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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Jun 23. 2022

우연의 일치

2021









창가에 머리를 부딪쳐 잠에서 깨어나니 낯선 곳에 와있었다. 손목시계를 보니 삼십 분이나 지나 있었다. 재휘는 어쩐지 아쉬움이 들었다. 깜빡 잠들어서 종점까지 갔다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어쩐지 유치해서 재휘는 한숨을 쉬었다. 창문엔 담배연기처럼 희뿌연 원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언제는 그랬지. 네 집이 종점에 있어서 우리는 늘 버스를 타면 맨 뒷자리에 앉고선 잠이 들었잖아. 난 멀미를 잘하는 편인데 너와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선지 멀미를 잘 안 해서 그게 무지 신기하다고 했지. 우리는 이어폰을 하나씩 나눠 끼고선 좋아하는 음악을 들었지. 너는 잔잔한 걸 좋아하고 나는 신나는 걸 좋아했어. 서로 어깨와 고개를 포갠 채로 음악을 들으며 잠이 들었다가 우리를 깨우는 소리에 잠이 깨면, 깊은 꿈을 꾸고 일어난 기분이었어. 종점에 내려선 네가 날 데려다주겠다고 이십 분을 걷고, 다시 내가 널 데려다주겠다고 또 이십 분을 걷고, 언제는 그러다 동 트는 새벽까지 맞이하고선 이럴 줄 알았으면 롯데리아라도 가있을 걸 그랬다고 웃었지만 글쎄, 난 용돈을 아끼는 중이라 주머니엔 햄버거 사먹을 돈도 없었을 거야. 왜냐면 졸업하자마자 너랑 여행을 가기로 했으니까. 부산을 갈까 포항을 갈까 고민하다가 기차를 타고 포항으로 갔었지. 그때 본 밤바다가 아직도 눈에 선한데. 그 결 고운 바람도.


버스에서 내렸을 때 마주한 밤도 꼭 그때와 같았다. 숨을 후 불면 하얀 연기가 나는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밤거리는 번잡하지도 너무 환하지도 않았다. 재휘는 여유롭게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만 이곳의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주소 앱을 따라 걸어가면서는 그런 게 없었어도 감과 눈치로 길을 잘도 찾아가던 시절이 떠올랐다. 지금은 그런 사소한 능력들을 다 잃어버린 것 같았다.


거의 다 도착했을 즈음, 재휘는 코트 깃을 여미고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하느라 걸음이 느려졌다. 재휘는 가로등 아래서 가방을 뒤적거렸다. 담배를 찾았지만 라이터가 보이지 않아서 짜증이 났다.


“왔어?”


온영이 서있었다.


재휘는 말없이 그에게서 라이터를 받아 담뱃불을 붙였다.


“여기.”

“너 가져도 돼.”


온영은 형광펜처럼 생긴 전담을 피웠다. 동그랗게 입을 모아서 하얀 도넛 모양의 연기를 내보내는 묘기를 했다.


“잘하지?”

“어.”

“…….”

“…….”

“들어가자.”

“그래.”


온영이 먼저 들어가고, 재휘는 마저 꽁초를 만들고는 불을 비벼 끄고 안으로 들어갔다.  



  





“김재휘!! 이게 얼마만이야?”


저를 반가워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싶었는데. 재휘는 저를 반겨주는 범진에게 무척 고마워서 먼저 손을 내밀었다. 우리 사이에 무슨 악수냐면서 범진은 재휘를 얼싸안았다. 재휘는 자리를 두리번거리다 제 손을 잡고 이끄는 범진의 옆에 앉았다.


“내가 좀 늦었지?”

“아냐. 우리도 온지 별로 안 됐어. 너 뭐 시킬래?”

“너넨 먹었어?”

“먹고 있지. 야, 메뉴가 드럽게 늦게 나와가지고 배고파 죽는 줄 알았어. 너도 얼른 시켜.”


재휘는 범진의 옆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범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었다. 늘 사람들을 챙겨주고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면이 투명하게 보였다. 그와 반대라면 아마, 온영일까. 마침 자리도 반대편에 있었다.


“김재휘, 왜 이렇게 늦었어.”


재휘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밖에선 무뚝뚝하더니 안에선 왜 그렇게 편하게 구는 걸까. 하지만 온영 때문에 모인 날에, 온영과 조금이라도 틀어지는 모습을 보이는 건 좋지 않을 걸 알기에 표정 관리를 했다.


