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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냄비’의 퇴장, 캐나다 구세군의 변신

현금 없는 시대,카드 ‘탭’ 한 번에 이웃 사랑 전달하는 디지털 자선냄비

by 김종섭

캐나다의 연말, 언제부터인가 당연히 있어야 할 '빨간 냄비'가 거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낯설기만 한 카드 단말기와 연말의 차가운 날씨를 따뜻하게 데우는 경쾌한 우쿨렐레 선율이다. 동전 한 푼 들고 다니지 않는 '현금 없는 사회'로의 진화가 만들어낸, 기부자마저 잠시 멈칫하게 만드는 이색적인 구세군 풍경이다. 시대의 변화가 주는 간편함에 익숙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누군가를 돕기 위해 정성스레 돈을 꺼내어 직접 내밀던 그 '손맛'이 사라지는 변화에 씁쓸함이 스쳐 지나간다.

12월 셋째 주 토요일, 캐나다의 대형 마트 코스트코는 어느 때보다 쇼핑객들의 활기로 북적였다. 이러한 인파 속에서 문득 한국의 거리에서 들려오던 구세군의 종소리를 떠올려 본다. 그땐 빳빳한 지폐를 몇 번이나 정성스럽게 접어 냄비 속으로 쏙 밀어 넣거나, 주머니 속 동전을 한 움큼 쥐어 기부하며 냄비 바닥에 부딪히는 '땡그랑' 소리가 들려야만 크리스마스와 연말의 분위기가 완성되는 것만 같았다. 장을 보고 나오는 길, 입구에서 빨간 목도리를 두른 할아버지 봉사자 한 분을 만났다. 봉사자는 종을 흔드는 대신 우쿨렐레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120년 전통의 빨간 냄비 대신 등장한 캐나다 구세군의 디지털 기부 단말기. 봉사자가 우쿨렐레를 연주하며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봉사자 옆에는 전통적인 냄비의 형태를 상징적인 모형으로만 남겨둔 채, 실제 기부는 디지털 단말기로 이루어지는 현대화된 모금 방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구세군 특유의 강렬한 빨간색을 입은 세련된 디자인의 단말기는, 현금 없는 시대를 맞이한 자선냄비의 전형적인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tap to give(두드려 기부하세요)'라는 문구와 함께 기부 금액이 적힌 세 개의 버튼이 눈에 들어왔다. $5, $10, $20 중 하나를 선택해 카드를 갖다 대는 '탭(Tap)' 한 번이면 단 1초 만에 기부가 완료된다.

지갑 깊숙한 곳에서 현금을 찾아 머뭇거릴 필요도 없지만, 동시에 잔돈을 털어 넣으며 냄비 바닥에 울려 퍼지던 '땡그랑' 소리가 없어 왠지 기부 과정이 너무 매끄러운 나머지, 정성을 다해 직접 돈을 건네던 그 묵직한 손맛이 빠져버린 듯해 성의가 부족해 보인다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제복을 입고 엄숙하게 자리를 지키던 모습 대신, 인자한 미소로 우쿨렐레를 연주하는 봉사자의 모습은 마치 따뜻한 버스킹 공연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전통적인 냄비의 실체는 모형으로 남겨진 채 풍경 뒤로 물러났지만, 그 아쉬움은 봉사자의 따뜻한 선율이 대신 채우고 있었다.

사실 처음엔 이 현장을 사진으로 그냥 찍기가 미안했다. 문득 몇 년 전 이탈리아 여행을 할 때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전철 안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이를 향해 무심코 동영상을 찍으려 하자, 아들은 "아빠, 그냥 찍으면 안 돼요"라며 나를 만류했다. 예술가와 봉사자에 대한 예의를 일깨워준 아들의 그 말은 지금까지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다.

나는 그 기억을 떠올리며 단말기 앞에 섰다. 10달러 버튼을 터치하고 스마트폰을 갖다 대자, 기계적인 신호음과 함께 기부가 완료되었다. 그러고 나서야 조심스레 사진 한 장을 찍었다. 그때 연주하던 봉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환한 웃음으로 화답해 주었다.

빠르게 카드를 갖다 대는 기계적인 움직임이 지폐를 정성스레 접어 넣던 그 손길의 온기를 대신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그 미소를 마주한 순간만큼은 디지털 신호 너머로 사람의 온기가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100년 전 배고픈 이들을 위해 부두에 냄비를 내걸었던 그 절실한 마음은 이제 디지털이라는 시대를 타고 더 빠르고 투명하게 전달되고 있다. '냄비 없는 자선냄비'. 시대에 맞춰 진화하는 이 풍경 앞에서, 기부의 방식은 달라졌을지라도 직접 돈을 건네며 '땡그랑' 소리를 나누던 그 따뜻한 진심만큼은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숨 쉬고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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