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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미완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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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Jul 1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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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집에서는 오후 내내 피아노 연주가 들렸다. 언제부턴가 예석에게는 그 아름다운 소리들이 소음으로만 들렸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도 보잘것없는 곳에선 보잘것없는 것이 돼버린다고 예석은 생각했다. 피아노 위에 놓인 액자 속의 새파란 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두 살배기를 안고 코흘리개 시골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엄마는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다.

예석의 집으로는 스쿨버스가 다니지 않았다.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이유였다. 이 시골 동네에서 동떨어지지 않은 집이 어딨느냐고 생각했지만, 예석은 군소리 없이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엄마는 집에 피아노를 배우러 오는 아이들을 태울 때만 차를 운전했다. 빨간 마티즈엔 늘 먼지가 잔뜩 껴있었다. 좁은 차안은 동생의 젖비린내가 진동했다. 예석은 동생이 태어난 뒤로 혼자인 기분을 수없이 느꼈다. 자칫 빠지기라도 할까 조심하며 혼자 논두렁을 걸을 때 유독. 그즈음 모내기철이라 카센터 일하면서 여럿 집 논일도 돕는 아빠는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예석의 세상은 그렇게나 작고 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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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하 소설














     

예석이 다니는 초등학교는 한 학년에 한 반, 한 반에 열댓 명뿐인 작은 학교였다. 근방에 있는 학교가 이곳뿐이라 예석의 모부님도 이 학교를 나왔는데 언제라도 학생이 적어 폐교될지 모른다고 말했다. 다행히도 재작년부터 정부에서 시골 학교를 지원하는 정책을 마련해서 방과후 수업을 비롯한 많은 지원이 이뤄지고 있었다. 예석이 그렇게 타고 싶어 하는 스쿨버스도, 목요일마다 있는 관현악부 시간도, 쓰지 않는 1층의 교실 세 칸을 벽을 뚫고 만든 도서실도, 모두 최근에 만들어졌다. 엄마는 세상이 얼마나 좋아졌느냐면서, 예석에게 매사에 감사할 줄 알아야한다고 했다. 예석은 학교의 변화에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많아져서 좋으면서도, 엄마의 말이 별로 와 닿진 않았다.


제이미가 학교에 온 건 유월이었다. 모내기가 끝나가고 밤마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나날이 징하고 포실한 바람이 머리칼에 헤살을 놓는 때.


예석은 처음 제이미를 봤을 때, 복도에서 그를 지나치면서 아무것도 모르고 인사했다. 선생님이든 누구든 지나가다 어른을 보면 인사를 하도록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들어서 버릇처럼 고개를 숙였는데, 그는 선한 미소를 지으며 예석에게 똑같이 고개를 숙였다. 놀란 예석은 달음박질로 뛰어 문밖으로 나갔다.

다음날 수업에서 제이미를 만났다. 그는 캐나다에서 온 원어민 교사라고 했다. 예석을 비롯한 학생들은 그를 신비하게 생긴 생물처럼 쳐다봤다. 제이미는 그런 시선을 많이 받았는지 개의치 않는 기색으로 학생들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칠판에 제 이름을 썼다. Jamie S. Chester. 그때 예석은 영어를 대충 읽을 줄 알았지만 소리내어 말하기에는 자신이 없었다. 제이미가 한 명씩 일어나 자기소개를 해보라고 하자 가슴이 콩닥거렸다. 승훈이도 여진이도 부끄럼 타면서도 곧잘 하는데 자신이 없어서 예석은 한참을 우물쭈물하며 서 있다가, 서러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울게 하려고 그런 게 아니었는데. 부담을 줬다면 미안해요, 예석.”


예석은 제이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가 너무나 제게 미안해한다는 것은 알았다. 그의 섬세한 얼굴은 감정과 생각을 다채로운 표정으로 숨김없이 드러냈다. 예석은 바로 자리에 앉았지만 속상함을 지우지 못하고 영어시간 내내 의기소침하게 앉아있었다.

그 다음부터 영어 시간이 다가오기만 하면 예석은 긴장했고, 그때의 속상한 마음이 떠올라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복도에서 제이미가 걸어오는 걸 보기라도 하면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예석은 피아노보다 영어가 더 싫어졌다. 매일 저녁마다 예석이 숙제와 공부를 했는지 확인하러 들어오는 아빠보다 무섭게 느껴졌다.

견디다 못한 예석은 영어 수업을 빠졌다. 다음 수업까지 빼먹을 순 없어서 근처에 있으려는데, 어딜 가면 좋을까 고민하다 플라타너스 나무가 우뚝 서있는 정원으로 가기로 했다. 그 정원은 예석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나무 밑둥 모양의 의자들이 배열 없이 놓여있었고 그 앞엔 학예회나 작은 행사를 위해 만들어진 무대가 있었다. 목요일마다 관현악부 연습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예석은 나무 뒤에 앉아서 몸을 가리고 숨었다. 혼자가 되니 비로소 마음이 편하고 숨통이 트였다. 그날은 하필 늘 같이 다니는 단짝 수현과 다퉈서 기분이 더 안 좋았다. 더욱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예석의 큰 눈엔 눈물이 고였다. 울고 싶지 않아서 눈을 치켜뜨고 고개를 들었다. 플라타너스 잎사귀들 사이로 햇빛이 내리쬐었다.


