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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게슬기롭다 Jan 16. 2022

'죽음'도 알고 보면 일하는 중이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단편 모음 <더 레이스>를 보고

두 주인공이 나온다. 하나는 자전거를 타고 도망가는 인간, 또 하나는 그 인간을 죽여야 자신의 목표치를 채울 수 있는, ‘일하는 중인 악마’.

자전거를 타고 요리조리 레이스를 나아가고, 그 뒤를 악마가 따라가지만 영 쓸데없는 사람들만 죽인다. 영 쓸데없는 사람만 죽인 악마의 KPI는 점점 낮아진다.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결국 화가 난 악마는 그 레이스의 끝에 있는 트로피 옆에서 인간을 기다린다. 하지만 인간은 트로피를 가지러 가지 않고, 자신을 목표 지점에서 기다린 아내를 만나고 사랑을 담은 뽀뽀를 한다. 그걸 본 악마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려서, 하던 일을 멈추고 꽃다발을 들고 자전거를 타고 어디론가 향한다.




어디론가 향하는 악마 역시, 자신의 일이 아니라 자신을 기다리는 가족들을 찾아갔을 것이다.


죽음을 수행하는 악마조차 자신의 일보다 가족을 택하는 이야기, 최근에 친구가 감명 깊게 보았다던 영화 < 패밀리맨> 도 문득 떠오른다. 내가 보진 못했지만, 그 영화 속 주인공은 ‘성공을 택할 것이냐 사랑을 택할 것이냐’라는 선택지에 놓인다고 했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과거 20살의 나라면 성공의 대척점에 사랑이 있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소설과 영화가 그러한 관계를 그렸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는 삶, 성공을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업무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삶 말이다. 그렇게 주변인들을 하나씩 포기하고, 그들에 대한 관심을 걷어들이고 나면 성공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실제는 달랐다. 그러니까 성공은, 숨 참기처럼 무언가를 잠깐 동안 참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건 숨 참기 정도였다. 1분 숨 참기를 성공하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과 말을 하지 못하고, 1분에 가까워질수록 숨 참는 행위 외에 다른 나의 주변은 눈에 들어오지 못한다. 그걸 이루고 나서야, 1분을 지난 다음에 다시 숨을 쉬어야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숨 참기만 그랬다. 그 외의 다른 성공들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성공엔 꾸준함이 필요했다. ‘꾸준하게 실행’ 하기 위한 환경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것임을 이제야 깨달았다.


운동하러 가더라도, 내가 아는 사람을 만나 눈인사를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내가 운동이 너무나 재미있는 상황이라면 매일 나갈 수 있지만, 매일 꾸준히 나간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다. 결국 하기 싫은 날에도 그 운동을 나갈 수 있는 어떤 ‘장치’가 필요한데 그때 나를 제외한 타인의 존재는 정말 큰 힘이 된다. 모르는 사람/ 친하지 않은 사람이지만 ‘저 사람도 오늘 나왔네’라는 생각이 오늘의 내 운동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 그 이상인, 사랑하는 친구들이 있다면 어떨까. 공감과 넋두리를 함께 하는 것을 넘어, 같은 것을 보고 비슷하게 생각하고,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내게 잘 맞는 방식으로 이야기’ 해주는 존재 말이다. 내가 이해하는 방식,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들. 나의 의견이 맞지 않는다거나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어도, ‘나와 같은 주어를 사용하여’ 말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라면 나의 생각과 노력을 더 이어나갈 수 있다.


정말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그 존재를 가만히 떠올리기만 해도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를 준다. 그들이랑 더 많은 시간을 오래 보내고 싶어서, 지금 당장을 손해보고(?) 돈도 여유시간도 열심히 만들 미래를 꿈꾸게 도와준다. 지금의 고통을 이겨내고 꾸준히 행동할 수 있게 하는 큰 동기부여가 된다. 주중에 모은 나의 돈과 시간을 주말에 그들과 함께 사용하는 것, 그 행동과 기억들이 뇌에게는 보상이 되고, 더 많은 행동을 강화하게 도와준다. 동기부여가 되는 것이다.


좀 뻔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걸 이제야 알아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성공과 사랑 사이에 무엇을 택할 것이냐, 는 잘못된 질문을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오던 나였다. 이런 내가 바보 같아서 부끄럽기도 하다. 왜 그 두 가지가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리고 왜 주변이 없는 '성공'을 이루고 싶어서 그렇게 전전긍긍하였을까. 그 부작용도 다 알고 있었으면서 말이다.


죽음의 사신도 ‘누군가를 죽이는 행위’가 일이라면서, 그 일과 사랑을 모두 갖기 위해 노력했다. 일과 사랑을 모두 쟁취하려는 그가 훨씬 균형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 죽음이 균형적인 삶을 산다는 말, 너무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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