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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맹 Dec 18. 2023

우중산책


겨울 비다. 오전이면 해가 잔뜩 들어와야 하는데, 집안이 어두컴컴하다. 그래서 늦잠을 잔 거라고 멋쩍은 변명을 늘어놓는다. 어젠 잠깐 해가 나더니, 또다시 비다. 눈이 이렇게 펑펑 내렸으면 이곳에 고립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자, 비가 내리는 게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기온은 그렇게 낮지 않다. 축축한 공기에 조금은 움츠러들지만 그래도 두꺼운 패딩까지는 필요 없는 날씨이다.


비가 오니까 거리도 공원도 너무나 한적하다. 원래도 한적한 시간을 골라서 나왔지만, 그래도 평소보다 더 휑하다. 비가 오니까 그라운드 골프를 치러 모인 어르신들이 없다. 축구나 농구를 하는 어린아이들도 없다. 걷는 사람도 없고, 몇 주째 공사 중인 현장도 중단되었다. 정말 나 혼자 이 넓은 공원을 걷고 있구나,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모든 길이 통째로 다 내 것이다. 우산을 쓰고 걷는다. 몇 달 전 동네 어느 카페에서 누가 내 우산을 (아마도 착각하여) 가져가서, 나도 내 것처럼 생긴 것을 집어온 것이다. 뭐, 이렇게 우산도 돌려쓰고 하는 거지 하는 마음으로 집어온 우산이다.


노이즈캔슬링 기능을 켜고 노래를 들어도 빗소리가 귓가에 쟁쟁하게 울린다. 집 안에서 느꼈던 것보다도 강수량이 꽤나 된다. 신발 끝이 금방 젖어 들어간다. 빗소리를 배경으로 하고 노래를 듣는다. 좋아하는 노래의 목록에서 무작위 재생을 한다. 평소에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 중 하나로 파도 소리나 빗소리를 틀어 놓곤 한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때는 거친 비가 내리는 파도치는 밤바다의 소리를 틀어놓는다. 그 위로 노래를 틀어놓으면, 정말로 그곳에 있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비가 오니까 굳이 이중으로 그렇게 소리를 틀어 놓을 필요가 없다. 지금은 빗소리를 일부러 찾아 듣지 않아도, 그저 내가 있는 이곳에 이렇게 비가 주야장천 내리고 있으니까.



신발을 뚫은 비는 이제 양말까지 스며들어갔다. 곧 있으면 걸을 때마다 발끝에서부터 찍찍 소리가 날 것이다. 그래도 매일 걷는 양을 줄일 생각은 추호도 없다. 바닥엔 점점 물이 고이는 곳들이 많아지고, 저수지 위로 빗방울들이 가감 없이 본인들을 드러내며 떨어지고 있다.


공원 곳곳에 비치된 운동 기구들도 잔뜩 젖었다. 당연한 거지만, 아무도 운동기구를 이용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그리고 비가 또다시 온종일 내릴 거라 예보된 내일도. 비에 젖어 아무도 찾지 않는 운동기구가 마치 내 글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읽히지 않는 글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은 외로워진다. 한자, 한자 심혈을 기울여 선택한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은 읽힐 때 비로소 생명이 불어넣어 지는 거지만, 거친 비로 인해 아무에게도 읽힐 수가 없다. 게다가 그 위로 굵은 빗방울이 잔뜩 맺힌 채 떨어질 줄을 모른다. 꿉꿉하고 축축하다. 그래서 이제는 나조차도 읽을 수 없는 글이 되어버린 것이다. 투명한 빗방울이 여러 방울 겹치자 그것은 더 이상 투명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모래알보다도 더욱 답답한 모양새로 감춰진 글이 되어버렸다고. 언젠가 그저 토해낸 글들이 빛도 보지 못하고 금방 숨어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친구에게 사진을 보낸다. 친구는, ‘여기는 아파트만 보이는데 너는 산도 보고 좋겠다’고 한다. 한 폭의 동양화 같다는 말도 덧붙이며 부러워한다. 이곳은 비가 오면 늘 더 멋지다. 겹겹이 포개진 산들의 경계선도 뚜렷하게 잘 보였고, 그 사이마다 구름들이 내려앉는다. 산 위에 얹어진 조금은 헐거운 생크림 같다. 아니면 휘핑기로 잔뜩 헤집어 놓은 계란 흰자 같기도 하다. 이 각도에서 보나 저 각도에서 보나 계속해서 멋지다. 이런 풍경을 그저 두 다리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은 참 진귀한 행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바짓단까지 다 젖어버렸지만 기분이 좋다.



비가 와서 그런가, 그래서 거리에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풍경에 눈을 빼앗기기 쉽다. 그러니까 자꾸 걷다가 걸음을 멈추게 된다. 같은 길을 꾸준히 걷다 보면 코끝으로 느껴지는 계절의 사소한 변화를 눈으로 보는 것만 같다. 겨울비가 앙상한 나뭇가지 끝에 달려 있다. 그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본다.


빗방울들은 떨어질 듯 말 듯, 하지만 결국엔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이 여기라는 듯 가지 끝에 잘도 매달려 있는 것이다. 누가 봐도 가지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그 모습이 조마조마해 보이지만, 결코 자신들은 그렇지 않단다. 누군가는 지금 서로를 향해 왈가왈부하며 그곳이 어울리지 않는다며, 그 자리는 결코 너의 것이 아니라며 중얼중얼할지 모르겠으나, 우리 그냥 이렇게 기력이 다 할 때까지 매달려 있어 보는 것이다. 기력이 다 하지 않아도 괜찮다. 흥미 잃으면 잠시 손 놓고 그냥 툭 떨어져 보는 거다. 그러면 또 다른 가지에 닿거나, 저수지에 닿거나, 누군가의 우산에 닿겠지. 여기가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어도 너무 괜찮으니까. 아니, 지금 당장 최종 목적지를 찾을 필요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읽히지 못하는 글이 되더라도 계속 써야지.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다. 그 사이 새롭게 나뭇가지에 자리를 잡은 빗방울이 떨어진 빗방울보다 많은 것을 본다. 각자 자리를 차지한 빗방울들은 만족한 듯한 얼굴이다. 구름에서부터 흩어져 짧고도 먼 여행을 해온 이들의 쉼을 더 이상 방해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바람에 나뭇가지가 살랑거리며 흔들렸고, 그에 맞춰 나는 다시 걷는다. 예상했던 것처럼 젖어든 발가락 끝에서부터 젖은 양말과 젖은 신발이 마찰을 일으키며 찍찍거리는 소리는 만들어냈지만, 하나도 찝찝하지 않았다. 집이 코앞이었다. 집에 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아껴둔 와인을 마셔야지. 비 오는 날은 참 상쾌하고 사랑스럽다며 혼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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