너무 눈부셔서 눈을 감았더니, 햇살이 무척 보드랍고 따듯하게 느껴졌다. 이런 날만 있다면 혼자가 되어도 좋을 듯하다는 생각이 온몸을 차분하게 감쌌다. 오래도록 눈을 감은 채로 여름바람의 향기를 맡으면서 폭 안겨있었다.


“여기 있었구나?”


제이미가 있었다. 예석은 놀랐지만, 그를 보고 싶지 않아서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저도 모르게 입술도 툭 나왔다. 그가 잘못하거나 실수한 것도 없는데 예석은 말이 통하지 않는 이방인이 그저 얄밉기만 했다.


“저번엔 미안했어. 예석, 네가 얼마나 속상한지 잘 알고 있어.”


말이 통하지 않는데 마음이 통할 순 있는 걸까. 예석은 눈부신 햇살을 저와 함께 맞으면서 풀 죽은 표정으로 서있는 그가 얼마나 제게 헌신적인지, 알지도 못하는 그가 얼마나 저를 아끼는 마음인지 다 느껴지는 듯했다.


“나도 너무 속상해. 여기에 오기 전에, 한국어를 배웠어야하는 건데. 그래서 네게 불편함을 주지 않으면서 대화할 수 있었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들고, 미안한 마음이야.”


제이미는 예석에게 손을 건넸다.


“그래도, 나를 피하진 말아줄래? 나는 앞으로 너와 잘 지내고 싶으니까.”


예석은 제이미의 말을 다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을 잡았다. 그때의 제게는 무척 크고 단단하게 느껴졌던 손. 하지만 지금의 제게는 그저 그 청록의 잎사귀보다도 작고 흐릿한 손.   



  


  



스쿨버스는 시내 방향과 산 방향으로 번갈아 운행했다. 예석은 스쿨버스를 기다리는 애들과 같이 도서실에서 만화책을 보거나 놀이터에서 놀거나 술래잡기를 하며 학교를 쏘다녔다. 어차피 늘 혼자 걸어갔고, 집에 일찍 가봤자 좋을 게 없어서 예석은 가장 늦게 하교하는 학생이었다.


애들이 다 가고 나면 학교는 조용했다. 예석은 해가 질 때까지 학교에 있다 가는 편이었다. 혼자 할 수 있는 건 생각보다 많았다. 노을이 지는 걸 하염없이 보면서 그네를 타거나, 운동장 조회대에 앉아서 빌린 만화책을 읽거나, 한창 즐겨하던 리듬줄넘기를 하거나, 것도 재미가 없으면 나무를 타고 오르고는 했다. 다들 나무 타기를 게임이나 내기처럼 했는데 개중에서도 예석은 가장 빠르고 높게 나무를 탔다.


잘 타던 나무에서 발을 삐끗하며 떨어지면 예석은 잘 아파하지도 않고 다시 올라갔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예석은 자존심이 셌다. 하지만 유독 속상한 일이 있던 날이면 작은 일에도 울음이 터지곤 했다. 예석은 무릎이 까지고 피가 나는 다리로 걸어가다가 제이미의 목소리를 들었다. 예석은 창문을 열고 제게 손짓하는 제이미를 보았다. 예석은 그 멀리서도 다친 저보다 더 울상 지은 그의 얼굴이 보였다.


제이미가 상주하는 영어수업 전용 교실은 도서실과 같이 최근에 만들어져서 무엇이든 새것이었고 늘 조금 낯설고 서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더운 날씨에도 제이미는 가디건을 걸치고 다녔다. 제이미는 예석을 책상 옆에 앉히고 구급상자를 가져와서 쓸리고 까진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밴드를 붙여줬다. 예석이 아아, 아픈 소리를 낼 때마다 제이미의 얼굴도 함께 찡그려졌다. 미안, 미안. 예석은 제이미가 sorry를 너무 많이 해서 제가 미안할 정도였다. 대신 thank you라고, 제이미와 눈을 맞추고 말했다. 제이미는 무슨 말만 하면 웃는 사람이었다. 예석은 제이미도 웃으면 다 아무 일도 아닌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일까 궁금했다.


“집에 안 가고 여기서 뭐 하세요?”


예석은 제이미의 넓은 책상에 아무렇게나 구겨져서 놓인 종이뭉치를 보았다.


“일기를 쓰고 있었어.”


일기는 보통 집에서, 자기만 보는 공책에 쓰지 않나. 에이포 용지에 일기를 쓴다는 제이미의 말에 예석은 신기하단 표정을 지었다.


“실은 편지를 써. 일기처럼 그날 있었던 일을 편지에다 매일 쓰고 있어.”


예석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제이미가 눈치로 알아듣고 말했다. “우리 엄마한테. 나는 아직 메일보다는 이런 편지가 좋아서.”


예석은 그제야 제이미가 집을 멀리 떠나 아무것도 모르는 땅에 온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되새겼다. 영어를 잘하고, 제게는 너무나 어른이고, 성숙하고 모든 것이 바로잡힌 인격체로 느껴졌지만, 홀로 먼 곳에 온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도 느꼈다.


예석은 알음알음 들은 단어들을 조합해서 물었다. “Teacher, your dream, teacher?”


제이미는 한국에 와서 눈치가 늘은 건지, 원래 눈치가 뛰어난 사람인지, 아니면 한국에 살기 위한 필수 본능인 눈치가 절로 발달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흡수력과 이해력이 빨랐다. 제이미는 어떻게든 저와 대화하려고 애쓰는 예석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최대한 쉬운 단어로, 짧은 문장들로 대답해주기 위해 고민하는 모습들에 예석의 마음은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아니, 내 꿈은 원래…… 너무 많아서 하나를 딱 집을 수가 없는데. 그중에 선생님은 없었어.”

