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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 선 시간 속 아이

멈춰 선 빨강 - 6

by 마음부자

내가 처음으로 스스로를 멈춰 세웠던 순간은
그날 실내화가 날아오던 그 장면에서 시작된 게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날은 그저 그 수많은 ‘멈춤’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의 나는 늘 참는 쪽이었다.


말하지 않고, 울지 않고, 화내지 않고, 묻지도 않았다.

마음속에 들끓는 감정이 생기면 그 감정은 언제나 나를 향해 칼날을 세웠다.
‘왜 그런 걸 느꼈어’
‘그건 네가 잘못한 거야’
‘너무 예민한 거 아냐?’


그렇게 나는 감정조차 스스로 검열하며 자라났다.

반장이 실내화를 던졌을 때 내가 진짜 아팠던 건 이마도 아니고, 머리도 아니었다.


‘왜 나는 이 상황이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걸까’
‘왜 이게 괴로운데 웃는 척해야 할까’
그 물음이 속에서만 맴돌았다.


아무 말도 못 한 나 자신이 너무 작고, 너무 보잘것없고, 너무 미웠다.

그날 그 아이의 시선 앞에서 나는 내가 되기를 가장 원하지 않았던 아무 말 못 하는 아이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게 너무 선명하게 박혀버렸다.

그 기억은 내 안에서 멈췄고,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 후로도 수많은 순간들이 나를 조금씩 멈춰 세웠다.

손들고 싶은데 들지 못했던 질문
억울했지만 참고 넘겼던 오해
울고 싶었지만 웃어야 했던 상황.


그 모든 순간에 나는 내 감정을 멈췄다.
내 목소리를 멈췄다.
나 자신을 멈췄다.


누군가는 말한다.
그건 유약함이고, 그건 성격이고, 그건 어릴 때 잠깐 그랬던 일이라고.

하지만 그런 순간들이 쌓여서 나는 어떤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마음보다
어떤 사람처럼 보이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이 더 커졌다.


무대에 서기보다는 커튼 뒤에 숨는 쪽을 택했고, 질문보다는 동의를 선택했고, 욕망보다는 이해를 가장 먼저 배웠다.

그런 내가 참 오래도 서 있었다.


노란불 앞에서.
그리고 결국 빨간불 앞에서.


그 아이는 기억할까.
아니, 기억 못 할 거다.

그 실내화를 던졌던 것도,
그게 내 머리에 부딪혔던 것도,
내가 당황해 고개를 푹 숙였던 것도.

그 순간은 나만의 정지화면이었다.


그 애에게는 그냥 지나간 장면일 뿐이다.

하지만 내 마음은 그날 이후로 오래 멈춰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멈춰 있던 내 안의 시간이 조금씩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건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이셨던 음악 선생님과의 만남 이후였다.

처음으로 내 목소리를 조금씩 내도 괜찮다고 느꼈던 순간들,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그걸 해보려는 마음이 생긴 건 그 선생님 덕분이었다.


내 얘기를 들어주고, 내 감정을 무시하지 않던 그 한 사람의 존재가 내 안에 오래 켜져 있던 빨간불을
조심스럽게, 하지만 분명하게 깜빡이게 만들었다.


그 기억을 마주한 오늘
나는 조용히 속으로 속삭여본다.

“괜찮아. 그때의 너, 참 잘 버텼어.”


그리고 이제는 그때와는 다른 목소리로 덧붙인다.

“그리고 잘했어. 다시 걸어가려고 마음먹은 너도.”




<이미지 출처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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