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순간을 지나친 것처럼 그렇게 나의 마흔 살이 지나갔다. 나에게 40대를 맞이하는 시기의 감정은 남달랐다. 어쩌면 거의 모든 이가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은 세월이라는 체취를 등에 업고 먼길을 달려왔다. 오늘 문득 40대가 시작되던 해를 되돌아보았다. 그땐 왜 그리도 40이라는 어감만으로도 우울했는지 모르겠다. 인생의 시작일지도 모를 나이에 삶을 이탈하는듯한 세월의 규칙을 벗어난 느낌이었다.
40살이 되던 그해는, 새해 첫날부터 선택받지 못한 듯한 우울한 시간을 보냈다.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40대를 보낸 시간은 지금까지 살아온 어느 시간보다 가장 멋지고 행복했던 날로 기억한다. 이유를 굳이 설명하자면 어느 정도 가정과 사회의 안정을 가져왔고, 부족하지도 그렇다고 넘쳐나지도 않은 여유스러움이 있었고, 성숙한 삶의 이력서가 매력적이었다. 또한, 희망이라는 것을 일구어 낼 수 있는 가능성 높은 버팀목이 준비되어 있었던 시기 었다.
누군가 내 나이를 물어올 때 흐름의 성장판은 세월에 관계없이 48살에 멈추어 버리기로 했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라는 질문에 " 48살입니다" 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항상 48살로 정체되어 있길 희망했다. 그때는 나이에 대해 누구도 한치 의심의 여지없이 덤으로 한두 살 더 어려 보인다는 후한 만족의 젊음은 나이를 보태어 주었다. 그런 이유로 인해 혹시 자만심이 잔재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땐 세월가도 멈추어선 나이가 부담스럽지가 않았다.
세월 흔적이 훌쩍 10년을 지나쳐 버렸다. 48세에 멈추어 서었던 나이가 결국은 어느 정도의 세월 흐름 앞에 마냥 저항할 수만은 없었다. 거울 앞에 선 모습이 초점을 잃어가기 시작하고 초라해져 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자신감을 잃어가고 아무리 환한 표정을 짓어도 밝아 보이거나 만족해 보이지 않았다.
그 후로 거울을 보지 않았다. 세월에 장사 없다는 말이 있다. 이제 겸허하게 세월 속에 비추어진 내 모습을 인정해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모두가 그리움이고 아쉬움이었을 것이다. 만족스럽지 않은 모습을 보고 타박했던 불과 일 년 전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뽀샵을 하려 해도 자연스럽지 않은 모습, 만족감을 담아 놓을 만한 모습은 없었다. 불만족스러움에 결국 갤러리에서 사진을 떠나보내야 했다. 그나마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몇 장의 사진을 남겨 두었다.
일 년 전 흔적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버려졌던 사진의 모습까지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간다. 매 순간 남아질 것들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으로 흘려버렸던 시간은 반감이 있었다. 초침의 분주한 움직임에도 분침은 느긋했다. 하지만, 느긋함에도 거침없는 약속의 법칙은 정해져 있었다. 참아주거나 기다려주는 일 없이 늘 냉정했다. 내게서 멀어지는 것들을 떠나 버렸지만 떠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내 안에 무심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인정하고 받아 드리는 일이 사치는 아니었는데 늘 게으름의 시간을 보내어 온 것이다.
불과 몇 시간 전 일까지도 이미 나를 떠나버린 과거가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거침없이 내가 전했던 말 까지도 귓가에 담는 순간 망각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려놓으면 편해질 것들까지도 움켜쥐었던 과거의 행적을 떠나보냈다. 무엇인가 얽매인 집착의 삶에 자유를 얻었다.
멈추어 긴 세월을 살아낸 48살의 삶이 허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떠나보낸 48살 이후의 공백의 나이를 다시 찾는 일 , 지금부터 그것을 찾는삶을 살 것이다.
어느 정도 또 시간이 지나면 단 일 년의 시간을 둔 세월의 거리감마저 호사스러운 일일 것이다. 불과 하루가 지난 어제를 보내고 그리워하는 일을 하지 않기로 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보내주는 일이 제일 아름답고 성숙한 삶을 살아가는 행동은 아닐까 싶다.
세월 가면 누구나 먹는 것이 나이인데 세월감에 민감해하지 말고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살아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