“왜요?”

“글쎄, 내가 별로 좋은 선생님을 못 만나봐서 그랬을지도 모르겠어. 그런데 내가 선생님이 되고 보니까, 좋은 선생님이 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겠어. 그래서 내가 만난 모든 선생님을 존경해야겠다고 생각해.”


예석은 매일 영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혼자 방에 앉아서 사촌언니에게 물려받은 영어동화 카세트를 듣고 교과서를 읽고 학교에서 영어를 제일 잘하는 명지한테 모르는 걸 물어보기도 했다. 그런 노력이 빛을 발하는지 제이미의 말을 이전보다 많이 알아들어서 무척 기분이 좋았다.


“선생님은 좋은 선생님이에요.”


그 말을 해줄 수 있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예석의 미소에 제이미는 얼마간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다가, 감동을 받았다는 듯 촉촉해진 눈으로 예석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 예석.”


제이미도 서툴지만 많이 는 한국어로 말했다. 예석은 제이미의 발음이 웃기다고 킬킬 웃어댔다. 애슥 아니고 예,석,이에요. 예석. 예석은 제이미가 쓰던 종이에 제 이름을 써주었다. 제이미는 또 고마워, 라고 말했다. 한 글자 한 글자, 진심을 담은 말이었다.


예석은 제이미의 모든 따듯한 말들이 좋아서, 제이미와 오래 있고 싶었다. 애들과 노는 것보다도 제이미와 있는 게 좋아서 그렇게 좋아하던 공기나 술래잡기도 안 하고 영어 교실에 와서 제이미의 옆에서 놀았다. 제이미는 매일 편지를 쓰는지 항상 책상에 꾸겨진 종이뭉치들이 굴러다녔다. 어느 날 예석은 몰래 종이뭉치 몇 개를 가져다가 방에서 읽어보았다. 제이미의 편지 글씨는 칠판에 쓰는 것보다 날렵하고 정갈했다. 처음엔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사전을 뒤져가며 단어 뜻을 아래에 적어두고 읽으려고 애썼다. 혹시라도 제이미가 알면 기분 나빠할지 모르겠지만, 예석에게는 제이미가 쓰던 편지를 읽는 취미가 생겼다. 덕분에 예석은 영어가 급속도로 늘었고, 제이미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하는 조안나.

오늘은 아이들이 밭에서 일하는 것을 구경했어. 놀이터 밑에 큰 밭이 꾸려져있는데, 고구마, 고추, 토마토, 포도 등을 키운대. 아이들이 각반마다 구역을 맡아서 직접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수확을 한대. 불평하는 아이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 시간을 좋아해. 집에서 하는 것보다 친구들과 하는 게 재미있다고 하더라. 이곳의 아이들은 후드타운의 아이들처럼 맑고 기운차고, 좀 더 흥이 많아. 학교에선 자주 노래와 웃음소리를 들어. 정말 행복해.

드디어 센터에서 전화가 왔어. 기록에 문제가 있는지, 아무래도 생각보다 찾기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어. 한국에 오기 전에는 너무나 큰 결심이 필요하고 내게 슬픔을 주는 일이었는데, 한국에 오니까 이상하게도 평온한 기분만 들어. 혹시라도 못 찾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조금도 슬프지 않고, 그저 다 흘러가는 일처럼 느껴져. 어떤 결과가 나오든 나라는 사람은 변함없을 거라는 믿음이 자리해있어.

신기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겁먹고 살지 말걸 그랬어. 사는 게 다 그런가봐. 무언가 다가올 때는 겁이 나는데 막상 그걸 만나면 받아들이게 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지나가면 아무 일도 아닌 것이 돼.

아빠는 잘 만나고 왔어? 나대신 프레드가 가장 좋아하는 프리지아를 가져갔으리라 믿어. 엄마도 건강 잘 챙기고, 항상 좋은 것만 생각하면서 지내. 나도 그렇게 잘 지낼게.


부디 행운을 빌어줘.

늘 엄마를 생각하는, 제이미.」     


예석은 제이미가 궁금했고, 제이미에 대해서 알고 싶었지만, 이렇게 깊은 이야기까지 알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누구나 가슴에 두고 있는 비밀 이야기가 있듯이 제이미가 쓴 편지도 그런 비밀 이야기였을 터였다. 예석은 조금 죄책감을 느끼고 더는 편지를 가져가지 않기로 했지만, 이미 제이미의 이야기를 읽고 난 후였다.


편지를 읽은 후로 예석의 눈에는 제이미가 완벽한 어른, 다 자란 어른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예석에게 제이미는 어떤 말을 해도 다 맞는 것처럼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어른도, 성장기 없이 지금의 다 자란 모습로만 존재해온 어른도, 다른 많은 이름이 있지만 선생님이란 호칭으로만 존재하는 듯한 선생님도, 많이 들어보았지만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나라에서 온 신비로운 이름의 이방인도 아니었다. 호수처럼 깊은 마음에, 작은 상처들이 나룻배처럼 오가고, 그 중 여럿은 잘못되어 깊은 곳에 빠지고, 시간이 지나면 그 상처들은 부식되고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살다보면 문득문득 그 상처의 파편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저와 다를 바 없는 사람 같았다.