“내가 여기 초행이라, 좀 돌아가는 버스를 탔어. 그러게 왜 이렇게 먼 데를 잡았어?”

“그럼 내가 오늘 주인공인데, 내가 오라는 데로 와야지. 말이 많네 김재휘. 한 잔 받어.”


재휘는 온영을 쬐려보면서도 냉큼 온영이 내민 잔을 받았다. 빨리 취하는 거 알면서 왜 이렇게 잔을 꽉 채워서 준담.


다른 친구가 거들었다. “그러게! 내가 알려준 걸 탔어야지! 왜 이상한 걸 탔냐고.”

“미안하다고.”

“미안하면 원샷해.”

“야, 인간적으로 오백을 어떻게 원샷하니?”


오랜만에 만났지만 다들 걱정했던 것보다 분위기도 편하고 즐거웠다. 다행이었다. 지난 일 같은 건 굳이 들춰내고 기분 잡치게 만들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재휘는 7년 만에 만난 동창들과 3년 만에 만난 온영의 사이에서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에도 앞에 보이는 온영 때문에 절대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

“일하지 뭐.”

“어떤 일 하는데?”

“그냥 가구대리점 하고 있어.”


범진의 친절은 고마웠지만 오지랖은 그다지 이롭지 않았다.


“아, 그래? 잘됐다. 그럼 온영이 혼수 재휘네서 하면 되겠네.”

“…….”


그때 티비로 나오는 배구경기를 보면서 떠들고 있던 온영의 시선이 다시금 제게로 닿자, 재휘는 당혹스러웠다.


“우리 새신부님, 어떻게 생각해? 이왕 할 거 친구한테 매출 올려주는 게 좋지 않겠어?”


온영은 들고 있던 잔을 부드럽게 비우고는 미소 지었다.


“그럼, 나도 좋지. 재휘야, 명함 한 장 줄래?”


재휘는 온영에게 명함을 건네주었지만 어쩐지 찝찝했다. 지금, 자신이 이곳에 오기까지 망설임과 후회와 고뇌가 뒤섞인 채로 하던 모든 상상 중에서, 가장 최악의 것이 현실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때는 더 최악이 무엇인지는, 감히 알지도 못했다.  



 




 

“야, 김재휘.”

“…….”

“취했냐?”


오랜만에 술모임에, 지나친 긴장 탓에 도리어 속이 꼬여버린 게 문제였다. 재휘는 속을 한 번 게워냈지만 아직도 머리가 핑핑 돌고, 저밖에 가눌 수 없는 제 몸뚱이가 쌀 포대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집 근처지, 온영아?”

“어어. 내가 얘 챙길게. 잘 들어가.”


재휘는 온영이 저를 부축하는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주억거리는 고개를 겨우 쳐들고선 누가 저를 낑낑 대며 어디로 데리고 가나 싶어 옆에 있는 온영을 쳐다보고도 아무것도 이상하다 느끼지 못했다.


“어디 가…?”

“우리 집.”

“우리 집…?”

“다 왔어. 좀만 가면 돼.”

“…….”

“넌 진짜…. 바보인 거야 길치인 거야, 아님 둘 다야?”


온영이 한숨 쉬듯 하는 말도 재휘는 알아채지 못했다.


여기서 좀만 가면 네가 그렇게 밥 먹듯이 드나들던 골목이잖아. 기억 안 나? 재휘는 타이밍 좋게, 의식도 없이 고개를 길게 저었다. 온영은 안 본 새에 왜 이렇게 무거워졌냐고, 구석진 길바닥에 가래침과 함께 쌍욕을 뱉으면서도 든든하게 재휘를 데리고 집에 들어갔다.


“아악!”


거실바닥에 내팽겨 쳐져서야 재휘는 조금 정신이 들었다. 날개뼈 아파, 씨잉. 재휘가 눈물 맺힌 채로 쬐려보자 온영은 헛웃음을 쳤다.


“여기까지 들고 와준 게 누군데 어디서 적반하장이야?”

“곱게 내려놔줄 수 없었냐?”

“어. 너 무거워 죽는 줄 알았거든.”


나쁜 년…. 말이라도 곱게 해주지. 생각하던 재휘는 그런 걸 바랄 게 못 되는 사이라는 걸, 까먹었다는 사실에 사소한 자책이 들었다.


