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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맹 Jan 01. 2024

햇빛이 나를 걷게 한다.


아침을 간단히 챙겨 먹고 환기를 시켰다. 찬 바람이 집안 곳곳으로 스며 들어왔다. 쪼르륵 흘러 들어온 바람이 피부에 닿자 조금은 움츠려 들었지만, 상쾌함이 나쁘지 않았다. 블라인드를 걷었다. 햇빛이 거리낌 없이 집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눈이 부셨지만 꼿꼿이 서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산도 그대로였고, 도로도 그대로였다. 한결같은 모습이 괜스레 위안이 되는 날이었다.


볕이 참 좋았다. 오랜만에 해를 보는 것 같았다. 요 며칠 조금 침울해 있었는데 그게 햇빛을 못 봐서 그런 거냐며 나 혹시 계절성 우울증이 있나, 하며 걱정하던 찰나였다. 찬란한 햇빛을 보니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비타민D를 챙겨 먹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몸도 가뿐했다. 나는 서둘러 나갈 준비를 했다. 두꺼운 양말을 신고 비니를 눌러썼다. 선크림도 두껍게 발랐다. 오늘은 매일 걷는 집 앞 저수지 공원이 아니라 10분 거리의 천변 길로 향했다.


일단 커피 한 잔이 필요했다. 천변 산책로에서 가장 가까운 카페로 갔다. 가게 주인은 있었지만 오늘은 영업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다른 가까운 카페를 찾았다. 토란 파이 굽는 냄새가 좋았다. 나는 카푸치노를 한잔 주문했다. 커피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에도 어서 걷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짧은 시간이 그리도 길게만 느껴졌다. 기다렸던 따뜻한 커피를 손에 쥐고 길을 나섰다. 햇빛을 온몸으로 맞자 온몸 구석구석 청량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천 바로 가까이로 내려갔다. 좋아하던 그네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잠시 그 시간 자체를 음미했다.


평일 오전의 따사로운 시간이었다. 연말이라 괜히 기분이 뒤숭숭했는데, 잠시나마 머리가 맑아지는 것도 같았다. 금방 또 내 마음속에 피어나 나를 괴롭힐 고민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만, 그 시간만큼은 그 무엇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았다. 달리 하고 싶은 게 없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며칠 사이 얼었던 천이 햇빛에 사르르 녹아갔다. 그걸 바라보고 있자니 눈이 너무 부셨다. 그마저도 참 좋았다.


나는 천을 따라 다소곳하게 난 길을 걸었다. 천 양 옆으로 길이 깔끔하게 뻗어 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너무 좋아하던 길이었다. 산책로에는 걷는 사람도 없었다. 천에 있는 오리 떼가 훨씬 많았다. 떼를 지어 움직이는 오리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고, 바람에 빠르게 이동하는 구름 무리의 움직임을 눈에 담았다. 차도는 천변 길보다 위에 있었다. 시골이라 차가 많이 다니지도 않지만 그래도 더욱 조용할 수 있었다. 번잡한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오직 평안하고 인자한 공기만 잔뜩 머금고 있었다.


손이 너무 시리고 찬바람에 볼이 잔뜩 붉어졌지만 산책을 멈출 이유는 되지 않았다. 나는 비니를 귀까지 꼭 눌러쓰고 패딩 잠바의 모자까지 뒤집어썼다. 다 마셔버린 커피 잔을 버릴 데가 없어 한 손으로는 빈 커피컵을 들고 있어야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걸을수록 내 마음은 더욱 녹았고, 눈빛은 더욱 따스해졌다.


천변에 있는 징검다리를 오가며 양 옆 길을 모두 걸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별다른 의심 없이 땅을 밟았다가 발이 쑥 들어가는 일이 벌어졌다. 알고 보니 살얼음이 끼어 있었고, 나는 그 위를 힘차게 내 무게로 밟았던 것이다. 물이 얕은 곳이어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천에 허리까지 잠겨 허우적댈 뻔했다. 날씨도 이렇게나 추운데 말이다.


세 발자국 정도 허둥대다가 길 위로 안전하게 올라왔다. 도와줄 이도 이상하게 쳐다볼 이도 나를 구경할 이도 없었지만 혼자 꿱꿱 소리를 지르며 (나름) 육지로 올라왔다. 신발을 내려다보니 운동화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바지 밑단도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 와중에도 커피 컵은 꼭 손에 쥐고 있었다. 나는 괜스레 그 모습이 웃겨서 크게 웃었다. 아무도 듣지 못할 웃음을 크게 내뱉고 나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나는 물이 찍찍 흐르는 신발을 신고 별일 없다는 듯 빵집도 들렀다. 바게트를 사고 집으로 털래 털래 걸어 들어왔다. 갓 구워져서 아직 채 식지 않은 바게트 빵 봉지를 살짝 열어두었다. 젖은 양말을 벗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왔다. 이제야 점심시간이었다. 하루의 시작이 풍성했고, 다가올 오후가 기대되었다. 비록 병든 닭처럼 졸지라도 내 뺨 위에는 햇빛이 고스란히 쏟아질 것이다. 온몸에 묵은 감정을 탈탈 털어낸 개운함이 오래오래 자리하길 바라며, 나는 점심 식사를 차렸다. 식탁 위로 맑은 햇빛이 깊게 들어와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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