그럼에도 제이미에게 자신의 이야기는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석의 작은 세상에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어른이란, 동화 속 요정처럼 존재하지 않는 존재였다. 어른들이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아이들이 아주 작은 갓난아기일 때뿐, 아이들이 커갈수록 어른들은 아이들이 빨리 세상에 적응하고 자신과 같은 어른이 되기만을 바랐다. 아이는 어른의 기대에 맞춰 까치발을 들고, 크고 높은 세상을 보려하지만, 결국 기대에 완벽히 부응하는 존재가 되지 못하고 자신의 좁은 세상만 보게 되었다. 그렇게 수많은 아이들이 사라져갔다. 아이들을 지켜주는 어른은 없었다.


예석은 누구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면서도 겁이 많았다.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목소리가, 언제든 제가 모르는 사이에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늘 그림자처럼 자신과 함께라는 것을 느끼며 살아온 탓이었다.     





  



여름방학 첫날, 예석은 수현의 집으로 놀러 갔다. 수현의 집은 야트막한 산기슭을 뒤로한 전원주택이었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엔 넓은 들과 수현의 모부님이 소일거리로 경작하는 작은 밭과 옛날에 타조 몇 마리를 기르던 농장 터가 있었다. 수현의 집에선 일이 여유로운 아버지가 요리를 하는 편이고, 어머니는 다양한 취미와 재치 넘치는 성격을 가진 분으로 수현과 예석을 친구처럼 대했다. 수현의 집에 가면 마음이 편하고 즐거웠다. 수현의 방엔 컴퓨터가 있어서 게임도 마음껏 할 수 있었고 넓은 마당에서 강아지 아리를 키워서 아리와 함께 놀 수 있었고, 수현의 모부님이 그림을 그리면 옆에서 구경하거나 같이 그릴 수도 있었고 처음 보는 과일도 먹을 수 있었다.


“정말 집까지 걸어갈 수 있겠니, 예석아?”


수현의 어머니는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예석은 정말 괜찮다며 사양했다.


수현의 아버지가 말했다. “다음에 또 놀러와. 예석이 오면 마당에서 고기 구워먹자.”

“아아 뭐야, 왜 예석이 오는 날만 맛있는 거 먹어?” 수현이 투정했다.

“얘는.”


수현이 인사했다. “예석아, 잘 가. 학교에서 봐!”


사람이 함께 손을 흔들었다. 예석도 웃으며 인사하곤 씩씩하게 걸어갔다.


해는 어둑어둑 저무는데 예석의 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혼자이고 싶었던 건, 한나절이 넘도록 받았던 호의를 거절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문득 울고 싶은 기분 때문이었다. 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다시 혼자가 되겠지. 이 작은 동네에서도 비교의식이 자라는 건 어쩔 수 없는 걸까. 예석은 단지 더 많은 여유와 선택지가 있는 환경의 차이가 아니라, 사랑받는 것과 사랑받지 못하는 것의 차이를 느끼고 있었다. 예석은 동생이 태어나기 전부터도, 자신은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이대로 저 산골짜기 이층집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건, 헛된 투정을 부리는 거겠지. 방학이라고 해서 별로 다를 것도 없었다. 일주일만 쉬고 특별활동 수업을 위해 학교에 나가야했다. 3교시만 하는 수업이지만 예석은 집에 있는 것보단 학교에 가는 게 차라리 좋았다. 학교에 있으면 적어도 외롭지 않았다. 예석은 땅거미가 내려앉은 논두렁을 걸으며 친구들과 부르던 노래를 흥얼거렸다.


예석은 일찍 잠드는 것을 싫어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뺏긴다고 생각해 늦게까지 자지 않고 그림을 그리거나 카세트로 라디오를 듣고는 했다. 아빠는 공부를 하는지 확인하는 것 말고는 방에 들어와 보지도 않았고 엄마는 동생을 보느라 제게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는 것으로 느껴졌다. 창문을 열어두면 낮엔 매미가 울고 밤엔 개구리가 우는 소리가 들리고 가벼운 바람이 흘러들어왔다. 예석은 아침이 되면 수현의 집에 놀러가야지 생각하며 잠들었다.


문득 잠에서 깬 밤엔 온 사위가 고요했다. 예석은 목이 말라 침대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섰을 때 엄마의 코고는 소리나 동생을 재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예석은 불안을 느꼈다. 안방에 들어가니 느닷없이 피난이라도 간 듯 이불은 바닥에 내팽개쳐있고 옷장은 활짝 열린 채로 쥐 파먹은 듯 파헤쳐져있었다. 예석은 바로 거실로 달려가 전화기로 엄마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뚜뚜, 뚜, 전화 연결음에 긴장감이 커지는 느낌이었다. 엄마가 전화를 받자 주변의 낯선 소음들이 함께 들렸다. 예은이가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왔다고 했다. 예석은 예은이를 걱정하는 것보다도 먼저 자신을 혼자 집에 두고 갔냐고 원망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로 엄마에게 투정해버렸다. 엄마는 곤히 잠든 예석을 깨워서 데려올 생각은 못했다고 말했지만, 속상한 예석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혼자 버려진 기분이었다. 같이 아팠을 때도 모부님은 동생을 더 걱정하고 보살폈다. 엄마가 피아노를 가르치니까 피아노를 잘 쳐야 한다고 연습을 시키면 군말 없이 그 지루한 하농을 연습해도 엄마는 칭찬 한 번 해주지 않았다. 아빠는 공부를 하는지 보러올 뿐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준 적이 없었다. 그저 잘 하라고만 했다. 무엇을 잘하라는 건지는 알 수 없엇다.


