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 눈을 기다리던 시간

by 달을읊다

연의 아비가 전쟁에 징집되었던 해에도 흉년이 심했다. 몇 년 연속으로 흉작이었다. 유독 공기가 싸늘하고 해가 멀어진 것처럼 하늘이 뿌연 날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먹을 것이 별로 없으니 여기저기서 난이 일었다. 이웃 나라라고 흉년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기에 이내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지루하게 이어졌다. 해를 넘기자 민간인들도 징집되기 시작했다. 입춘이 조금 지난 무렵이었다. 연의 아비는 여섯 살 난 연이와 그의 동갑내기 아내를 남겨 두고 추운 국경으로 향했다. 떠나던 날 연의 아비는 아내에게 말했다.


"어차피 먹을 게 없어서 일어난 전쟁이니, 추수할 때가 되면 다시 돌아올 거요. 만약 올해도 흉작이라면 먹일 게 없으니 결국 집에 보내지 않겠소? 그러니 늦어도 첫눈 올 때까지는 집에 올 테니 너무 걱정 말고 연이 잘 돌보고 계시오."

"제 걱정은 마셔요. 국경 쪽은 아직 눈이 온다던데 옷차림 단단히 하고 몸조심하시고요. 하지만..."


연의 아비는 의아한 눈으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내는 그의 손을 잡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얼른 말을 하시오. 시간에 늦겠소."

"만약, 만약에 말입니다. 서방님이... 전쟁통에 잘못.. 되기라도 한다면..."

"... 걱정 마시오, 그런 일 없이 건강하게 돌아올 테니."


연의 아비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의 아내도 먹먹한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밖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동네에 있는 비슷한 연배의 남자들은 모두 전쟁터로 향할 것이다. 연의 아비는 허술한 짐이나마 다시 한번 챙겨 보았다. 그의 아내는 바깥사람들 몰래 누룽지를 뭉친 주먹밥을 그의 품에 넣어 주었다. 아직 따뜻했다. 연의 아비는 방문을 열어, 유달리 피부가 하얀 연이의 이마와 볼을 한번 쓸었다. 새벽녘이라 아직 잠이 깨지 않은 어린것이 찬 공기에 몸을 움츠렸다. 잠꼬대를 하는지 우물대는 작은 입술을 보다 연의 아비는 딸의 어깨까지 이불을 잘 덮어 주었다.


"그러면, 다녀오리다."

"네, 다녀오세요. 조심하시고요."


연의 아비는 마지막으로 아내의 손을 한번 꽉 잡았다 놓았다. 그리고 문을 나서서 사람들 무리에 몸을 묻었다. 그게 연의 어미가 본 남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해도 흉작이었다. 추수철이 지나자 전쟁에 나갔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씩 돌아왔다. 돌아온 사람들은 모두 사지가 멀쩡했다. 비쩍 곯기는 했지만 그래도 집에 돌아와서인지 행복해 보였다. 그런 이들 가운데 연의 아비는 없었다. 다만 이웃집 사람이 연의 아비가 썼다는 편지 한 장을 들고 돌아왔다. 편지에는 생각보다 전쟁이 훨씬 참혹하고, 길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쓰여 있었다. 군량도 충분치는 않지만 워낙 여러 해를 궁핍하게 살아서 조금씩이라도 오히려 끼니는 거르지 않아 좋다고도 했다. 아내와 딸이 보고 싶고, 얼른 돌아갈 날만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편지를 쓰고 있을 때 그는 죽음을 예감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혹시 전쟁에서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면, 시신도 수습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 해 첫눈 오는 날을 제삿날로 삼아 달라고 했다. 그리하여 그 해 첫눈이 오던 날, 사람들은 빈 관을 이고 그의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연의 어미가 이상해진 것도 그 무렵이었다. 관을 묻으면서도 울지도 않고 멍한 얼굴이더니만, 이내 장례를 치른 것을 잊어버린 듯했다. 그리고 눈이 올 때면 만사 내려놓고 하염없이 눈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누가 물으면 연이 아버지가 눈이 오면 돌아온다 했다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 밖에는 웃는 일도 우는 일도 없이 하루하루를 그저 열심히만 살았다. 연이에게는 엄격했다. 아버지는 그저 전쟁이 길어져 돌아오지 못하는 것일 뿐, 돌아오셨을 때 아비 없이 자라 버릇없다는 이야기를 듣게 할 수 없다며 엄하게 키웠다. 하지만 연이는 아버지의 장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미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다. 연이는 여덟 살이 되었을 때부터 어미 대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게 되었다.