“먼저 씻는다? 오바이트 하지 마라.”


온영은 그렇게 말하곤 욕실로 들어갔다.


재휘는 다시 바닥에 대 자로 누워, 차라리 잠이라도 들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며 눈을 감았다. 제발, 제발. 이미 깨어버린 술과 달아나버린 잠기운은 아무리 눈을 감고 그 깊은 어둠을 헤저어도 잡히질 않았다. 염병하네 진짜. 포기하고 눈을 떴다. 익숙한 전등이 달린 하얀 천장과 커튼이 보였다. 둘 다 가구거리를 돌아다니고 발품 팔아서 골라 산 것들이었다. 6년 전, 온영이 이 집에 이사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어쩜 한 집에서 이렇게 오래 살 수 있을까. 그것도 월세면서. 전등은 하얀색에 구름 모양이었다. 너무 귀엽고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질 것 같다는 생각에 골라줬건만 온영은 왜 유치한 걸 고르냐면서 저를 비웃었다. 그래 놓곤 제가 골라준 걸 사는 온영도 참 너무했었지. 커튼은 상아색 바탕에 연보라색 샐비어와 초록잎이 세밀화로 그려진 패턴이었다. 그건 온영이 고른 거였다. 이제 보니 둘이 정말 안 어울리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이제 와서.


잠시 눈을 감고 있었더니 온영이 다가와서 저를 발로 툭, 건드렸다.


“자?”

“아니.”

“씻고 자라. 우리 나이에 양치 빼먹으면 이빨 나간다.”

“알았다고.”


재휘는 투덜거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얼마 안 있어 문 바깥에서 온영이 ‘앞에 갈아입을 옷 놔둘게’하는 말이 들렸다. 그 목소리는 금세 욕실 안을 가득 채운 수증기를 타고 제 귓가로 울려왔다. 재휘는 양치하다 말고 가만히 서서, 문득 제가 지금 뭘 하고 있나 회의감이 들었다. 변기 옆에 물기 잘 빠지라고 세워둔 플라스틱 욕실화를 신고선 벽에 걸어둔 고무줄이 잔뜩 늘어진 헤어밴드로 이마를 두 번 감고, 양손을 비벼서 거품을 내는 버릇 때문에 홀쭉해진 비누로 똑같이 거품을 내서 손을 씻고, 욕실 장에서 새 칫솔을 꺼내고, 그렇게 너무도 자연스럽게, 익숙한 자신의 모습들을 재생하고 있지 않은가 싶은 것이었다.


정신 차리자고 찬물로 세수를 하고 나왔건만 온영은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었다.


그 광경마저도 어찌나 익숙한지, 재휘는 잠시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왜 그러고 서있어? 똥 마려?”

“아니.”

“휴지 베란다에 있잖아.”

“…….”


아직도 술빨이 센지, 온영은 혼자 2차로 복분자를 마시고 있었다. 재휘는 쭈뼛거리며 거실로 와서 온영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씻는 동안에 벌써 병을 반이나 비운 온영은, 그가 이 집에 오면 늘 입었던 병아리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와 면바지를 입은 채 뻘쭘하게 서있는 재휘를 보고선 심드렁하게 물었다.


“왜?”

“…나 어디서 자야 돼?”

“방에서 자든가.”

“너는?”

“난 좀 이따 잘게.”

“…….”

“왜. 또 뭐.”

“…….”


그 순간 재휘는 정말 서온영이란 인간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뭔가 화가 나기도 하고, 가뜩이나 속도 안 좋은데 가슴도 답답해서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아 뭔데!!”


갑자기 온영은 소릴 빽 질렀다. 온영은 말을 할 때 안 하고 어디 꽁쳐놨다가 나중에 슬그머니 꺼내는 걸 제일 싫어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때그때 하란 말이야. 이러니까 내가 너랑 하루에 네 번 면전에 쌍욕을 하고 여섯 번 울고 여덟 번의 이별을 한 거 아냐.


반면 재휘는 황당했다. 그냥 평소의 뚱한 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왜 화를 내고 지랄인지.


“날 여기 왜 데려왔어?”

“그럼 네가 길바닥에서 동사하게 내버려두는 게 좋았겠어?”

“아무리 그래도!…… 여길 오면 안 되지 내가.”