집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어리기만 한 자신이 갈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예석은 불현 듯 제이미를 떠올렸다. 제게 조금의 불안과 의심도 끼치지 않는 다정함과 영혼을 보듬는 순수함을 가진 그의 목소리가 마음속에 맴돌았다. 예석은 가방에서 비상연락망 종이를 꺼내어 제이미의 번호를 찾았다. 그 밤에 전화하는 것은 무척 실례일 텐데도 예석은 왜인지 제이미가 이런 자신의 무례함마저도 감싸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 제이미는 태양 같은 사람이었다. 새벽녘엔 은은한 빛깔로 세상을 감싸고, 한낮엔 가장 뜨겁게 빛을 발하며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세상에 주고, 밤이면 지친 마음 위로하듯 어둠에 자리를 내주며 등 뒤에서 세상을 폭 안아주는, 자연을 닮은 사람이었다.


“누구세요?”


막 잠에서 깨어난 목소리가 잠겨있었다. 예석은 눈물이 차올랐다. 제이미, 선생님, 저 예석이에요. 예석은 다짜고짜 울음을 터뜨리며 얘기를 쏟아놓았다. 나는 혼자인 것만 같아요,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어요, 아무도 나한테 관심 따윈 없어요, 다들 이 조용한 동네에서도 바쁜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 선생님은 꿈이 많았다고 했죠, 저는 꿈도 없어요, 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아요,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동생은 뛰어다니기만 해도 나중에 달리기 선수를 하면 좋겠단 소리를 듣는데 저는요, 학교에서 사회 백 점을 맞아도 잘했다는 소릴 못 들었어요.


예석의 얘기가 끝났을 때, 제이미는 잠시 침묵했었다. 예석은 그가 제게 이 시간에 전화하는 것은 무례하다고 선생님답게 훈계를 할까 잠시 걱정했다. 예석은 그저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사랑을 줄 사람이 아니라 얘기를 들어줄 사람. 어른이든 아이이든 제 마음을 알아줄 사람.


“예석, 전화해줘서 고마워.”


제이미는 어느 새 오후와 같은 따듯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나도 지금 혼자인 기분이었거든. 이렇게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으니까 기분이 좀 나아지는걸.”


제이미는 짧은 말은 한국어로 띄엄띄엄 했고, 긴 말은 최대한 쉬운 영어로 말했다. 그는 이 세상엔 말로 전해지지 않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그래서 남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혼자인 걸 느낄 때가 있어. 생각보다 아주 많이. 누구나 혼자 태어나서 혼자 죽는다는 말도 있잖아. 조금 무서운 말이긴 한데, 사실이야. 사람은 혼자일 수밖에 없지만 늘 끊임없이 혼자임을 벗어나기 위해 애를 써. 항상 누군가와 함께이길 원하고 좋은 것들만 주고받고 자신도 남들에게 좋은 사람이기를 바라지. 그렇게 세상과 겹치다가도 부딪치고, 섞이다가도 갈라지면서, 온전한 자신이 되어가는 건가봐.

예석은 전화선 너머로는 제이미의 말을 다 알아듣지 못해 속상해서, 편지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제게 하고 싶은 말을 편지로 남겨달라고, 그대로 전해달라고. 제이미는 OK 하고선 종이를 꺼내 편지를 쓰는 소리가 들리냐고 물었다. 그것까진 들리지 않는다고 대답하며 웃은 예석은, 동이 트도록 눈물자국 마른 얼굴로 그의 위로를 듣다가 어느 순간 잠들었다. 거실 카펫에 누워 평화롭게 잠든 얼굴은 모든 불안을 떨쳐낸 모습이었다.


학교에 가자마자 영어교실로 향한 예석은 아직 오지 않은 제이미를 기다리며 복도에 서있었다. 예석은 그에게 사과하기 위해 왔지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하기도 했다. 하얀색 차 한 대가 후문에서 들어와 주차장에 자리를 잡았다. 그 차에서 내린 제이미는 영어교실 쪽으로 걸어왔다. 예석은 창문 너머로 제게 가까워지는 그를 바라보았다.


“예석!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제이미의 부름에 예석은 반가운 얼굴로 달려갔다. 장난치듯이 그를 끌어안고 매달리니 제이미가 복도가 울리도록 웃었다.


“참, 편지 가져왔어. 여기.”


제이미가 뒤로 맨 가방에서 편지를 꺼내주었다. 예석은 정말 받을 거라 생각지 못했던 편지를 받고 뛸 듯이 기뻤다. 그대로 방방 뛰며 좋아한 예석은 제이미에게 가장 아끼는 캐릭터 공책을 선물로 주었다. 선생님, 고마워요. 제이미는 너무나 기뻐했다. 저를 생각해준 게 고맙다면서 예석의 어깨를 안고 쓰다듬어주었다. 예석은 그에게 사과하려던 것은 잊어버렸다.


“1교시는 영어지? 같이 교실에 들어가 있을까?”

“네!”


