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만 남기고 갈게
'유토피아 아니면 지옥'
나는 항상 그랬던 것 같다.
어느 때에는
내가 사는 이 곳이
갈등이 전혀 없고 사랑만 가득해야 한다고
온 동네 사랑을 퍼주며
팔랑거리며 돌아다니다
무언가 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주변 사람들과 갈등이 생기면
그때는 주저없이
'이깟 세상 살아서 무엇해, 정말 살기 싫다'의
두 가지 극단의 프레임에서 살아 왔었다.
하루를 보내며
저 두 곳을 수없이 왔다 갔다 하다보면
밤에는 녹초가 된다.
유토피아를 거니는 순간에도
또다시 언제 지옥으로 떨어질까 싶어
조마조마하다.
"엄마, 엄마는 과외하는 언니 오빠들이랑 나 중에서 누구를 더 좋아해?"
딸이 묻는다.
가끔 딸아이는 나의 이런 모순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찔러대서
더 불편한 감정이 들었나 보다.
하루 종일 수업준비를 한다.
과외에 가면 완벽한 수업을 한다.
나 스스로도 만족스럽고
웃으며 나서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면 행복하다.
내가 그들을 만족시켰으며
나는 이로써 살아갈 존재감을 얻는 것 같아서.
그렇게 유토피아를 거닐다
집에 오면 항상 드러 누워 있었다.
딸아이는 나를 닮아 예민한 탓도 있고
사춘기라는 시기를 맞이하여
쳐져있는 내게 항상 요구와 짜증이 많다.
불편했다.
나를 닮은 모습도,
나의 유토피아를 깨는 저 모습들이...
가만 생각해 본다.
나는 어디에 더 많은 애정을 쏟고 살고 있는 걸까?
"나는 학교에서 잘 하는 애들만 보다가
집구석에서 드러누워 자빠져 자는 널 보면 속이 천불이 난다!!"
학교 교사였던 아빠의 말이 떠올랐다.
새엄마와 함께 사는 그 집에서
내가 어떻게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을까,
항상 미간에 인상쓴 주름이 잡혀있고
세상 온갖 슬픔과 어두움을 다 안고 사는 중학생에게 아빠는 저 말을 건넸다.
그런데 나는 아빠와 똑같은 마음이 든다.
과외에서 잘 하는 아이들만 보다가
영어 기본 단어를 힘들어 하는 딸아이를 바라보는 것이 왜이리 힘들지.
그러다 한 장면이 스쳐간다.
잘 키운 과외 학생들이 훌륭한 직업을 갖고 인사를 온다.
나는 정말 이 세상을 잘 살아냈구나 하며 함박 웃음을 짓는데
나를 똑 닮은 딸아이는
미간에 인상을 쓴 채로
나의 위선을 원망하는 글을 어딘가에 쓰고 있을 모습을...
이러면 안되.
내가 이러려고 아이를 낳은 게 아니잖아.
자식을 바라보는 관점도 항상 유토피아 아니면 지옥이었네.
내 마음에 들면 애정을 주지만
내 마음에 안 들면 내가 쟤를 왜 낳았을까로 일관했다.
아이의 사춘기지만
나도 그시절 미처 온전히 마주하지 못한
사춘기에 직면해 본다.
모아니면 도가 아니다.
책을 통해 접한 모든 지식은 나에게 절대적 진리, 도그마가 되어
나의 이성을 지배하고
온 세상은 그에 따라 흘러가야 한다고 환상에 살고 있었나보다.
현실은
부대끼며 살아가고
그에따라 여러 문제들도 생기고 해결해 나가야 하는 상황인데
나 혼자
내가 만든 환상의 세상속에서 살고 있었나보다.
딸아이에게 편지를 썼다.
"너는 엄마와 아빠의 작품이 아닌데 말이야.
너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내주신,
엄마 아빠가 잠시 이 세상에 맡아 놓은 '선물'같은 존재였는데
엄마는 그걸 몰랐어.
엄마가 너무나 몰랐어.
네가 어린아이에서 멋진 어른이 되어 가는 그 멋진 순간을 지나가고 있는데
엄마는 그저 엄마 신경에 거슬린다고 받아주질 않았네.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너무 많이 부족해. 미안하다, 딸아."
딸아이는 앞으로 잘 전진해 나가며 사춘기를 겪어내고 있고
나는 거꾸로
제대로 보내지 못한 시절을 다시 직면해 가고 있다.
폭풍같은 시간을 보내고
모처럼 친구와 통화를 했다.
"hh아, 나는 있지.
그냥 이 세상 사랑만 주다 살고 가고 싶다.
항상 극단적으로 살았는데,
이제는 그저 사랑만 퍼 주다가
죽으면
사랑만 기억되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감정이 북받쳐 뒷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내가... 내가 꼭 너보다 하루 더 살거야.
그래서 너 죽으면 내가 가서 이야기 해 줄거야.
너는 그저 사랑이었다고.
내가 가서 이야기 해 줄 거야..."
친구의 말에
둘은 하염없이 수화기 너머로 울음을 내뱉었다.
이제는 유토피아도 지옥도 아닌
그저 사랑 길만 걸을란다.
온전한 사랑 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