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고민이 많아지는 시기이다. 연말, 연초는 괜히 그렇다. 한 것 없이 나이만 먹는 것 같고, 또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 안 될 텐데 하는 걱정이 앞선다. 까마득하게 펼쳐져 있을 거라 생각했던 시간이 물 흐르듯 죄다 끝나 버린 걸 알았을 때의 막막함이 눈앞을 가린다. 걱정한다고 해결될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다. 유독 더 그렇다.
한 해가 끝나가는 걸 핑계로 서울에 가서 친구들을 만났다. 서울에 올라가서 친구들을 만나 고민거리를 두서없이 내뱉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생각만큼 그게 쉽지는 않았다. 오래된 친구들을 만나 너희들의 요즘 가장 큰 고민이 뭐냐고 물었다. 한 친구는 딱히 그런 게 없다고 하고, 한 친구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리곤 친구는 임신에 대한 화두를 조용히 내비쳤다. 친구들이 결혼하고 나면 함께 나눌 이야기의 폭이 좁아진다고들 하는데, 두 친구가 결혼한 지 각각 1, 2 년 차가 돼서 그런 건가 싶었다.
역시 걷는 게 답인가, 싶어 그냥 걸었다. 이 길도, 저 길도 눈앞에 있는 대로 내 발 끝이 닿는 대로 걸었다. 복잡한 머리를 부여잡고 걷다 보면 무언가 실마리가 마련될 거란 괜한 기대도 해본다. 아무 생각 없이 걸어보자, 싶지만 사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기도 쉽지 않다. 고민거리가 많을수록 더 그렇다. 사실 그럴수록 마음을 비워야 하는데 말이 쉽다. 괜히 발걸음까지도 덩달아 무거워진다. 나는 어느덧 몸을 질질 끌고 걷는 꼴이 되어 버린다. 그 모습이 우스워 괜히 웃음이 난다.
발 끝으로 온 신경이 집중된다. 한 곳으로 모든 긴장을 모은 채 걷다 보면 그 문제의 중심으로 도달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천천히 그곳을 향해 걷다 보면,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각도에서 그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미 한번 겪었던 문제와 같은 유형일 수도 있고, 전혀 새롭지만 큰 틀에서 보면 결국엔 같은 형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저런 크고 작은 기대를 품고 걷는다. 하지만 걷기는 내가 그렇게 골똘히 무언가에 잠겨 있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지 못한다.
걷다 보면 뛰는 것 같기도 하고, 또는 멈춰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이 몇 번 반복되다 보면, 내가 몇 바퀴 째 같은 길을 걷고 있는지 셈 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열몇 바퀴를 도는 것도 아니고 고작 네 바퀴 도는 건데도 말이다. 분명히 눈을 뜨고 있지만 아까도 이 나무가 이런 모습이었나 싶고, 분명히 코가 제 기능을 하고 있지만 아까도 저 집에서 이런 냄새가 났었나 싶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고 걸음을 멈춰 골똘히 생각하기엔 내가 가진 혼자만의 고민이 너무 크다.
하지만 그런 커다란 고민이 길 위에선 그리 커 보이지 않아서 나는 참 의문이다. 분명히 이만큼 잔뜩 커서 혼자서 이고 다니기가 무거웠는데, 걷다 보면 그것의 무게가 변한다. 물을 잔뜩 먹어 축 쳐진 빨래가 어느덧 다 말라 가볍게 팔랑거리는 꼴이다. 그럼 나는 도대체 뭐가 맞는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해결해야 할 게 무엇인지, 마음을 모아 고민해야 할 거리가 무엇인지, 가장 시급하게 고려되어야 할 점이 무엇인지를 잊게 된다. 해이하게 풀어진 바람처럼 그렇게 나의 질문들은 사방으로 퍼져간다. 잡고 싶기도 하고, 모른 척하고 싶기도 하다. 두 가지 마음 사이에서 서성이다 나는 결국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걷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도 없다.
시간은 또 무심하게 흘러가 있다. 걷기 할당량을 채우고 나니 집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 외에는 별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여전히 아무런 해결책은 없다. 걸으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기려 했지만, 이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걷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애초에 아니었다고 생각하자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간을 번 것은 아니지만, 조금 다른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볼 여지는 충분히 생겼다. 머리가 아주 조금은 맑아졌고, 다른 색의 공기가 스며들었다. 천천히, 하지만 정확하게 다른 색이었다.
걸어도 고민은 해결되지 않고, 그간 찾지 못했던 답을 구하게 되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또 다르게 생각할 힘을 얻었다.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지금의 속도대로 생각해도 된다고 그렇게 나의 마지막 걸음이 말해주었다. 가만히 발 끝을 내려다보았다. 그 위로 비친 내 그림자가 조용히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