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반려견과 함께한 하루, 눈빛으로 이어진 마음의 대화
아들은 느지막한 아침, 강아지를 데리고 집으로 찾아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저녁 일곱 시쯤 다시 데리러 올게요.”라는 말을 남기고 강아지를 맡겨두고 나갔다. 아들의 반려견은 아들이 주체가 되어 입양했지만, 결혼 전 함께 살면서 3년 넘게 우리 부부가 돌보면서 키웠기 때문에 정이 깊게 들어 애정도 남다르다.
점심을 먹고 우리 부부는 평소 걷던 산책길로 강아지를 데리고 나갔다. 예전에도 자주 함께 걷던 산책길이었다. 강아지는 산책길이 익숙한 탓에 앞서가다가 수시로 멈춰 서서 우리 부부를 살피고 다시 앞서 나갔다. 몇 년 동안 함께 걷던 산책길에서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가 예전 가을의 기억을 불러냈다.
호수 주변을 돌아 한 시간 반쯤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공을 물고 와 던져달라는 눈빛을 보낸다. 그때마다 그 눈빛 하나에 마음이 녹아내렸다. 눈빛은 언어를 대신한다. 눈동자는 공을 가리키고 있었다. 빨리 공을 던져달라는 신호의 표현이다. 손주는 아직 없지만, 그 모습은 마치 할아버지에게 놀아달라며 매달리는 손주의 모습 같아 보였다. 모처럼 집에 온 터라 짧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놀아주고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몇 시간 동안 계속해서 공놀이를 이어갔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난 후, 강아지는 놀다 말고 갑자기 내가 앉아 있는 소파로 폴짝 뛰어올라 내 옆에 몸을 기댔다. 잠시 뒤 현관문이 열리자 잔뜩 긴장한 채 내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들이 돌아온 것을 이미 발소리로 알아챈 것이다.
강아지는 집에 갈 때마다 이렇게 몸을 움츠리고 버티곤 한다. 예전에는 목줄을 들면 마지못해 따라나섰지만, 오늘은 아들이 현관에서 부르는 소리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아들이 소파까지 와서 목줄을 채우자 그제야 체념한 듯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갔다. 꼭 할아버지 집에서 더 놀고 싶어서 떼쓰는 손주가 부모 손에 이끌려 억지로 집에 가는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이래서 사람들은 이런 감정의 공유 때문에 강아지를 가족이라 부르는지도 모른다. 이런 감정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은 “강아지 행동에 너무 유난 떠는 것 아니냐”라고 할지도 모른다. 사실 나도 반려견을 키우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함께 반려견을 키우다 보면, 설명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 작은 몸 안에 얼마나 많은 감정과 교감이 담겨 있는지 알게 된다.
공원에는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그 광경을 매 순간 볼 때마다 “어떻게 강아지는 사람과 이렇게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연결될까?”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럴 때마다 아내가 하는 말이 있다. “세 살, 네 살 손주가 말대꾸하면 귀엽긴 해도 가끔 밉잖아요. 강아지도 말을 할 줄 알아 말대꾸를 했다면, 아마 사람과의 관계가 지금과 같지 않았겠지요.” 사람 사이도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조용히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더 좋듯이,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요즘은 인간관계에 지쳐 반려동물들에게서 위로를 얻는 이들이 많다.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존재, 눈빛 하나로 마음을 읽어주는 존재.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상처 주지 않는 존재를 사랑한다. 그런 의미에서 강아지뿐 아니라 반려동물부터 시작하여 반려식물까지 인간이 선택한 가장 순수한 가족과 같은 존재감을 가지고 함께 공존한다.
오늘 하루, 아들의 반려견이 남기고 간 따뜻한 체온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눈빛과 마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함께 걸었던 산책길 위에서 나는 다시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