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에 상관없이 일할 수 있는 사회, 은퇴 후에도 사회 구성원으로 살기
오늘 아내와 교외로 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한적한 곳의 맥도널드에 들러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아내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며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맥도널드 직원용 모자와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테이블을 닦고 있었다. 잠시 후 옆 테이블을 닦으러 다가오던 중 눈이 마주치면서 환한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그 순간, 연세가 지긋한 노인분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그분은 일흔 중반이상은 훌쩍 넘어 보였다.
잠시 후, 그 할머니는 매장 청소를 끝내고 카운터와 주방을 오가며 손님을 맞이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그 모습은 느릿하지도, 어설프지도 않았다. 오히려 익숙한 손놀림과 여유 있는 태도에서 세월이 만든 내공이 느껴졌다. 한참 동안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면서 ‘이분은 젊은 시절부터 이곳에 입사해서 잔뼈가 굵은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맥도널드는 젊은 아르바이트생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일터 중 하나이다. 그 나이에 젊은 친구들과 함께 활기차게 일하는 모습이 부럽고도 존경스러웠다. 또한 나이가 들어서도 이곳에서 당당하게 일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회 분위기가, 캐나다에 살면서도 새삼 인상 깊게 다가왔다. 능력이 있고 경력을 존중받는 문화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실 나는 오래전에 캐나다의 직장 문화를 직접 본 적이 있다. 처음 캐나다로 향하던 20년 전 비행기 안에서의 일이다. 탑승 전, 단체복을 입은 사람들이 여러 명 대기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백발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종교단체나 봉사단체에서 온 여행객인 줄 알았는데, 탑승 후 그분들이 항공사 승무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분들 중에는 머리숱이 거의 없는 할아버지, 배가 불룩 나온 중년의 승무원, 머리가 희끗한 할머니 승무원도 있었다. 그들은 젊은 시절 날씬하고 활기찼던 때를 지나, 이제는 세월이 만든 품격으로 승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기내에서 승객을 안내하고 안전벨트를 확인하는 그들의 손길은 숙련된 장인의 움직임처럼 자연스러웠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승무원은 젊고 세련된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캐나다 항공사에서 만난 그분들은 그런 편견을 단숨에 깨뜨렸다. 그때 느낀 놀라움과 감동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이후 캐나다 생활을 이어가면서 또 한 번 놀라운 일을 경험했다. 내가 근무하던 성당에 신자들을 태우고 온 운전자가 있었다. 그분은 무려 84세의 할머니였다. 버스 운전대를 잡은 손은 단단했고, 눈빛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나이가 주는 인상만으로는 버스 운전이 믿기지 않았지만,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소형차가 아닌 대형 버스를 몰고 있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그 순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실감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기회를 열어주는 사회 제도였다. 캐나다에서는 ‘나이’가 곧 퇴직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능력과 의지만 있다면 누구든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이미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있었다. 앞서 말한 승무원 사례처럼 인력 감축이 필요할 때에도 나이 많은 직원이 아니라 신입부터 조정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항공사나 서비스업 현장에서도 노년층 직원이 자연스럽게 일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경력 단절’이 아니라 ‘경력 지속’의 개념이 사회에 스며든 것이다. 그것이 캐나다 사회의 큰 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60대가 되어 은퇴를 하고 보니, 예전에는 단순하다고만 여겼던 일들이 이제는 더 깊은 의미로 다가온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나이’가 벽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부족하고, 눈치를 봐야 하는 현실. 경험보다 나이를 먼저 보는 시선이 여전히 존재한다. 물론 캐나다라고 해서 모든 이가 일할 기회를 보장받는 것은 아니다. 예외도 있다. 하지만 오랜 시간 한 직장에 머물며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만큼의 신뢰와 자리가 주어진다. 그래서일까, 오늘 맥도널드에서 본 할머니의 모습이 유난히 따뜻하고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그분은 ‘나이 들어도 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몸소 증명하고 있었다.
오늘 텔레비전에서 한 젊은이가 철없는 행동을 하는 장면을 보았다.
“저 젊은 친구는 도대체 뭐가 되려고 저러나.” 나도 모르게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러자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요즘 세대는 ‘무엇이 되느냐’보다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하대요.”
그 말이 마음에 남았다. 은퇴 후에도 내가 여전히 세상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아닐까. ‘무엇이 되지 못해도,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한 시대. 그 속에서 일할 수 있다는 건 단순한 생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다시 확인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은 관계이고, 관계는 삶의 온기를 지켜주는 힘이다.
오늘 본 맥도널드의 할머니 직원은 그런 생각을 더 확고히 해주었다. 그분의 손짓 하나하나가 단순한 노동이 아닌 세월의 깊이였다. 오늘 느낀 것은 ‘나이 들어도 세상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것이다. 조용하지만 강한 선언처럼 느껴진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