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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맹 Nov 27. 2023

걷다 보면 어디든 갈 수 있다


갑자기 눈발이 날린다. 아주 작고 희미해서, 집중을 해서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이다. 나는 눈커플에 힘을 주고 내리는 눈송이를 쫓는다. 물 빠진 색의 헐렁한 하늘에서 스스럼없이 땅으로 떨어지는 눈송이다. 힘은 없지만 떨어지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검은색 세단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눈송이를 한참 쳐다본다. 차의 주인이 그런 날 보기라도 하면 무어라 핑계를 대야 하지, 잠시 생각하다 이내 시선을 거둔다. 


하늘은 더욱 회색빛을 띠고 구름은 그보다 더욱 짙어져 간다. 회색 하늘에서 떨어지는 허연색 눈송이를 바라보며 걷는 날이다. 그래서일까, 오늘은 유독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이 든다. 많은 양의 눈이 내리는 것도 아니고, 눈이 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사람도 있을 정도의 눈이다. 그래도 공원에 보이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많은 눈이었다.



두 해 전 겨울에 내린 엄청난 양의 눈이 생각났다. 새로운 곳에 막 둥지를 틀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곳의 겨울은 한국보다 춥지 않다고 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한국에서보다 부피가 작은 겉옷을 입고 다녀도 충분했다. 하지만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자꾸만 마음이 시렸다. 난 분명히 혼자가 아닌데도 자꾸만 추웠다. 이게 왜 이러지 싶었지만 답을 굳이 입 밖으로 내놓지는 않았다. 그 순간 몸마저도 추워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목도리를 꽁꽁 싸매고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차가운 말들을 꾹 누르던 날들이 조용한 눈발 사이로 스쳐갔다. 두 해 전 겨울하늘이 10여 분간 미친 듯이 토해내던 눈발이 자꾸만 겹쳐 보였다. 나는 갑작스레 한기가 올라 겉옷을 더욱 여미었다. 찬 바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더욱 꽁꽁 싸매고 올걸,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사실 이미 몸을 열심히 움직인 탓에 등줄기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회색 하늘 사이를 비집고 햇빛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칼바람은 여전했지만 해와 마주하고 있으면 칼바람마저도 연약하게 느껴졌다. 머리에 얹고 있던 선글라스를 바로 썼다. 눈부심이 사라지자 저 멀리 산까지 편안하게 쳐다볼 수 있게 되었다. 감쳐왔던 산줄기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와아- 몇 달째 보고 있는 모습이지만 이런 날이면 유난히 더 멋지다. 내가 참 멋진 곳에 지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날 좀 바라보라는 듯 어깨를 바로 하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모양새이다. 나도 괜히 움츠러든 어깨를 뒤로 쭈욱 펴본다. 척추 어디에선가 뚝하는 소리가 들린다.


산의 표정마저도 읽을 수 있는 양의 해가 쏟아지자 나는 아주 오래 전의 설산을 떠올린다. 길 끝의 풍경을 꽉 채우던 설산의 자태, 그 모습을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압도당했다. 이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햇빛에 금방 사르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눈송이가 얼마나 펑펑 내려야 여기서도 설산의 정취를 느낄 수 있을까. 


그때 보았던 설산의 표정을 내 앞의 산에 옮겨본다. 꼭 맞진 않아도 얼추 어울린다. 가냘프기 짝이 없는 내 운동화는 어느덧 멋들어진 트레킹화로 바뀌어 있었다. 어떤 산이든 문제없이 오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긴다. 그 어떤 여정이 앞에 놓여도 실수 없이 떠날 수 있을 것만 같다. 축복받지 못하며 떠나는 길이더라도, 그 트레킹화와 함께라면 혹독하지 않을 것만 같다. 나는 그 트레킹화를 신고 계속해서 걷는다. 이렇게 걷다 보면 언젠간 다시 산에 가 닿으리라. 그러면 그때 이 순간을 추억하며 옅게 하지만 크게 웃어보리라.


햇빛은 더욱 쨍해지지만, 흐린 하늘은 개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는 그 두 조합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따뜻하지만 마냥 따뜻하지가 않다. 우중충하지만 또 깊은 심연에 빠지게 두지는 않는다. 이보다 적절한 조화로움이 또 있을까 싶다. 



나무들이 가지런히 양 옆을 채운 길을 걷는다. 나무들의 옆구리마다 찬 바람이 잔뜩 일렁이고 있다. 나무들이 떨고 있지만 햇빛이 그들을 포근하게 감싸준다. 나무들이 품은 온도가 조금씩 상승한다. 이어서 나무의 키도 자라난다. 쑥쑥,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키를 키워간다. 어쩌면 내 키가 작아지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무들은 살도 찌운다. 일정한 두께로 균등하게 뻗어 올라간다. 참 매끄럽기도 하다. 낮게 떠있던 구름이 어느덧 나무 위에 자리를 잡고 편안히 앉는다. 


내 눈에 나무들은 바오밥 나무로 보인다. 아니 남들 눈에도 그렇게 보이리라 확신한다. 그토록 가고 싶었지만 여태껏 가지 못했던 마다가스카르에 와있다는 착각이 든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워낙 사진을 많이 본 탓에 그래, 이건 바오밥 나무가 확실하다고 혼자 중얼거린다. 그 사이를 걷는 일은 참 황홀했다. 축축한 공기가 바닥 가까이 납작하게 눕고, 보드라운 바람이 내 곁을 맴돈다. 고개를 올려 바오밥 나무의 자태를 감상한다. 앞 목이 쭉 늘어난다. 정신을 차리면 금방이라도 사라질 거란 건 꿈에도 모른다는 듯이, 나는 그 풍경을 감상한다. 눈에 가득 담을수록 머리는 무거워진다. 머리가 짓누르는 어깨가 아파와도 눈을 거둘 수가 없다. 짙은 고동색의 바오밥 나무가 주는 평온함이 길에 넘쳤다.


단단한 흙길을 걷는 내 발걸음 소리가 둔탁하게 울려 퍼진다. 내가 찍고 온 발자국 위로 살포시 흰 눈송이가 떨어진다. 참으로 화려한 춤을 추며 땅으로 내려온다. 금방 사라지리란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아니 알더라도 그 순간이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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