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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 분무기와 부채가 있는 방

행복했던 초록-9

by 마음부자


제법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확 달라짐을 피부로 느낀다.

어느새 춥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 뜨거웠던 여름이 서서히 물러서고 있다.

폭염경보, 불쾌지수, 열대야라는 말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역대 최고라는 타이틀을 많이 가졌던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




그 해 여름도 나에겐 올여름처럼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기억된다.

대학교 시절 유난히 더웠던 해가 있었다.


그때 나는 친구 한 명, 후배 한 명과 셋이서 작은 원룸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방 하나에 간신히 부엌이라 부를 수 있는 공간 하나.

창문은 B4용지 두 장 정도 되는 쪽창 하나.

당연히 에어컨은 물론 없었다.


그 방에서 셋이 여름을 나던 어느 날 더위를 견디기 위해 만든 작전이 있었다.

“야, 선풍기만으론 택도 없지 않냐?”

“그럼 뭘 더 해보자는 거야?”

“분무기랑 부채로 약간 분수쇼처럼 해보자!”

말도 안 되는 듯 들렸지만 실제로 해보니 꽤 효과가 있었다.


우선 셋이서 선풍기 앞에 다리를 모으고 눕는다.

머리는 반대쪽으로.

선풍기를 회전으로 켠다.

한 명은 분무기, 다른 한 명은 부채를 든다.

말 그대로 수동 쿨링 시스템을 가동한다.


부채로 바람을 보내면 선풍기 바람이 배가 된다.

그 바람에 분무기를 ‘칙!’ 하고 뿌리면

마치 여름날 분수대처럼 은빛 물방울이 퍼져나간다.


그 물방울이 피부에 닿는 그 순간!

정말... 짜릿하게 시원했다.


돌아가면서 묵찌빠나 말놀이로 술래를 정한다.

팔이 가장 아픈 부채질부터 정한다.

그러는 와중에도 분무기 발사는 필수다.

묵찌빠도 하고 말장난도 하며 날은 한없이 더웠지만 그 순간에는 즐거운 웃음꽃을 피웠다.

그 더위 속 기억 저편에는 유쾌함과 유대감이 있었던 순간들이다.



지금은?

버튼 하나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그때의 그 시원함, 아니 그 시절의 행복함과는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지금 그 방식으로 더위를 견디라고 하면...

음~~ 절대, 아마 못할 것이다.

몸도, 마음도 너무나 시원함에 익숙해졌으니까.




이런 날엔 그때 그 여름이 더 자주 떠오른다.

우리는 불편함 속에서 즐거움을 찾아냈고 부채나 분무기, 선풍기의 도구로도 시원함을 만들어냈다.


조금은 아날로그지만 그 속에 따뜻한 기억이 숨어 있었던 여름의 한 낮.

이번 여름 우리도 그런 방식으로 더위를 조금은 즐겨보는 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아마도 힘들거라 생각이 든다.

그때와 지금의 온도 차가 극명히 달라졌으니까.

하지만 완벽하게 돌아갈 수는 없지만 가끔 불편함을 허용하고 거기서 의미를 찾아보는 것도

우리가 더워지는 세상에서 균형을 찾는 한 방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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