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 기록을 남기기로 한 이유

<2025년 4월 5일 밤 · 대전병원 특실>

by 부지깽이

거칠고 절박한 필체.

페이지를 가로지른 굵은 선 하나.

그 모든 것이 력의 숨을 서서히 죄어왔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마치 환청처럼, 귓가에 아빠의 목소리가 울렸다.


“…기억해. 무지개는 약속이 아니라, 그들이 남긴 피의 구속이다.”

력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의 눈동자 안에, 희미한 무지개의 잔상이 번지고 있었다.

빗방울은 멈췄지만, 그의 심장에는 아직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같은 시각—

탄, 양헌, 민주 세 사람은 칠흑을 나와 묵묵히 차를 몰았다.

장동 고개를 넘어, 도착한 대전병원.

박규와 박력이 입원해 있는 병실은 별관 맨 윗층 복도 끝이었다.

병실 문을 열자, 력은 이미 침대에 앉아 있었다.

침대 옆에는 윤과 정희가 나란히 앉아 있었고, 윤의 손에는 오래된 수첩 하나가 들려 있었다.


“와~ 빡빡이. 하루도 안 돼 벌떡 일어나 앉다니.”

양헌이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진짜네! 대단한데… 누나가 퇴원수속 하고 올게”

민주도 웃으며 거들었다.

력은 헛기침을 하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이구, 시끄러. 아직 깁스도 안 풀었는데…”

윤이 따라 웃으며 수첩을 탄에게 내밀었다.

“오빠, 이거… 아빠 옷장에서 나온 거야. 그런데 좀 이상해. 엄마는 한 번도 본 적 없다는데… 오빠! 혹시 이 수첩 본 적 있어?”

탄은 수첩을 받아 조심스럽게 살펴봤다.

“이상하다. 아버지 물건이라면, 내가 다 아는데… 이건 처음 보는 거야.


탄의 말에 민주와 양헌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방 안 공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탄이 수첩을 력에게 건넸다.

력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조심스레 수첩을 펼쳤다.

첫 장 다음 장엔 흐릿한 연필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 1972. 4. 베트남, 하이난 거리 쪽 초소.

“자, 다들 앉으세요. 내가 읽어 줄게.”

윤이 컵에 따라준 물을 마신 력이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정희는 규의 침대 옆에, 윤은 력의 옆에, 탄과 민주 그리고 양헌은 병실 가운데 소파에 앉았다.

력은 조심스럽게 수첩 속 글자를 읽기 시작했다.


― 그날도, 무지개가 떴다. 나는 무지개를 저주한다. 내게 무지개는 언제나, 피와 함께 찾아왔기 때문이다.

력의 목소리는 낮게 퍼졌고, 방 안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 그날 장춘동은 초소를 지나, 하이난 거리로 나갔다 돌아왔다. 김정수 일병과 나는 초소 근무 중이었고, 나는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다. 하지만 방아쇠는 움직이지 않았다. 과거는 바꿀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력의 목소리가 끊어졌고, 병실 안의 모두가 잠시 숨을 멈췄다.


윤은 믿기지 않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력을 바라봤다.

“아빠가…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고…?”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고, 민주의 눈빛도 얼어붙었다.

탄은 고개를 숙였고, 양헌은 조용히 허리를 세웠다.

정희는 입을 다문 채 멍하니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력은 수첩을 덮으며 힘겹게 말했다.

“잠깐만… 조금 있다가…”

정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력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김정수 일병은 너희들 외삼촌이야. 내 오빠. 아빠와 같은 소대에 있었어.”

윤은 놀란 듯 고개를 끄덕였고, 정희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규의 수첩은 다음 장이 읽히길 기다리며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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