“…….”

“…….”


침묵이 흐르는 게 왜 어색하게 느껴질까. 이미 지난 우리 사이에는 침묵이 더 당연해야 하는 거잖아.


“안 될 게 뭐가 있어.”


또 그랬다. 이번에도 역시나. 재휘는 매번 싸울 때마다 자신만 감정이 복받쳐 열을 내고, 정작 온영은 늘 저렇게 냉담해지는 것이 가장 싫었다. 못 견디게 싫었다. 제게 솔직해지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은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질 않았다. 그게 얼마나 답답했는데. 그런데 우린 왜 또 이러고 있니.


재휘는 답 없는 싸움은 진작 끊어냈으니 더 이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긴 했지만 그래도 침대에 누워서 편히 잘 수는 없어서, 벽에 기댄 채로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빨라진 호흡을 가라앉혔다. 시계를 보니 두 시 반이었다. 세 시간만 기다리면 첫차가 있을 테니 잠들지 말고 기다리기로 작정했다. 잘 때 빛이 한 줌이라도 드는 게 싫은 온영이 두꺼운 커튼을 쳐놓은 덕분에 방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밖엔 온영이 틀어놓은 티비 소리만 들렸다. 온영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술이나 홀짝거리며 예능을 보고 있는데, 자신은 이런 사소한 모든 것들이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어서…. 예전엔 아무렇지 않았던 것들이 이제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 되어버려서…. 조금 눈물이 났다. 나도 좀 쿨하고 싶었는데. 그래서 오늘 큰맘 먹고 온 건데. 재휘는 입술을 깨물었다.


숨죽이며 훌쩍이고 있는데, 온영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왜 이러고 있어? 지지리 궁상을 다 떠네 진짜….”

“…….”


온영은 훌쩍훌쩍 울고 있는 재휘에게 다가와선 몸을 숙이고 앉았다.


“너만 아무렇지 않은 거 아냐. 그런 척하는 거지.”


그리고 재휘의 볼에 흐른 눈물을 닦아주며, 눈을 맞췄다.


재휘는 그제야 모든 걸 조금씩 후회했다. 여기에 오지 말걸. 취하지 말걸. 애초에 오려고 생각도 하지 말걸. 그리고…… 너 없이 난 아주 멋지게 잘 살아간다고 자부하면서 허세 부리지 말걸. 이렇게 마주보고만 있어도, 눈물이 나잖아. 쪽팔리게.


“잠이 안 와?”


재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온영은 거실로 가서 복분자병을 들고 왔다.


“그럼 이거 마셔. 도수 쎄 가지고, 빨리 취할 거야.”


재휘는 울음을 그치곤 온영이 주는 대로 잔을 받아들고 마셨다. 온영의 말대로 그 술은 정말 진하고 셌다. 정말 달고 맛있는데, 목으로 넘기기만 해도 따끔따끔하게 느껴졌다.


“미안해.”


잠결에 들은 말이 왜 그런 종류였는지. 재휘는 온영과 빈틈없이 끌어안은 채로 생각했다. 다신 그런 말 안 하기로 했잖아.


이미 벌어진 틈을 좁히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다음날 재휘는 제 자신에게 짜증이 나 미칠 것 같았다.


“깼어?”

“나가!!”


그래서 대신 온영에게 역정을 부렸다.


원래 같았으면 온영은 왜 제게 짜증을 내냐고 뭐라 했을 텐데, 이상하게 온영은 더는 그러지 않고 있었다. 도리어 적응 안 될 만큼 착한 짓을 하고 있었다.


“얼른 먹어. 식겠다.”

“…….”


세상에. 서온영이 끓여준 해장국이라니.


재휘는 반신반의하며 국물을 한 숟갈 떠먹었다. 맛은 꽤 괜찮았다.


그렇게 둘은 얼마간 아점식사에만 집중했다. 온영이 꺼내둔 반찬은 국과 멸치볶음뿐이었지만 재휘가 곱씹는 반찬은 그것 말고도 더 있었다. 바로 둘 사이의 어색한 공기와 집안에 맴도는 온영의 체취와 익숙한 느낌, 벽에 걸린 다이소 방향제에서 풍겨 나오는 섬유유연제 같은 냄새, 복잡한 머릿속에서 하나둘씩 튀어나오는 그런 상념들이었다.


