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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립일세 Jul 12. 2023

감자가 닿는 곳에 번영이 있었다.

감자가 닿는 곳에 번영이 있었다.  





    

 도이치 동부에 있는 도시 포츠담에는 로코코양식으로 지어진 프로이센의 여름 궁전인 상수시(Sanssouci) 궁전이 있다. 이곳에 참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묘지가 하나 있다. 일반적으로 묘지를 방문하는 참배객은 꽃을 놓고 가지만 그 묘지에는 꽃은 물론이고 그 외에 독특한 물건을 놓고 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랜 시간 이어져 오다 보니 묘지를 찾는 이들의 관행이 되었다. 묘지 주인은 프로이센의 대왕으로 추앙받고 있는 프리드리히 2세로 사람들이 그의 묘에 놓고 가는 것은 감자다. 프로이센을 신성로마제국을 넘어 유럽의 강국으로 성장시킨 프리드리히 2세는 국민을 배부르게 하려고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프로이센이 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인구가 많아야 한다고 느낀 그는 이를 위해 많은 식량을 확보해야 했다. 주식이 빵이었던 유럽에서는 옥수수나 밀을 주로 심었는데 이런 작물은 강수량이나 온도, 일조량 등 날씨에 영향을 받다 보니 기후가 좋지 않을 때에는 수확량이 적어 먹거리가 부족했다. 그로인해 물가가 오르거나 사회가 불안해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기후의 영향을 덜 받는 식물을 찾다가 선택된 것이 바로 감자다.






 오랜 시간 여러 논란 끝에 페루 남부에 위치한 안데스 산맥의 고산지대가 원산지라고 확인된 감자는 남아메리카의 최대 규모이면서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호수로 알려진 티티카카호 주변의 분지에서 기원전부터 재배되었다고 알려졌다. 다른 작물과 달리 감자는 앞서 언급한대로 자라는데 기후의 영향이 적었다. 극한의 기후인 사하라 같은 더운 지역은 물론 그린란드처럼 추운 지역에서도 감자를 수확할 수 있다. BC3400년경부터 재배한 것으로 알려진 감자는 에스파냐가 남아메리카를 식민지로 만들면서 유럽에 전해졌다. 아무도 감자에 관심을 두지 않을 때 프리드리히 2세가 감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농업혁명의 시작이 아니라 오늘날의 세계사를 만들어온 중요한 흐름의 시작이 된다.






 감자는 남아메리카에서는 잉카라는 제국을 번성시켰다. 그런 위력을 몰랐던 에스파냐는 구교(가톨릭)를 믿는 나라다 보니 땅속에서 자라고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감자를 ‘악마의 식물’이라고 불렀다. 1570년경에 에스파냐로 들어온 감자는 세비야병원의 입원환자에게 급식으로 제공되었었다. 또 하층민이나 노예가 먹는 작물로 취급하면서 동물의 사료로 사용하다 보니 사람들이 감자를 멀리했다. 이후 재배가 잘 이뤄지지 않다가 170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감자가 재배되기 시작하지만 찾는 이는 많지 않았다.  






 에스파냐가 멀리했던 감자는 신성로마제국의 작은 소국으로 간신히 존재하던 프로이센을 부국강병의 나라로 만드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왕위에 오른 뒤 1744년에 대흉년이 찾아와 많은 이들이 굶어죽는 것을 보고 날씨의 영향을 덜 받는 작물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주변의 만류를 무시하고 감자 농사를 권장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감자농사 짓기를 거부하자 프리드리히 2세는 앞으로 ‘감자를 왕족과 귀족만 먹어야 한다’고 공표했다.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실제로 왕실 농장에 감자를 심었다. 그리고 감자를 함부로 가져가지 못하게 경비병을 두고 지키도록 했다. 이 전략은 사람들에게 성공적으로 홍보되었다. 감자가 귀한 재료라는 소문이 돌면서 밀거래가 시작되었고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감자를 농사짓는 사람도 늘었다. 감자 생산량이 늘어난 만큼 국민의 먹거리가 해결되었고 인구의 증가도 이어졌다. 이후 정세의 변화에 따라 도이치란트의 통일 전쟁에서 감자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합스부르크가문의 오스트리아와 전쟁에서 승리하며 프로이센의 존재가 부각되었다. 밀을 생산하던 남부의 오스트리아와 감자를 생산하던 프로이센의 대결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하자 주변 나라들은 감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후 감자는 유럽에서 중요한 식량 작물로 인식되게 된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높은 생산성을 보여주는 감자가 재배되기 시작하면서 유럽의 인구가 급증했다. 생산성이 급증하자 많은 사람이 농업에 종사할 필요가 없어졌다. 남는 잉여인력은 돈벌이를 위해 도시로 이동을 하였고 도시도 점점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도시에 모인 이들은 일자리를 위해 공장에 취업을 하였고 노동비용은 감소하게 된다. 노동인구의 증가는 공장의 증설과 함께 증기기관이라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시너지를 냈다. 감자라는 작은 먹거리가 생산성을 높여주면서 잉여노동력을 늘렸고 도시화를 진행시켰다. 이런 조합이 만들어낸 산업혁명은 유럽의 부흥을 이끌었고 동양 문명을 제치고 세계 문명을 독보적으로 이끄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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