예석은 제이미를 따라 영어교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교재를 꺼내고 수업 준비를 하는 제이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너무 일찍 왔는지 졸음이 살짝 밀려왔다. 두 팔을 포개고 고개를 묻었다. 서늘한 교실 공기에 살갗이 시린 느낌이 드는 채로 잠들었다. 종소리를 듣고 일어났을 때, 예석을 덮어준 담요가 스르륵 바닥에 떨어졌다. 예석은 담요를 주우면서 제이미를 보았다. 다른 학생들에게도 혹시 추우면 담요를 주겠다고 말하는 제이미가 책상 아래서 담요를 꺼내고 있었다.


예석은 몰래 훔쳐다 읽던 편지가 아니라 제이미가 제게 직접 쓴 편지를 읽을 수 있어 기뻤다. 얼른 집에 가서 영어사전을 펼치고 한 줄 한 줄 읽고 싶었다.     







 

예석의 학교는 학생 수가 적어서 고학년이 다함께 수학여행을 갔다. 예석이 가을 수학여행을 다녀왔을 때 제이미는 학교가 너무 조용해서 쓸쓸했다고 말했다. 쓸쓸해, 라고 말하는 제이미의 목소리는 명랑하기만 해서 예석은 살갑게 웃어버렸다. 예석은 제이미의 한국어가 그렇게 빨리 늘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어른이라면 당연히 아이보다 빨리 배우는 줄 알아서 제이미가 피나는 노력을 한다는 것을 몰랐다.


“재미있었어? 경주에 갔다면서?”


“완전 재밌었어요!” 예석은 경주에서 본 것들, 맛있게 먹은 것들, 수련관에서 장기자랑을 했던 일, 다른 재밌었던 일들을 자랑하듯 얘기했다.


“부럽다. 나도 경주에 꼭 가보고 싶은데.”

“선생님도 가지 그랬어요.”


“다음에, 혼자 가지 뭐.” 제이미가 영어로 중얼거렸다. 경주가 외국인이 한국에 오면 꼭 가봐야 하는 곳들 중 하나라고 들었는데 그는 아직 가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예석은 들떠서 자랑해댄 것이 미안해서 머쓱해졌다.


“예석, 다음 달에 영어말하기대회 있는데 나가지 않을래?”


제이미는 적극 추천했지만 예석은 망설였다. 제이미를 좋아해서 그를 따라다니며 영어로 대화하긴 했지만 대회에 나갈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디서 하는데요?”

“시청에서 한다고 들었어.”


예석은 그런 대회에 자신을 추천하려는 제이미의 생각이 고마웠다. 그의 눈빛은 아끼는 사람을 조금의 거짓도 없이 믿어주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예석도 일취월장한 자신의 영어 실력에 조금씩 자신감이 생기고 있었다. 제이미 덕분이었다.


그런 신뢰를 받고 있음에도 예석은 아직 스스로를 믿지 못해서, 솔직하게 말했다. 사람들 앞에 나가는 게 무서워서 그런 건 못한다고. 관현악부에서도 예석은 가장 뒤에서 하는, 크게 드러날 일이 없는 작은 북을 치고 있었다. 큰북보다 소리가 크지도 않고 연주에서 두드러지는 역할을 하지도 않았다. 연주를 무서워하는 이유는 제가 내는 모든 소리마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하면, 아주 작은 실수라도 커다랗게 보이고 아주 작은 몸짓이라도 서툴고 못나게 보일 것 같았다.


뭐든 자신 없어하는 예석에게 제이미는 누구보다 분명한 확신과 포용심을 주었다.


“내가 본 너는 누구보다 잘할 수 있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분명 예석에게 좋은 기회가 될 거야. 자신이 없다면 내가 있는 힘껏 도와줄게.”


다른 어른이, 제가 곧이곧대로 들을 수 있는 말로 했다면 그저 겉치레로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제이미의 말은 언제나 진심으로 전해져서 예석의 마음을 움직였다. 제 작은 세상에 맞추기 위해 무럭무럭 키우지 못했던 마음을 움직이고 날개를 달아주는 힘과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다. 예석은 스스로는 그렇게 자신을 바라볼 수 없었지만, 제이미의 얘기를 들으면 자신이 정말 누구보다 잘할 수 있는 아이라는 사실도 믿을 수 있었다.


매일 학교가 끝나면 예석은 제이미의 교실로 향했다. 제이미의 옆에서 장난을 치거나 쉽게 쓰인 영어책을 읽으며 놀기 위해 갔었다면, 대회를 앞두고는 오로지 공부하기 위해서 제이미에게 갔다. 같이 대회에 나가기로 한 명지도 함께 제이미와 대회준비를 했지만 학원에 가야 해서 함께 있는 시간이 적었다. 예석은 노란색 학원차를 타고 학원에 가서 더 좋은 걸 배우는 명지 같은 애들을 부러워했었지만, 제이미와 있으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부럽지 않았다.


“이번 대회 주제는 자유래. 예석, 혹시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너만의 얘기가 있니?”


예석은 그 말을 듣고 한참이나 손가락으로 연필만 휘휘 돌리고 있었다. 제이미는 얼마든지 예석을 기다리겠다는 의사를 보이듯, 책상에 교과서와 여러 책을 쌓아두고 수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집중하고 있는 제이미를 쳐다본 예석은 한숨을 푹 쉬었다. 제이미가 주제를 정해주길 바랐는데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생각하라니 막막하기만 했다. 하루는 그렇게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한 채로 보냈고, 다음날도 고민에 싸여있었다.