“넌 어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재휘가 그렇게 물어도, 온영은 그것마저도 아무렇지 않은 듯 굴었다.


“그런 척하는 거라니까.”

“지금도?”

“어.”

“그래?”


재휘는 웃음을 흘리며 빈정거렸다. “하긴, 우리 끝난 지가 언젠데. 더 얘기할 게 뭐 있겠어.”


“아니.”

“뭐가 아냐?”

“너 데려온 거, 사실 좀 의도한 거였어.”


온영이 느닷없이 너무 진지해서 재휘는 놀랐다.


“…뭐?”

“그래서 지금 너 잡아보려고.”

“…….”

“우리, 이젠 좀 솔직하자. 다시 보니까 좋잖아.”

“…….”

“넌 어때?”


온영은 바쁘게 움직이던 숟가락도 내려놓고 재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에도, 너무나 익숙하고 사소했던 그 순간에도 재휘는 의심밖에 하지 못했다. 우리가 이래도 되나. 만났던 8년이란 시간보다 지나온 3년이란 시간이 더 길고, 더 크고, 더 가볍게 느껴졌었는데. 그 시간은 감정의 부피를 불려주었고 그래서 더는 감정의 역사를 무겁게 느끼지 않게 해주었고, 제가 이전의 그 어떤 누구도 아니라 새로운 자신이 될 수 있도록 해주었는데.


재휘는 망설였지만, 온영이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5년 전이든 3년 전이든, 지금 이 순간이든, 온영은 저를 똑같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싸우고 싸워도 아침에는 함께 밥을 먹었었다. 그래. 그게 너였고, 나였고, 우리였지. 그 우리 안에 있는 우리는 언제나 든든할 것만 같았지.


그때를 생각하면 어떤 것도 아직은 빛이 바래진 않았지만, 혹시 잠시라도 꺼냈다가는 바래질까 봐 겁이 나서 꺼내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우린 다시 만나도 또 헤어질 거야.”

“그럼 또 만나면 되지.”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우리 사이엔 이제 아무것도 새로울 게 없는데.”

“…….”

“다 먹었지?”

“어어.”


재휘는 그릇을 들고 싱크대에 넣었다. 다 헤진 수세미가 그대로 있는 걸 보고 어이가 없었다. 쓰지도 못하는 걸 왜 아직도 여기다 두고 있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 초록색 하트 모양의 수세미에 눈을 고정한 채로 설거지를 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안고 있자.”

“지랄하네.”


속으로만 하려고 그랬는데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온영이 등에 볼을 댄 채로 푸흣, 웃는 게 느껴졌다.


“그럼 우리가 언젠가 한 번만 더, 이렇게 만나면 그때…… 그때는 다시 생각해보자.”

“…….”

“한두 번은 우연이라도 세 번부터는 우연이 아니랬어.”


재휘는 그런 무거운 말을 들었는데도 전혀 기분이 무겁지 않아서, 그제야 편하게 웃음이 나왔다. 누가 그래? 우리 엄마랑 동생이. 걔는 그래서 삼수 했냐? 야 삼수생이 어때서. 너 지금 내 동생 욕했냐. 아니 그냥 삼수했냐고 물어봤는데. 오랜만에 재잘재잘 떠들기도 했다. 재휘는 반찬이 더 많았으면 좋았을걸,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팔꿈치까지 닿도록 하얀 거품이 몽글몽글 피어있었다.  



 




 

한낮의 버스는 잠시 정체된 구간을 뚫고 시원하게 달렸다. 덕분에 살짝 열어놓은 틈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버스를 타고 있으면 이상하게 잠이 잘 왔다. 커서 달라진 점들 중 가장 긍정적인 게 아닐까 재휘는 생각했다. 이를 테면 매운 걸 잘 먹게 된 거나, 암산을 잘하게 된 것보다도.


웨딩홀은 어찌나 건물이 높은지 정류장에서 봐도 한 눈에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저렇게 큰 건물을 어떻게 유지하나, 세가 몇 천은 할 것 같네, 한 달에 오백 쌍은 결혼해야겠는데 하는 현실적인 생각을 하면서 웨딩홀 건물로 걸어갔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괜히 심술이 났다. 왜 하필 이런 날에. 게다가 자신은 어찌나 빼입고 왔는지. 신경 써서 입은 티를 안 내려고 애를 썼는데 그래서 더 신경 쓰고 온 티가 나는 것 같았다.