열 번의 겨울이 오고 갔다. 여전히 어미는 눈만 오면 망연해졌다. 눈을 바라보고 있는 눈빛은 조금 들떠 보이기도 했다. 연이는 어미 모르게 아비의 제삿날이면 물을 떠놓고 기도했다. 하지만 그런 조촐한 제사상이나마 연의 아비는 그 해부터는 못 받게 되었다. 연이의 사정을 딱하게 보던 동네 사람들이 주선을 하여 봄에 시집을 가게 된 것이다. 어미를 두고 시집을 갈 수는 없다며 사정을 했지만, 연의 어미는 단호하게 나이가 찼으면 혼인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매파에게 좋은 신랑을 구해주어 고맙다고 말을 하면서 그의 어미는 조금 울었다.


연의 어미는 신랑 집에서 서두른다는 말에 봄으로 날짜를 잡긴 했지만 눈이 와야 네 아비가 올 텐데, 했다. 심지어 연이의 혼례날 눈이 온다면 분명 그의 아버지가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 것 같았다. 연이는 10년이 지났어도 아비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미가 처연했다. 눈이 온다 해서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겨울로 혼례 날짜를 바꾼다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다. 연이는 이런 어미를 두고 집을 떠나는 것에 마음이 미어졌다. 그런 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의 엄마는 낮이면 딸에게 다시 한번 한 사람의 아내로, 한 집안의 며느리로 살아야 할 도리를 가르쳤다. 그리고 밤이 되면 장독대 위에 물을 떠놓고 한참 동안을 기도했다.


혼례날을 하루 앞둔 밤이 되어서야 연이는 어미가 무엇을 비는지 알게 되었다. 어미는 연의 혼례날 눈이 와서 남편이 하루만이라도 돌아와 딸의 혼례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연이는 참지 못하고 제 어미에게 울며 소리쳤다. 아비는 이미 10년 전에 돌아가시지 않았느냐고, 이런 어미를 두고 어떻게 시집을 가느냐고. 연이는 통곡했다. 어미는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아냐, 아니야, 어미는 그렇게 고개를 흔들며 장독대 위에 놓인 물그릇만 한참을 보더니, 다시 연이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더니 제 아비가 전쟁터에서 그렇게 고생을 하는데 딸년이라는 것은 죽기만 바란다고 소리를 빽 질렀다. 그리고 창백해진 딸을 내버려둔 채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연이는 마당에 서서 한참을 울었다.


그때였다. 연이의 발이 땅 속으로 밀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허리도 팔도 점점 길어졌다. 연이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발목까지 땅 속에 묻혔고, 동여맨 치마 자락이 바닥에 끌렸다. 그리고 땅에서부터 껍질이 생겨나 연이의 다리부터 천천히 휘감고 번져가기 시작했다. 연이는 나무가 되어 가고 있었다. 어느새 연이의 키는 원래 크기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연이는 이제 나무가 되어 떠날 수 없게 되었으니 언제나 이 자리에서 어미를 지키고 돌볼 수 있겠구나 싶어 안심했다. 혹시라도 아비가 보고 있다면 꼭 어미에게 돌아와 달라 기원한 순간, 연이는 한 그루 벚나무가 되어 더 이상 인간처럼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연의 어미는 다음날 새벽에야 마당에 생긴 커다란 벚나무를 보았다. 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도, 벚나무가 갑자기 생겨나 온 가지에 희고 연한 꽃을 가득 달고 있는 것도 연의 어미에게는 어쩐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만 콩콩 뛰었다. 저 멀리에서부터 무언가 오는 모습이 보였다. 여러 사람이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연의 어미는 벚나무를 짚은채 눈을 가늘게 떴다. 딸이 타고 갈 가마인 모양이었다. 붉고 노란색으로 치장한 그 모습이 어쩐지 낯익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무는 가지를 휘며 꽃잎을 떨궜다. 연의 어미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 눈이 오네! 연의 어미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멀리 오는 가마꾼이 듣기라도 할 것처럼 어-이! 하고 소리를 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여전히 꽃잎은 눈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혹은 눈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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