노을진 하늘을 보는데 마음이 젖은 종이처럼 축축하고 무거웠다. 예석은 속상한 표정으로 말했다.


“쌤, 아무래도 저 대회 못 하겠어요.”

“왜?”


책에서 고개를 들은 제이미가 저를 쳐다보자, 예석은 더 속상하고 부끄러웠다.


“하고 싶은 얘기가 없어요. 제가 잘하는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좋아하는 것도 없고요. 하긴 전 애들이랑 있을 때도 항상 듣고만 있어요. 어쩔 때는 애들이 무슨 얘기 하는지 모르면서도 그냥 웃고 있어요. 제가 얘기하면 분위기가 조용해지고 재미없어지거든요, 그래서 얘기를 안 했어요.”


예석은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차올랐지만 울고 싶지 않아서 꾹 참았다. 자신이 누구보다 잘하는 게 딱 하나 있다면, 울음을 참는 거라고 생각했다.


“뭐든지 다 얘기해도 돼, 예석. 지금 이렇게 함께 있잖아. 내가 다 들을게.”


제이미가 예석의 손을 잡았다. 빠르게 키가 자라고 있는 예석은 남들이 보기에는 다 자란 것처럼 보여서, 그 안에 미처 다 자라지 못한 마음까지 어른이기를 요구받았다. 기대와 요구에 부응해야한다고 걱정하는 예석에게 제이미는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너는 무엇이 될 필요도 없고, 너만의 속도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고. 문득 예석은 제이미가 캐나다에 있는 어머니에게 쓴 편지 문구 중 하나를 떠올렸다. 나는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묻지 않았으면 좋겠어.


예석은 제 안의 호수에 가라앉은 이야기들 중 무엇이라도 건져서 세상에 보일 자신이 없었지만, 제이미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제이미가 제게 얼마나 힘이 되어주고 소중한 친구가 되어주었는지. 얼굴을 마주하고 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제이미를 통해서 용기를 낸 자리에서, 제이미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처음에 예석이 써온 글을 읽은 제이미는 예석의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혼자 있을 때는 쑥스러워 어쩔 줄 몰랐다. 한편으로는 너무나 감동을 받아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예석의 담임선생님이 번역을 도와주면서 읽었을 걸 생각하니, 둘만의 이야기를 들킨 기분이 들었다. 제이미는 조심성이 많고 혼자만의 생각도 깊고 숱하게 안고 있는 예석이, 자신을 믿고 대회를 나가기로 다짐하고 저를 위한 글을 썼다는 게 믿기지 않으면서도 기뻤다. 예석은 처음 봤을 때보다 많이 달라져있었다. 저와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고, 온몸으로 내보이는 듯하던 외로움도 이제는 스스로 짐이나 상처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안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 담대함이 생겨있었고, 제 얘기를 들어주길 바라면서도 드러낼 용기가 없었지만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예석을 오롯이 지켜봐온 제이미에게는 그러한 예석의 작고 소중한 변화가 뚜렷하게 보였다.


대회가 열리는 시청으로 가는 길, 담임선생님의 차에는 제이미와 예석, 명지가 타고 있었다. 명지는 워낙 낯가림도 겁도 없어서 활발하게 웃으며 설렘을 드러내고 있었고, 예석은 명지의 얘길 들으면서 속으로 무척 긴장하고 있었다. 제이미는 백미러로 둘을 번갈아 보면서 어쩜 저렇게 다르게 빛이 나는지,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시청 오른편에 있는 대강당홀에 도착했을 때, 그곳엔 벌써 많은 학생과 교사들이 와있었다. 미리 축하를 준비하는지 꽃다발을 든 가족들도 여럿 보였다. 예석은 모부님께 얘기했지만 오지 않을 것을 알았다. 보나마나 아빠는 카센터에서 일하고 있을 테고, 엄마는 예은이를 데리고 할머니 댁에 다녀온다고 했다. 예석은 애초에 기대하지 않기로 마음먹어서 실망하지 않았다. 저를 응원하는 사람이 셋이나 있었다.


“어떡해! 예석아, 나 너무 떨려.”

“아까 차에선 너무너무 재밌겠다고 그러더니. 흥이다.”

“아니야, 진짜 떨려. 안 그런 척한 거야아.”


명지는 뒤늦게 자기 차례가 다가오면서 긴장했고 예석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예석은 항상 뭐든 잘하고 걱정 같은 건 하나도 갖고 있지 않던 명지도 저와 똑같이 긴장하는 걸 보고는 도리어 안심이 됐다. 제이미는 둘이 점심도 못 먹고 와서 배고프지 않으냐면서, 담임선생님과 함께 김밥과 떡볶이를 사왔다. 대강당홀 바깥의 벤치에 앉아서 먹는 김밥이 너무 맛있어서, 그 별 것 아닌 일과 시간이 너무나 행복해서, 예석은 그 가을날의 바람을 오래도록 잊지 못하게 되었었다.


“맛있지? 가는 길에 또 사갈까?”