재휘는 한숨을 쉬고 로비로 들어갔다. 1층부터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벌써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너무 늦장을 부렸는지, 1시가 넘어있었다. 당황한 재휘는 헐레벌떡 웨딩홀로 뛰어갔다. 숱하게 들어오는 청첩장에서도 가장 받기 싫은 청첩장을 제게 준 사람의 결혼식인데, 왜 순간 저도 모르게 애가 탄 듯이 달려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쩐지 그 이유를 금방 알 것도 같았다.


신부 대기실에 들어가니 벌써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옆과 뒤를 가득 채워 선 친구와 지인들 가운데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앉아있는 사람이 너무 눈부셔 보였다. 재휘는 그만 우뚝 멈춰버린 채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 저도 모르게 달려온 이유, 그리고 자신의 역할은 오직 그것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어! 왔어?”


그가 눈물 나게 반가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시작 안 했나 보네.”


실은 그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곧 시작한다는 직원의 말에 그를 둘러싸고 있던 모두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하지만 재휘는 그의 손에 붙들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늦었다고 뛰어온 거야? 왜 이렇게 땀이 났어.”


온영은 레이스 장갑을 낀 손등으로 재휘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그게 뭐라고. 대체 뭐라고. 재휘는 온영의 어깨를 잡고 키스하고 말았다.


어쩌면 그런 키스는 처음이었다. 절박해서 가슴이 뛰고, 절박해서 아팠다. 함께 달리다가 몸은 멈추었는데도, 혼자선 아직도 뛰고 있는 심장이 아프게 느껴지는….


“그때처럼, 놔주는 거 아냐.”


재휘는 온영의 얼굴을 감싼 채로 흔들리는 마음의 초점을 맞췄다.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솔직해지고 싶었어. 더 늦으면, 앞으로는 어떤 다음도 없을 걸 아니까.


온영은 미소 짓고 있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려주지 않은 채. 하지만 너무도 바라보는 사람을 가슴 뛰게 하는 미소를.


“재휘야.”


재휘는 온통 새하얘서 오래 바라볼 수 없을 것 같던 온영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온영은 곧 그렇게, 새하얗게 사라졌다.


우연을 만드는 건 시간도 운명도 아니었다. 우연은 우리만의 비밀로 이루어진 순간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어쩌면 제가 온영을 만나기도 전부터, 아주 오랫동안, 그를 사랑하고 난 기분이었다. 그도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언제나 똑같은 마음으로 사랑할 수는 없겠지만, 이렇듯 이어져있으면 마음의 접점들이 늘어날 테니까.


잠에서 깨니 햇빛은 더 쨍쨍하고 버스의 그림자는 선명해 보였다. 볼에 뭐가 달라붙은 것 같아 손으로 떼어냈더니 무당벌레였다. 얼른 바깥으로 내보내주고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셔츠를 걷어내고 시계를 확인했다. 어느 봄날의 따스한 아침이었다.


긴 꿈을 꾸고 일어난 기분은 나른하고 멍했다. 재휘는 창가에 찧던 머리를 바로하고 허리도 곧게 폈다. 안내방송은 전전 정류장을 알려주고 있었다. 다시 잠에 들면 안 되는데, 연달아 하품이 나왔다. 눈가엔 눈물이 맺혔다. 두어 번 감았다 뜨니 제게 쏟아지는 햇살이 미세한 파편들처럼 보였다. 끝이 날카롭지만 너무 작아서 저를 다치게 할 수 없는. 그 눈부신 햇살은 지나온 날들 중 여러 조각들을 쉽게 잊게도 했고, 잊지 못하게도 했다.

오늘 온영은 결혼을 하겠지. 지금쯤이면 식을 올리고 있겠지.


재휘는 보고 싶지 않았던 것들을 꿈속에서 본 것이, 도리어 자신의 간절한 바람이었다는 걸 느끼고는 자조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하늘은 더욱 맑았고 여기저기에 선명한 그늘을 만들었다. 시간도 그렇게 흐르는 것 같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온 세상을 바꿔놓기도 하고,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것처럼 붙잡아두기도 하는.  


