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 한가득 익어가는 능금처럼
유수연 <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
버리기 아까워 자꾸만 예쁘다고 보는 것들이 있다. 동산 한가득 익어가는 능금처럼. 능금은 옛날 한국의 사과다. 그걸 알게 된 순간이 내게는 여름처럼 소중하다.
상한 부분을 도려내 서로 건네던 시간이 누구에게나 한철씩 있었다. 그때는 내가 상처를 도려내야 하는 줄 몰랐다. 그럴 때면 이런저런 말이 오가고 "너는 그걸 견디기 힘들 거야."라고도 했다.
살아간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답은 같아도 자꾸만 다시 물어야 했다. 알고 있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그 시큼한 맛조차 견디며 바람은 변함없이 능금을 키워간다.
가을은 늘 찬란한 색으로 세상을 물들인다. 하지만 그 속에서 나는 자꾸만 덧없는 시간에 눌려 숨을 고르지 못한다. 한낮의 햇살은 따뜻하게 내리쬐는데 그늘에는 여전히 차가운 기운이 흐른다. 그 차가움은 마치 내 안에 쌓인 피로와 상처처럼 가을바람 속에 스며든다.
어느 날 헬스장에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문득 고요하고 맑은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게 물든 나뭇잎들이 바람에 흩날리며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내 하루처럼 느껴졌다.
아름답고 기분 좋지만 동시에 허전하고 쓸쓸한 그런 하루. 가을은 마음 깊은 곳을 더 건드리는 계절이다.
저녁에 나는 문득 자신에게 물었다. "나 잘 살아가고 있는 거겠지?"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점점 더 무겁게 느껴졌다. 하루하루가 그냥 나를 이끌었고 나는 그저 그 뒤를 따라가는 기분이었다. 누군가는 이미 내 곁을 떠나 있었다. 나는 그 모든 고독을 묵묵히 바라보며 조용히 지나갔다.
상처는 점점 나를 무뎌지게 만든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나는 상처를 감추었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말을 하지 않는 것이 편한 거겠지. 그저 시간 속에 묻혀 무엇이 옳고 그른지조차 모른 채 살아갔다. 가을은 그렇게 내 안에 스며들어 조용히 상처를 안겨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 상처들을 안고 또 하루를 살아간다.
가을은 사랑의 계절이라고들 한다.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틀린 것 같기도 하다. 스무 살 초반의 연애는 참 예뻤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좋았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조금씩 변해갔다. 그가 내게 다가오는 발걸음은 예전처럼 가볍지 않았다. 그 눈빛도 그의 말투도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사랑은 행복한 순간만 있는 게 아니라 힘든 순간도 있다는 걸 그때서야 알았다. 어느 가을 저녁 우리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바람이 지나가며 가을 냄새를 실어 나르고 나뭇잎들이 천천히 떨어졌다. 그가 말했다. "우리 변한 것 같아." 그 말은 내게 찬 바람처럼 차갑게 스며들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랑이 달라지는 그 순간 상처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깊어졌다.
사랑했을 때 그 감정이 얼마나 진실했는지 알면서도 언젠가 우리가 많이 달라져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이렇게 아플 줄 몰랐다. 이 말속에서 나는 이미 끝을 예감했고 우리는 각자의 길을 걸었다.
사랑은 때로는 멀어지고 그 사랑을 품고 혼자서 길을 떠나야 한다는 현실이 나를 깊은 상처로 밀어 넣었다. 함께했던 가을의 날들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 남아 있지만 이제는 그 모든 순간이 아픔으로 다가온다. 사랑이 끝나는 순간 그 상처는 가을의 차가운 바람처럼 서서히 내 안에 스며들겠지.
연애를 하다 보면 딱히 심각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마음이 떠나는 경우가 있다. 동성 친구 간에도 다른 학교에 진학하고 나면 다른 관심사를 가지게 되고 서서히 연락이 줄어든다.
하지만 예전에 열렬히 좋았던 것이 시시해지기도 하고 취향도 변하듯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인생의 주요 시기마다 목표와 우선순위가 바뀌기 때문에 같이 있고 싶은 사람도 계속 바뀌는 것이다. 나이를 먹고 얼굴 이 변하고 몸이 변화하듯 시간이 지나면서 나를 둘러싼 환경이 변화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무리 친밀했던 사이라도 그 만남이 나를 더는 성장하게 하거나 자극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면 나를 더는 괴롭히지 않고 떠나보내게 된다.
나는 오늘도 헬스장 인포데스크에 앉아있으며 하루를 맞이하는 회원들의 상처를 그저 바라볼 뿐이다. 아침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저마다의 몸과 마음을 고쳐내고 싶어서 이곳을 찾는다. 어떤 이는 피곤한 얼굴로 또 어떤 이는 의욕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문을 연다.
아침 햇살에 졸린 눈을 비비며 "오늘은 꼭 운동해야지." 스스로 다짐하는 그 표정 속에는 이미 각자의 불안이 있다. 그 불안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내가 들을 수 있는 건 그저 단순한 말뿐 그 말 뒤에 숨은 이야기들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도 그들의 하루가 조금 더 나아지길 바라며 조용히 그 시간을 지켜본다.
어느새 저녁이 다가온다. 사람들의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지고 발소리도 조금씩 느려진다. 그날의 목표를 이루지 못한 이들도 있을 테고 이미 몸에 새겨진 땀방울을 닦으며 여유를 찾는 이들도 있다. 대부분은 후자의 표정이다. 시간이 흐르면 누구나 알게 되는 진리 변화는 한 번에 오지 않는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상한 능금을 조심스레 도려내고 그 단면을 내밀고 싶어진다.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무언가가가 있지 않을까. 그 상한 부분을 누군가 알아봐 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 그 작은 위로가 어쩌면 오늘 하루를 견디는 힘이 될 테니까.
오늘도 운동을 마치고 샤워실로 향하는 사람들. 물병을 꼭 쥐고 씩씩하게 걸어 나오는 사람들.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다시 돌아올 준비를 하는 사람들. 그들의 움직임은 빠르고 경쾌하다. 나는 그들 중 일부의 얼굴만 기억한다.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향할 때 그들의 표정은 또렷하다.
내가 그들을 기억하는 것처럼 언젠가는 그들도 나를 기억하겠지. 한 번씩 마주쳤던 눈빛들이 어느 순간 마음 한편에 남아 있을 테니까. 내가 그들의 상처를 고칠 수는 없지만 조금 더 나은 자신을 만나려 애쓰는 그 순간들. 어쩌면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이 나일지도 모른다.
인포데스크에 앉아 내가 할 수 있는 건 작은 서비스와 친절뿐.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선 그들이 자신과 싸워 이겨내는 모습을 응원한다. 조용히 그러나 진심으로.
내가 회원님에게 건네는 "다음에 또 오세요" 한마디가 그들의 마음을 조금은 가볍게 만들고 그날의 운동이 조금 더 의미 있게 남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그들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길 바란다.
그 상처를 고치거나 덮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 흔적 위에 또다시 아픔을 쌓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그저 오늘 하루가 조금 더 견디기 쉬워지고 조금 더 마음 한켠에 행복이 스며들기를 바랄 뿐이다.
맛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입 베어 물고 뱉어내곤 했다. 사랑도 삶도 그저 능금처럼 맛만 보며 살 순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