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시대에도 종이 달력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요즘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는 캐럴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음악은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설렘보다 한 해가 끝나감을 먼저 느끼게 한다.
11월이 되면 한인 마트에서는 5만 원(50불) 이상 구매 고객에게 늘 그렇듯 탁상용 달력을 사은품으로 준다. 스마트폰만 열어도 날짜와 시간이 실시간으로 뜨는 시대지만, 책상 위에 종이 달력 하나 놓는 일은 여전히 특별하다.
책상 위 달력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한 해의 전체 흐름을 한눈에 조망하는 느낌이 든다. 어릴 적부터 일력과 종이 달력에 익숙했던 세대에게는 더욱 그렇다. 스마트폰의 달력은 정보를 ‘즉시’ 알려주지만, 손으로 넘기는 달력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해준다.
한국에서는 경기 침체로 인해 예전처럼 사업장에서 사은품으로 달력을 제작하지 않는 업체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새해가 되기 전에 집에는 필요 이상으로 달력이 쌓여 일부는 아깝지만 버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다르다. 달력을 사은품으로 주는 곳이 마트 정도에 한정되기에, 이 작은 달력 하나가 은근히 귀한 ‘연말 선물’이 된다.
예전에는 사은품을 받기 위해 억지로라도 오십 불을 맞춰 계산대에 섰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일부러 추가로 하나를 더 담아 총액을 채웠다. 하지만 요즘은 물가가 너무 올라 필요한 물건 몇 개만 사도 금세 100불 이상이 되어버린다.
오늘 아내는 “달력이 조기 소진될까 봐” 일부러 서둘러 마트에 들렀다. 달력을 받으려고 간단히 장을 본 것뿐인데도 총액이 어느새 80불이 훌쩍 넘었다고 한다. 사은품 기준은 여전히 50불이지만 체감으로는 이미 높은 문턱이 되어버린 셈이다. 머지않아 100불 구매 시 증정이라는 문구가 등장할지도 모른다.
아내가 가져온 2026년 달력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아직 새해까지는 한 달 반 정도 남았지만, 사람들은 11월부터 성급히 다음 해를 준비한다. 그 모습을 볼 때면 설렘보다는 해마다 반복되는 묘한 서글픔이 먼저 찾아온다.
달력 표지에는 ‘병오년 붉은 말띠해’라고 적혀 있었다. 사실 나는 다음 해가 무슨 띠인지조차 잘 모르고 있었는데, 달력 표지 한 장이 새해의 첫 정보를 대신 알려준 셈이다. 우리 세대에게는 음력 생일, 기일, 절기 등이 익숙하기 때문에 음력이 함께 표시돼 있는 종이 달력은 여전히 가정의 필수품이다.
자식 세대는 음력이 낯설다. 그래서 올해부터 나는 내 생일을 태어난 해의 양력 날짜로 기념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부모님 기일만큼은 여전히 음력으로 챙기고 싶다.
그러니 종이 달력을 쉽게 내려놓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책상 위에 2026년 달력을 올려두자 마음이 잠시 복잡해졌다. 표지를 넘기지도 않았는데, 새해가 너무 성급히 다가오는 듯한 느낌 때문일까. 그래도 달력을 하나 받아 들고 나면 마치 새해 365일을 미리 얻은 듯한 묘한 기분이 든다. 그 기분 하나만으로도, 나는 2026년을 조금 더 여유 있게 기다려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