 





 

어두운 매장에 불을 켜고 음악을 틀어두면 하룻밤 새에도 먼지가 슬어있는 가구들도 식물처럼 활기가 생기는 듯 보였다. 재휘는 지난 전표를 확인하고 매장 문을 활짝 열어놓고 영업 준비를 분주하게 시작했다. 걸레로 매장 바닥을 구석구석 닦고, 먼지가 슬어있는 가구들과 전등갓 위를 깨끗이 닦아주었다. 거리엔 아침부터 바쁘게 오가던 트럭들이 새 가구와 자재들을 열심히 실어 나르고 있었다. 재휘는 잠시 바깥에 나온 옆 매장 사람과 얘기를 나누다가도 전화가 울리면 바로 매장으로 들어왔다.


전화기를 붙든 채 주문서를 찾느라 눈과 손이 바쁜 와중이었다. 저기요,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데스크에 앉아있던 재휘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을 하면서 일어나다가,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본 것처럼 놀라고 말았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새하얀 정장도 드레스도 아닌 편안한 캐주얼의 차림으로 매장을 두리번거리다가, 저를 보고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재휘는 곧 다시 연락드리겠다고 말하고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여긴 어떻게…… 오늘 결혼식 아니야?”


재휘는 긴장한 채로 온영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파투 냈어.”

“뭐?”


온영은 퍽 태연한 듯 매장을 둘러보면서 여기 괜찮네, 하다가 침대에 앉았다. 정작 재휘는 너무 놀라서 얼떨떨한 채였다.


“걱정 마. 쌍방 합의였으니까.”


누가 지 걱정한다고. 재휘는 예의상 차라도 내줄까 물으려던 걸 관뒀다.


“대신 앞으로 명절에 갈 데가 없게 생겼지만. 뭐 난 원래 명절에 어디 가는 거 싫었으니까 차라리 잘됐어. 앞으론 여행이나 좀 자주 다닐까봐.”

“그래, 긍정적이어서 좋겠다.”


그나저나 여긴 왜 온 거야?


묻고 싶은 건 그건데 왠지 쉽게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웃고 있는데, 그게 아닌 게 너무 훤히 보여서.


그런 표정을 짓는 건, 드물게 봤었다. 온영은 늘 밝은 척을 하니까. 사람은 누구든 밝은 면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고. 몸 바깥에 늘 그림자를 갖고 있는 것처럼 몸 안에도 그림자가 있다고. 그를 더 알고 싶어서, 더 많이 알고 싶어서, 그렇게 말했었지만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알겠다는 대답을 믿을 수 없던 건 아마 그때부터였을까. 밝은 낯을 보고도 그가 정말 기쁜지 행복한지 믿을 수 없던 것도. 자신은 모든 걸 다 보여주고 싶었다. 바깥에서 받은 상처든, 어렴풋이 갖고 있던 기억이든, 제때 돌보아주지 않아 아직도 제게 남아있는 어린 자신이든. 하지만 온영은 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제게는 잘 다듬은 것만, 말이 되는 것만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그만큼 저를 사랑하기 때문이란 건 알았지만….


이제는 그 표정 아래 깃든 마음까지 다 보이는 것 같지만, 그래도 재휘는 온영이 제게 확신을 주었으면,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이미 지난 바람을 아직도 갖고 있다니.


그 바람이 저를 지나가버린 게 아니었을까.


재휘는 언제라도 다시 이렇게 온영을 본다면 다정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 이사 가려고 하거든.”

“아…, 그래?”

“여기서 주문하면 집으로 배달도 해줘?”

“당연하지.”

“…….”

“이사는 어디로… 가는데?”

“아직 못 정했어.”


온영은 잔잔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재휘는 그런 온영의 모습이, 아무렇지 않다고 믿으면 정말 모든 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는, 낙심에서 비롯된 천진성이 발현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럼에도 보기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그곳을 떠나면 그 공간에서의 추억들도 점점 사라지게 될까. 그렇게 너도 나를 잊어가게 될까. 문득 궁금했다. 그리고 조그만 의문이 들었다. 자신은 그렇게 온영을 놔주었는지, 이제는 온영이 제게 가볍기만 한지. 제게 남은 건 그의 그늘이 아니라 의미뿐인지.


“이제, 새 출발 하려고.”

“그래, 잘됐다.”


재휘는 온영의 결심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마음으로 맑게 웃었다.


그제야 진심으로 마음이 통한 것 같았다. 시간을 돌고 돌아서, 어느 바싹 마른 햇볕에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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