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 세월을 건너온 '이상한 수첩'

<2025년 4월 5일 밤 · 대전병원 특실>

by 부지깽이

박 윤은 병실 구석 의자에 앉아, 조용히 낮은 목소리로 통화하고 있었다.

“아빠 옷장에서… 이상한 수첩이 나왔다고?”

전화기 너머로 정희의 숨소리가 들렸다.

“응. 못 보던 건데… 지금 가져 가마. 아빠랑 력이는 어떠니?”

윤은 고개를 돌려 병상 위 두 사람을 바라봤다.

“둘 다… 아직 그대로예요. 천천히 오세요, 엄마.”


윤이 통화종료 버튼을 누르고 고개를 들었을 때—

박력의 눈꺼풀이 아주 느리게 떨렸다.

흐릿한 천장 위로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의식은 아직 짙은 안갯속에 있었지만, 현실과 꿈의 경계 어딘가에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무지개…”

쉰 바람 같은 목소리였다.


그 소리를 듣고 오빠에게 달려온 윤이 력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뺨 위로, 한 줄기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오빠, 정신이 들어?”

력은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폐 깊숙한 곳에서 고여 있던 그림자 같은 공기가 천천히 밀려 올라왔다.

세상의 소리는 여전히 멀고, 몸은 모래주머니처럼 무거웠다.

그는 힘겹게 팔을 들려고 했지만, 그 손을 잡은 따스한 손길이 있었다.

윤이었다.

촉촉하게 젖은 그녀의 손바닥이 력의 손등에 닿았다.


“오빠… 괜찮아… 괜찮아, 정말 다행이야…”

울음을 참고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가 가슴 속에 뭉클하게 맺혔다.

그녀의 작은 손이 그의 미간을 쓰다듬고, 뺨을 어루만졌다.

그 움직임은 조심스럽고도 다정했다.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컵을 감싸듯, 잃어버린 시간을 쓰다듬듯.

조용한 병실, 그 속에서 둘의 숨결이 느릿하게 교차했다.

30분쯤 뒤.

정희가 병실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왔다.

택시에서 내려 곧장 뛰어온 듯, 숨은 거칠었고 작은 어깨가 들썩거렸다.

이마엔 땀이 맺혀 있었고, 얼굴은 종이처럼 새하얬다.

그녀는 깨어난 아들을 보고 달려왔다.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였고, 고사리같은 손으로 아들의 이마와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력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말라붙은 입술을 힘겹게 열었다.

“엄마… 아빠는?”

그 말에, 정희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떨리는 숨결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슬픔을 감추려는 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정희가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윤에게 건넸다.

윤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오빠의 가슴 위에 올렸다.


“오빠… 이거, 아빠가 남긴 거래.”

력은 천천히 수첩을 바라봤다.

떨리는 손끝이 표지에 닿았다.

수첩은 군용 다이어리를 닮았지만, 부대 마크도 계급장도 없었다.

빛바랜 카키색 가죽에, 너덜너덜해진 모서리.

중앙엔 낡은 볼펜 자국으로 ‘80’과 ‘83’이라는 숫자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무언가를 감추는 게 아니라, 끝끝내 드러내려는—묵직한 증언처럼.

“아빠 갈아입힐 속옷 꺼내려고 옷장을 열었는데… 정리함 맨 뒤에 있더라.”

정희가 말하며 손끝을 꼭 모았다.

“그런데 이상해. 결혼하고 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수첩이야.

그 말에 윤도, 력도 숨을 죽였다.


종이 한 장, 글씨 한 줄도 함부로 넘길 수 없을 것 같은 기운.

력이 조심스럽게 수첩을 펼치자, 오래 묵은 듯한 기름 냄새가 스치듯 올라왔다.

페이지 사이사이엔 찢기고 얼룩진 메모지 조각들이 끼워져 있었다.

흙인지 피인지 모를 자국, 그리고 바스락거리며 살아 숨 쉬는 기록들.


수첩 안에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 누군가의 목소리가, 조용히 눌어붙어 있었다.

표지를 넘기자, 첫 장에 붉은 펜으로 적힌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 무지개가 뜨면, 사랑하는 이들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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