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개월 27일
오랜만에 내 책상 앞에 앉았다. 또 미룬 월요 묵상을 하고 노트북을 열기 위해 우주가 어지른 펜들을 주워 꽂다가 옛 이어팟을 발견했다. 3.5 이어팟 말이다. 서방구가 중고로 얻어준 2015 맥북에 구멍이 있어서 딱 꽂고 재즈 음악을 재생했더니 나는 무적이 되었다. 참으로 만족스러운 새벽 1시다. 그러고 나니 아까 낮에 놀이터에서 잠시 올려다본 나무의 초록빛이 떠오른다. 아름다웠다. 저물기 위해 서쪽으로 기울어진 해가 놀이터를 감싸 안은 나무들을 비추고 선선한 바람이 나뭇잎을 한들한들 흔들고 있었다. 그 풍경은 딱 1년 전에도 본 적이 있다. 마트에 다녀오는 길에 유모차에서 잠든 우주는 8개월이었고 나는 흔들리는 나뭇잎이 너무 아름답다고 느낄 수가 없었다. 조금 쉬려고 벤치에 앉아 그저 멍하니 바라다볼 뿐이었다. 언젠가는 저런 풍경이 마음이 저리도록 예뻤는데 생각하면서. 그때는 마음에 여유라곤 한 톨도 없었는데 지금은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여유가 있다. 다 지나가는구나. 다 겪어내고 나면 겨울 지나 봄이 오듯이 새로운 싹이 나는구나. 그러다 보면 오늘 원 없이 본 잎처럼 푸릇해지겠구나.
다 지나가는 것이 아쉬웠다. 우주가 큰다는 건 내가 관여할 영역이 계속해서 줄어든다는 것이고 몸은 그만큼 점점 편해질 텐데, 너무 아쉽고 그리웠다. 매일 우주를 보낸다고 생각하면 더 서글프고 사무치게 슬플 때도 있었다. 지난 영상과 사진을 봐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순간을 붙잡으려고 셔터를 눌러대며 살았다. 그런데 오늘 좀 다른 생각이 들었다. 우주를 재우려고 같이 침대에 누웠다가 여느 때처럼 잠들기 힘들어하는 우주를 위해 팔베개도 해주고 등을 토닥여주기도 했는데 최근에 한두 번 혼자 누워도 잠이 들던 순간이 기억나서 얼른 팔을 빼고 몸을 일으켜 손만 잡아주었더니 곧 잠에 빠졌다. 품에 안아줘야만 잠들던 우주가, 젖을 물어야만 잠들던 우주가, 내 몸 위를 타고 올랐다 내렸다 결국 배 위에서 잠들던 우주가 이제는 혼자 누워서 잠을 자는 것이다. 낮에 했던 생각도 연달아 떠올랐다. 걸음마도 제대로 걷게 되기까지 참으로 여러 과정을 거친다. 한 발 두 발 떼다가 다섯 발도 떼었다가 그것이 열 발자국을 만들어 낸다. 열 번이 스무 번이 되었다고 말하기 전에 걷기를 마스터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온전한 걸음이 아니었다. 뒤뚱뒤뚱 이상한 모양새로 몇 달이나 걷는다. 그러다가 언젠가 아기의 뒷모습을 보며 '제법 걷네?'하고 생각한다.
새로운 우주가 계속해서 내게 온다. 엄마와 아빠 말고는 할 줄 아는 말이 없던 18개월 초, 이제는 다섯 개 이상의 단어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발달 문항 앞에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한 달 만에 족히 20 단어는 말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오늘은 질문하는 나를 바라보는 우주의 눈빛이 또 한 뼘 자랐다. 유심히 듣고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떼보고 싶은 눈이었다. 또 새로운 우주를 만났다. 나는 아쉽다고 앉아만 있을 게 아니라 얼른 일어나 두 팔 벌리고 나에게 오는 우주를 반겨야 한다. 그래야 우주가 또 자신감을 얻어 그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다. 놀이터에서 바라본 나뭇잎을 보고 1년 전의 나와 우주를 기억해낸 것처럼 매번 같은 계절이 돌아오면 새록새록 그때를 다시 기억해낼 수 있지 않을까. 변하지 않는 사실은, 기억이 나지 않더라도,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이 실재한다는 것.
동탄에서 판교까지 우주와 6003번 2층 버스를 타고 서방구 퇴근시간에 맞춰 버스여행을 했었다. 오가는 고속도로에서 뻥 뚫린 2층 맨 앞자리 창 밖으로 펼쳐진 녹색 파노라마를 눈에 가득 담고 왔다. 그래서 오늘의 일기는 버스 여행기가 될 줄 알았는데. 찰나의 순간에 훨씬 더 쉽게 사로잡힐 때가 있는 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