 그런대로 좋다. 아무도 더 이상 연꽃을 보러 오지 않아도 다음 만개를 기다리며 다가올 계절을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이 어쩐지 여름보다 더 정이 간다. 푸석푸석해진 잎사귀들 사이가 팔랑거린다. 그리고 그 사이에! 오늘도 있다, 오리 한 마리!


저수지의 다른 오리들은 보통 둘씩 짝지어 움직이고 있다. 그마저도 어쩜 완벽한 보호색을 띠는지 눈을 말똥히 뜨고 쳐다봐야 한다. 그 움직임을 곧바로 쫓지 않으면 놓쳐 버리기 쉽다. 그런데 그 오리 한 마리는 도통 그렇지가 않다. 오리는 언제나 혼자 있다. 혼자 무언가를 열심히 먹고 있거나, 물가로 올라와 풀 숲 사이를 유심히 살핀다. 그것도 아니면 그저 어딘가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있다. 가끔은 날기도 하는데 조용한 시골 저수지의 화려한 퍼포먼스가 따로 없다. 한 바퀴를 돌 때마다 매번 보기도 하고, 네 바퀴를 도는 동안 한 번도 마주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런 날이면 오리가 궁금해진다. 녀석의 빨간 부리가 눈에 띄지 않을 리도 없는데, 오늘은 어디서 무얼 할까?



오리야

하고 나지막이 불러보았다. 하지만 우리 사이의 간격이 그리 가깝지는 못하다. 저수지가 보기보다 깊으니 조심하라는 경고문구에 나는 괜히 겁이 난다. 오리는 내 목소리를 듣고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하긴, 이곳에서 지내며 온갖 소리를 듣고 지내왔을 텐데, 고작 내 목소리에 반응할 리가 없다.


오리야

다시 한번 불러보았다. 영 이상하다. 나는 오리에게 이름을 지어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걷는 동안 계속해서 오리의 이름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부리가 붉고 몸은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흙갈색, 그리고 머리와 목은 흰색. 조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나는 이 오리가 어떤 종일 지는 궁금해하지만 굳이 검색을 해보지는 않는다. 그럼 이름을 붙일 때 편견이 생길 것만 같다.


한 바퀴를 도는 내내 오리의 이름을 생각했지만 쉽사리 마음에 드는 이름을 생각해 낼 수는 없었다. 고민할 후보조차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름은 참으로 가까이 마주 하고 앉아서 다양한 표정을 관찰하고, 날씨에 따라 기분은 또 어떻게 변하는지도 봐야 생각해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 이름을 지어주는 게 쉽지가 않은 거겠지. 한때 주변 친구들 별명을 잘 지어주기로 유명한 나였지만, 역시나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오리에게 이름을 지어주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오리의 이름을 생각하다 오래전 기억에 묻힌 이름들을 하나둘씩 꺼내어보았다. 한 발자국마다 먼지 가득한 이름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케케묵은 먼지를 조심스레 털어내자 이름이 비로소 형태를 드러내곤 했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 나는 여러 개의 이름들을 꺼내보았다.


한때는 하루에도 서른 번씩이나 불러대던 이름이 지금은 감히 불러보지도 못할 이름이 되어있기도 했고, 발음하기 어려워 낑낑대다 결국은 전혀 다른 이름을 붙여주었던, 그 발음하지 못했던 이름을 오랜만에 만나기도 했다. 평생 잊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이름이 제 모습을 드러냈을 때에는 너무 놀라 잠깐 걸음의 속도가 느려지기도 했다. 서로의 이름만을 평생 부를 것처럼 그렇게 다정하게 아껴 부르던 이름도, 모든 분노로 꽁꽁 묶어 내던져버렸던 이름도, 어느 차가운 새벽이 지나면 다시는 보지 못할 얼굴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보며 참 늘여 부르던 이름도. 모두가 철 지난 이름이 되어있었다.


우리 모두는 얼마나 많은 이름을 들어왔고, 기억해 왔고, 또 잊고 있을까? 내 이름은 또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들려졌고, 불려졌으며, 또 잊혔을까. 이름은 잊어도 내 성은 평범하지 않은 성이라 기억될 확률이 더 높겠지 하는 마음에 조금은 다행이었다. 그래도 잊히는 것보단 기억되는 게 더 나을 테니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리 없는 오리는 그저 유유하게 물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



다음날은 밤에 걸었다. 저수지 옆을 바싹 걸어가면서 오리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저수지는 더욱 새까맸고 시커먼 물속을 바라보는 것은 왠지 무서웠다. 물살의 움직임이라도 있나 눈을 여기저기 돌려보았지만, 참으로 잠잠하기만 했다. 네 바퀴를 도는 동안 오리의 어느 움직임도 포착하지 못했다. 오리는 밤이면 무얼 할까? 어딘가 따뜻한 곳을 찾아 웅크리고 졸고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먼 곳을 응시하며 사색에 잠겨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을까? 아니면 밤이면 더 이상 혼자가 아닐까? 마지막 바퀴를 돌면서 나는 오리의 모습을 여러 갈래로 그려보았다.


내가 그린 오리의 빨간 부리에 달빛이 내려앉았다. 그러자 유난히도 눈에 잘 띄던 그 빨간 부리가 더욱 붉어졌다. 오월의 붉은 장미처럼 매혹적으로 빛이 났다. 윤기가 흐르는 깃털도 세상 모든 일을 이해한다는 듯한 눈빛도 빨간 부리에 감히 비할 수 없었다.


달빛리!

달빛이 유독 빛나는 마을. 오리가 그 마을의 주인이고, 나는 그 마을을 이렇게 한 시간씩 찾아오는 손님인 것이다. 녀석만의 영역, 비록 아주 작은 섬과도 같지만, 스스로의 영역을 만들어 부지런히 영역을 이동하는 거다. 그 마을의 이름이자 바로 오리의 이름을 나는 달빛리라고 지어주었다. 소리 내어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낮에 다시 오리를 만나면 그때는 조금 더 큰 소리로 불러 줘야지.


달빛리야? 달빛리씨? 아니면 그냥 빛리..!?


아직 그거까지는 모르겠지만, 오리를 만나면 반가운 마음에 알아서 내 입에서 녀석의 이름이 알맞은 형태로 튀어나오리라 믿는다. 어서 오리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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