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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도서관 월드 라운지에서 마주한 한국의 책

그림책 한 권에 스며든 유년의 기억, 그리고 책장을 채워가며 느낀 한국의

by 김종섭

도서관에 자주 들르지만, 책장 앞에서 머무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거나,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책을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느릿하게 열람 공간을 거닐다가, ‘WORLD LANGUAGES’라는 이름이 붙은 코너 앞에 멈춰 섰다. 외국어 도서들로 이루어진 작은 섹션, 그 안에 한국어 책도 있었다.

월드 라운지(WORLD LANGUAGES) 부스 전경. 한국어 도서가 두 개 부스로 나뉘어 진열되어 있다

이곳에는 한국책이 두 개의 부스에 마련되어 있었다. 많지 않은 책들 속에서 유독 눈에 띈 두 권이 있었다. 하나는 『왕으로 산다는 것』, 다른 하나는 『대통령의 골방』이었다. 우연히도 두 책 모두 ‘대통령’이라는 단어와 연결되어 있었다.

최근 한국에서의 비상계엄령, 탄핵사건 같은 단어가 머릿속을 오가던 터라, 자연스레 눈길이 갔는지도 모른다.

『왕으로 산다는 것』과 『대통령의 골방』, 두 권의 책

『왕으로 산다는 것』은 역사학자 신병주 교수가 조선시대 27명의 왕들의 삶과 통치 방식을 다룬 책이다. 조선의 리더십을 통해 오늘의 사회에 통찰을 전해주는 깊이 있는 내용이다.

『대통령의 골방』은 이명행 작가가 쓴 장편소설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대통령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말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권력을 가진 자의 고독과 내면의 갈등을 심리적으로 풀어낸 점이 인상 깊다.

책을 들여다보다 보니, 문득 최근 한국 대통령들의 모습과, 그들이 감당했던 무게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 작은 부스, 아직 채워지지 않은 책장의 빈 공간도 함께 떠올랐다.

‘집에 있는 책들을 기증해 볼까’라는 생각이 불현듯 마음속에서 피어났다.

도서관 뒤쪽에는 어린이 전용 열람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솔직히 ‘동화책이 보고 싶다’는 감정보다는, 이곳에도 한국어 동화책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에서였다.

다행히, 이곳에도 한국·일본·중국의 어린이 책들이 각자 한 부스씩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어린이 도서관 내 한국·일본·중국 동화책 부스. 작고 아기자기한 책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책 제목을 하나하나 훑어보다가, 불현듯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동화책 한 권, 제목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억들. 그러던 중 『고무신 기차』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고무신 기차』 그림 동화책

『고무신 기차』는 한국전쟁 중 피난길에 오른 오빠와 여동생의 이야기를 다룬 그림책이다. 고무신을 배처럼 타고 강을 건너고, 기차처럼 가지고 노는 아이들의 순수함이 절망의 시대 속에서도 희망을 품게 한다.

나는 '고무신 세대'다. 아이들은 검정 고무신, 어른들은 흰 고무신을 신었던 시절. 개울가에서 고무신 한 짝을 배 모양으로 만들어 배놀이를 하고, 친구들의 신발을 모아 기차를 만들던 그 유년의 풍경이 선명히 떠올랐다.

그 시절의 향수가, 한 장 한 장 넘기며 손끝에 머물렀다. 열람실 한쪽에서는 몇몇 아이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을 하고 있었다. 한국계로 보이는 아이들이었지만, 그들에겐 『고무신 기차』 같은 이야기가 마치 ‘전설의 고향’처럼 낯설고 먼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지금 아이들에게는 동화책 보다도 게임이 더 익숙하고, 영어로 된 책들이 더 친숙할 것이다. 어쩌면 이 아이들이 『고무신 기차』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절을 살아낸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설명이 함께 필요할지도 모른다.

말 한마디, 혹은 사진 한 장으로 이어지는 그 시절의 증언이야말로, 책 보다 더 살아 있는 교육이 될 것이다.

책을 읽을 공간도, 놀이문화도 많지 않았던 나의 어린 시절. 자치기, 구슬치기, 술래잡기, 땅따먹기 같은 놀이에 빠져 살던 그 시절이었다. 그런 유년의 기억이, 그림책 한 권을 통해 타국의 도서관에서 다시 깨어났다.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이런 기억이야말로, 세대와 언어, 나라를 넘어 우리를 연결해 주는 ‘문화의 고리’가 아닐까.

그래서일까. 오늘 도서관을 거닐며, 유독 고국이 그리운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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