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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by 김세환

벌써 작년이다. 12월 31일에 나는 광교 푸른숲도서관에 들렀다. 문은 열고 들어갔을 때의 따뜻함은 책을 뒤적이며 뿜어나오는 사각거림과 함께 훈훈하다. 시간이 얼마 없어 급히 들어간 서재에는 자기를 선택해 달라고 애원하는 눈빛들로 나를 괴롭게 한다. 한동안 망설이는 선택받지 못한 그들의 원망을 담뿍 안고 '죽음의 수용소에서(빅터 프랭크)'라는 책을 눈치채지 못하게 나는 조심스럽게 꺼내든다. 새해부터 어두운 책을 읽어야 할까?라고 고민은 했다. 그리고 뒤적거렸을 때 가슴으로 다가온 문장 하나.


"나는 살아 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 수용소를 네 곳이나 전전했다. 거기서 어떤 사람은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즉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 데, 그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음을 알았다.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는 존재이자 행복할 이유를 찾은 존재이다. 주어진 상황에 내재한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써 행복의 이유를 찾아낸다. 그것은 오로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가능하다."


주어진 상황에서 내재한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써 행복의 이유를 찾아내는 '스스로의 의지'가 나에게는 필요했던 것 같다. 이 책을 난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이름 없이 번호로 불려야 했던 사람들, 모든 것은 물자처럼 모자라도 남아서도 안 되는 절박한 사람들의 숫자맞춤, 그 속에서 자행되는 폭력 / 비난 / 권모술수 또한 그 속에서 발휘되는 인간애 등을 자서전적인 체험 수기로 가감 없이 담백하게 담아냈다. 그리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세상의 경험뿐이 아니다. 우리가 그동안 했던 모든 일, 우리가 했을지도 모르는 훌륭한 생각들, 우리가 겪었던 고통, 이 모든 것들은 비록 과거로 흘러갔지만 결코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존재 안으로 가져왔다. 간직해 왔다는 것도 하나의 존재 방식일 수 있다. 그러고 어쩌면 이것이 가장 확실한 존재 방식인지도 모른다."


이 메시지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가 크다. 절박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행복과 불행을 선택할 수 있다. 같은 이유로 우리는 모든 것이 풍족한 현대사회에서의 삶과 자살을 선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감정(喜怒哀樂)이라는 것도 나의 선택의 결과이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감정도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그 순간 멈추기 때문이다. 그가 말했던 삶의 모든 경험과 했던 모든 일, 훌륭한 생각들, 고통들이 나의 존재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살아갈 충분한 이유이다.


2010년 우리 가족은 빅터 프랭클이 수용되었던 독일 뮌헨 근처 다카우(DACHAU) 수용소를 방문한 적이 있다. 반세기가 훨씬 지났지만 그곳의 음습함은 날씨가 좋았음에도 마음을 무겁게 했다. 쇠창살 만든 입구문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노동이 자유를 만든다. (ARBEIT MACHT FREI)" 이것을 믿고 노동하며 수많은 죽음으로 내몰렸던 장소. 자기의 의지가 아닌 감독자의 선택으로 그의 삶이 결정되는 것을 보아온 수많은 수감자들. 그 속에서 살아나 남기 위하여 몸부린치던 비열들. 감독자들의 사디스트. 그가 말하는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몇 년 동안 끌려다니다 보면 결국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사람들만 살아남게 마련이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잔혹한 폭력을 일삼고 도둑질을 하는 건 물론, 심지어 친구까지 팔아넘겼다. 운이 아주 좋아서였든 아니면 기적이었든 살아 돌아온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우리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그렇다고 지금 우리가 그들은 비난할 수 있는가? 그리고 나는 현재 무슨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현재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시장 상황이 좋지 않아서 영업을 하기에 너무 힘들다고, 공장에서 만든 장비의 불량이 너무 많아 우리 제품을 시장에서 외면했다고 이렇게 나를 위로하고, 안되는 것들의 이유를 스스로 만들고 선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좋았던 시절은 한 번도 없었다. 마치 치과 의사 앞에 앉아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누울 때마다 최악의 통증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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