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메이맹 Dec 04. 2023

소심하게 걸었던 때가 있었다


세계적인 대도시에서 가이드를 했던 적이 있다. 워킹 투어 가이드여서 하루 종일 걸어 다녔다. 가이드를 시작하기 몇 달 전에는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걸었다. 45일 동안 900km. 길 초반부에 등산화를 제대로 묶는 법을 몰라 5일 정도 고생한 후에는 걷는 것에 최적화된 몸이 되었다. 그 이후부터 일까, 아니면 원래 기초체력이 좋았을까. 걷는 거에 대한 부담이 없었다. 가이드를 하며 온종일 말하고 걸으면서도 목은 아플지언정 다리는 쉽게 아프지 않았다. 아침 9시부터 시작하여 야간투어까지 하면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 마쳤는데, 그런 날이나 다리가 조금 피로했을 뿐이지 무리가 되진 않았다.


한국에서도 참 잘 걸어 다녔다. 도보 30분까지는 웬만하면 걸어 다녔다. 몸과 마음이 여유로울 때는 최대 4km까지도 걸어 다녔다. 태어나서 성인이 되고 나서도 오랜 시간 수원에서 살았는데, 수원과 서울이 대중교통으로 워낙 잘 연결되어 있어서일까. 차를 타고 다니고 싶다란 생각보단 걸을 틈만 나면 열심히도 걸어 다녔다. 길이 막힐 때는 버스보다도 내 걸음이 낫겠다는 생각은 아직도 한다.


그런데 그런 내가, 참 소심하게 걸었던 때가 있었다.



바뀐 환경, 낯선 언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처음인 건 아니었다. 더욱 어려운 환경, 더욱 불친절한 언어, 더욱 거리감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도 잘 지냈다. 단순히 ‘잘 지냈다’라고 하기엔 마음이 조금 무겁지만 어쨌든 소심하진 않았다. 하지만 또다시 새로운 그곳에선 전혀 다른 내가 되어있었다. 날이 너무 무더워 낮에 걷기 어렵거나 위험하니까 밤에 걷기 어려웠던 것도 아니었다. 나는 위축되어 있었다. 나는 그걸 한참 동안 모른 척하고 있었다. 스스로 인정한 것은 그 시기가 꽤 오래 지난 후였다.


요즘 시골길을 실컷 걷다 보면 그때 생각이 자주 난다. 그때도 난 정말 자주 걷고 싶어 했다.


늘 집과 회사가 멀었고, 약속 장소도 9할은 서울이다 보니 이동거리가 꽤 있었다. 심지어는 중학교도 버스 타고 40여분은 가고 내려서 또 15분은 가야 하는 거리를 다녔다. 걸어서 학교나 일터를 간 거는 초등학교가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그 새로운 곳에서 다니던 어학원은 정말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심지어 학원 교실 발코니에서 집이 보일 정도였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와 당시 살았던 집의 거리보다도 가까웠으니까.


오전 내내 수업을 듣고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오후 내내 복습과 과제를 하면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가장 부족한 것은 언어라고 생각했기에 언어 공부에 매진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수험생처럼 그러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주변 환기를 위해, 그리고 나의 근육량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걸어야 했다. 헬스장을 주 2회 정도는 다니긴 했지만, 그것과 걷는 것은 또 별개였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마음껏 거리를 활보하지 못했을까. 난 왜 스스로를 이방인이라는 틀에 가두고 말았을까?


유난히도 대학생들이 많은 동네였다. 그래서 늘 활발하고 흥이 넘쳤다. 그런데 나는 그 흥을 따라가지도 못하고 동경하지도 않았다. 평일에는 모두가 가뿐한 걸음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주말 저녁이 되면 모두들 잔뜩 멋을 부리고 그 언제보다도 행복한 눈빛을 장착하였다. 일요일이면 거리는 드디어 한적하고 다들 각자의 가족과 모여 따뜻한 가정의 즐거움을 누렸다. 나 빼고는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거기엔 내가 낄 자리가 없었다. 끼고 싶지 않았던 걸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피했던 걸 수도 있다.


나는 사람 많은 곳이 싫었다. 누가 말이라도 걸까 봐, 그러면 한참 부족한 나의 언어 실력이 들통나버리니까 싫었다. 누가 쳐다라도 볼까 봐, 그러면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괜히 나를 판단할까 봐 싫었다. 사실 아무도 그러지 않았는데 나 혼자 그랬다.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혼자 밖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거리를 걷는 일밖에 없었는데 그것조차 힘들어했다. 걷지 못하고 난 자꾸 숨어 들어갔다. 나의 입이 되어주고, 나의 다리가 되어주는 사람이 옆에 있던 것은 다행이었을까 더욱 큰 불행이었을까. 그 그늘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숨 쉴 구멍조차 찾지 못할까 걱정했다. 그 소심함을 들킬까 봐 나는 예전처럼 많이 걷지 못했다.


그럴 때면 나는 지형 핑계를 댔다. 그곳엔 경사가 심한 길이 참 많았다. 거리에는 계단을 만들어 놓은 곳이 많았다. 내리막을 한창 내려가다가도 또 올라가야 했기에 내려가는 것도 머뭇거리게 되었다. 올라가며 땀을 뻘뻘 흘려대도 개운한 맛이 하나도 없었다. 찬바람에도 땀범벅이 되면 그저 조용한 벤치를 하나 찾을 뿐이었다. 그러면 심심한 바람이 땀을 식혀주었다.


그래도 시간이 얼마간 흐르고 나서는 조금 나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낄 자리는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굳이 끼고 싶은 자리가 없었다. 탐나는 것이 없었고, 내가 있을 곳이 아니란 확신이 들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던 감정에 확신이 들었다.



풀리지 않던 갈증을 고스란히 싸매어 들고 와서 난 지금 걷고 있다. 그때 못다 한 걸음을 이곳에서 만회라도 하듯이 그렇게 열심히도 걷는다. 땀으로 목덜미와 등줄기가 축축하게 젖어들어가면 상쾌하고, 눈둘 곳은 많지 않아도 그 고요가 부담스럽지 않다며 좋아한다.


그 아름다웠던 곳에서, 즐길 것도 많았던 곳에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아름다운 호수 곁을 걸으며 호수가 흐르지 않고 고여 있다며 답답해했다. 이 볼 것 없는 곳에서, 즐길 것도 없는 곳에서, 이름을 널리 떨치지도 못하는 덩치 작은 저수지 곁을 걸으며 물에 비친 산과 낮달의 모습을 보며 편하게 호흡한다.


우리는 모두 마음이 편한 곳에서 걷고 싶은 만큼 걸어야 할 자유가 있다고 조용히 읊조리면서 걷는다. 소심하게 걸었던 그때가 참으로 까마득해진다.


이전 01화 걷다 보면 어디든 갈 수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