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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준 Nov 23. 2023

[특집] 그녀와 처음 만난 날

결혼9주년 기념

나는 2011년부터는 카투사들을 훈련시키는 교관을 했다. 도봉산 바로 아래 자리 잡은 Camp Jackson이라는 작은 미군부대에 카투사교육대가 있었다. 모든 카투사들은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기초 군사훈련을 받고 후반기 교육을 받으러 이곳에 온다. 카투사교육대 전체를 관리하는 교육대장으로 새로 부임하신 분은 평택 미군부대에서 임기를 마치고 온 헐크를 연상케 하는 머슬맨이었다.  매일 밤 짐에서 고강도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다. 나도 비슷한 시간에 운동을 했었고, 내 보스이시기에 말씀도 많이 들어드렸다. 불행히도 말씀이 너무 많으셔서 다른 나머지 교관들은 막사에서 내일 새벽부터 있을 일정을 준비하기 위해 들어갔고 나는 운동이 끝나고도 대장님과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게 좋으셨는지 혼기가 찬 나에게 여성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나이 차이가 좀 난다고는 들었는데..


그런데 조금 올드스쿨 방식이었다. 소개받을 여성의 연락처도 알려주지 않고 약속 시간과 장소를 2013년 12월 29일 평택역 스타벅스로 본인 맘대로 정하더니 가라고 하셨다. 사진은 당연히 없고.

그런데 하필 그 시간에 병문안 갈 일로 늦어지게 돼서 대장님께 여성분의 연락처를 요청했다.

젠틀맨이 말이야! 여성과의 첫 약속을 어기게 되었다며 버럭 욕을 한 바가지 먹은 끝에 연락처를 얻어서 급하게 지하철을 탔다. 번호를 추가하고 카톡에서 새로고침을 하니 사진이 떴다. 후드를 쓰고 있어서 어두웠지만 밝게 웃는 얼굴이 예뻐 보여서 일단 안심.


스타벅스에 먼저 도착해 있다가 그녀를 만나고 식사를 하러 장소를 옮겼다. 참 멋이 없었다. 처음 소개팅으로 만난 여성을 그 옆 가까운 푸드코트에 데려가다니. 그리고 새우볶음밥을 시켜주다니. 아. 글을 쓰면서도 화끈거린다.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나이 차이가 9살이 나는 것이다. 댐잇! 올드스쿨 맨 대장님!!

일단 걱정을 하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다행히 어색한 쉼은 없었다. 걱정은, 세대 차이가 나서 나를 너무 말 안 통하는 구세대로 볼까 봐! 그러나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지금도 듣는 이야기지만 난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내 첫 질문이


"신앙의 수준이 어떻게 되세요?" 였단다.


나는 어릴 적부터 크리스천으로서 신앙을 가진 여성을 찾았다. 그것도 독실한 사람. 그래야만 한다고 배웠고 내 가치관 중 나름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나이가 찰 대로 찬 나는 신앙이 없는 여성은 만나서 연애할 필요가 없었다. 결혼상대가 이미 아니니까. 그분의 대답은,


"걸음마 수준이에요..."


오 마이갓! 이렇게 겸손한 대답은 난생 처음이었다. 사실 대장님께 들은 이야기는 그분이 교회에서도 봉사 활동도 열심히 하고 적극적으로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해서 독실하고 신실한 사람이라고 확신한 상태였다.

그런데 저런 험블한 대답을 하다니.  

-지금 보니 험블보다는 팩트-


식사 후 아까 만났던 스타벅스로 다시 이동해서 커피를 마시며 좋아하는 음악이나 취미 등에 대해 이야기 나누며 첫 만남을 마무리했다. 후일담이지만 그때 그녀에겐 그녀만의 사소한 기준들이 있었는데, 나는 그때 손톱이 길어서 바싹 깎고 나갔는데, 마침 손톱이 길면 비위생적으로 보여 기준 미달이었던 그녀였고. 또한 섬유유연제 '다우니'가 당시에 코스트코에만 들어와 있을 시절인데, 내가 특히 향기를 중요시해서 매번 다우니를 많이 넣고 빨래를 돌렸는데 그때 내가 외투를 휙 입을 때 다우니향이 찐하게 났다고 한다. 그게 마음을 사로잡았다나.


우리 관계의 발전에는 그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버지가 그 당시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던 그녀에게 취직을 위한 소개를 해주시면서 경차를 선물하셨다. 집과 거리가 있으므로 차로 통근하라고. 그러나 그녀는 가볍게 취직의 기회를 버리고 교관이라 바쁜 나를 만나러 일주일 두 번 이상 편도 130킬로미터를 그 차로 다녔다.


그리고 처음 만난지 11개월 만에 결혼을 했다.




2014년 의정부
결혼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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