담임선생님의 말에, 예석과 제이미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마주치고 웃음이 터졌다. 예석은 자꾸 그 순간이 생각나서, 무대 단상에 올라 달달 외운 스피치를 하면서도 실실 웃음이 나왔다. 덕분에 많이 떨지 않고 잘해낼 수 있었다. 그날 예석은 장려상을 받았다. 그 작은 학교에서 온 둘이 각각 금상과 장려상을 받아서 꽤나 화제가 되었다. 그날 취재를 온 지역신문에도 대회의 정경과 수상내역이 실렸다. 예석은 그 신문을 스크랩해서 일기장 표지 뒷면에 붙였다. 예석은 작은 성공의 경험으로, 많은 자신감이 생겼다. 잘할 수 없을 거라고 굳게 다졌던 자신의 믿음이, 실은 자신을 억누르고 가로막고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제이미는 그에게 조금씩 열기 시작한 예석의 마음을, 세상을 향해서도 활짝 열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었다.     







  

시간은 너무 빨랐다. 예석은 졸업을 앞두고 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중학생이 되어 교복을 입는 건 기대했지만, 입시라는 단어를 들으면서 자신이 그 단어에 매달린 삶을 살게 될 거라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예석은 근처의 중학교를 갈지, 아니면 시내에 있는 조금 더 큰 학교에 갈지 고민이었다. 근처의 중학교를 다니면 자주 제이미를 보러 올 수 있지만, 아무래도 시내의 학교보다는 여건이 좋지 않아서 망설여졌다. 엄마는 등하교를 어떻게 할 것인지나 학생 수가 많은 학교에 적응할 수 있을지를 얘기하며 예석이 근처의 학교를 가길 바랐지만, 아빠는 예석이 큰 학교에 가야 더 공부를 잘하고 나중에 좋은 대학에 가는 데도 도움이 될 거라고 말했다. 예석은 이제 중학교에 들어가는데 대학교에 갈 것까지 미리 계산해두는 아빠가 조금 무서웠지만, 제가 갈 학교가 제 뜻이 아닌 아빠의 뜻대로 결정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예석은 불안할 때면 제이미에게 편지를 쓰고 그를 생각하는 자신이 그에게 부담스럽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이런 자신마저도 이해해주는 그를 알아서 더욱 고마웠다. 예석의 편지는 책상 아래 둔 상자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밤새 눈이 쌓여서 길에 차 한 대도 다니지 못하는 하얀 날이었다. 예석은 중요하지도 않은 방학 수업 때문에 나가지 말라는 엄마의 걱정을 들은 체도 안 하고 평소처럼 학교 갈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털장화를 신고 나오자마자 움푹, 눈이 패였다. 예석은 귀마개에 목도리에 코트까지 온몸을 꽁꽁 싸맸지만 학교까지 잘 갈 수 있을지 스스로도 자신 없었다. 하루라도 빠지면 얼마 남지 않은 학교생활에 아쉬움만 키울 것을 알아서, 한 걸음 한 걸음 당차게 내딛었다. 벌써 발끝이 시렸다. 예석은 목도리를 더 단단하게 조였다.


온 세상이 하얗게 덮여있었다. 누구도 지나지 않는 길, 모든 것이 잠들어있는 듯한 세상을 홀로 걸으면서, 예석은 그토록 작기만 하던 자신의 세상이 광활하게 느껴졌다. 수시로 저를 막으려드는 두려움을 뒤로하고, 한 걸음씩 용기를 내어 나아가다 보면, 그렇게 조금씩 세상이 넓어질 터였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자라는 아이들을 위해 존재했다. 모든 발자국이 길에 남고, 아직 닿지 않은 길엔 햇살이 비쳐있었다. 하얀 눈길이 반짝였다. 모든 자연이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되어주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예석이 학교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훌쩍 지나있었다. 3교시가 끝날 무렵이었다. 집에선 학교에 갔다는 아이가 오지 않아서 걱정한 담임선생님이 정문에서 예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손이 차서, 어쩜 좋니.”


장갑을 껴도 추위에 손이 얼어있었다. 선생님은 예석을 데리고 도서실로 갔다. 따듯하게 켜둔 난로를 중심으로 친구들이 군고구마를 먹고 있었다. 왜 이제야 오냐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예석을 나무라며 장난치는 친구들이 그토록 반가운 적이 없었다. 바깥에서 불을 지피고 고구마를 구워먹고 있었다면서 벌써 입가가 거뭇해진 아이들이 히죽 웃는 미소가 사랑스러웠다. 제이미는 창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예석을 보자마자 달려와선 반갑다며 꼭 안아주었다.


“연락했으면 정 선생님이랑 널 데리러 갔을 텐데. 왜 혼자 걸어왔어, 많이 추웠지.”


예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안은 제이미의 팔을 붙잡고 명지가 내민 고구마를 한 입 먹었다.

담임선생님이 말했다. “여기서 느긋하게 있으면 몸이 푹 녹을 거야. 이따 갈 때는 선생님이 데려다줄게.”


예석은 난로의 열기보다도 제이미의 포옹에 더욱 따듯함을 느꼈다. 저를 둘러싸고 있는 친구들과 선생님의 다정한 마음씨에도, 예석은 문득 뭉클해졌다. 학교를 떠날 날이 다가온다는 걸 그제야 조금씩 실감하면서 눈물이 났다. 예석이 눈물을 보이자 다들 놀랐다. 개중에는 달래주려고 괜히 더 장난을 치는 애들도 있었다. 예석은 우는지 웃는지 모를 얼굴로 장난치지 말라고 화내다가 그만 웃어버렸다. 고구마는 뜨겁고 달았고, 소복소복 눈 덮인 오후는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제이미가 살던 동네에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제이미가 살던 집에 가서 어린 시절 이야기도 듣고 옛날 사진도 보고, 제가 생각이 많을 때 논두렁을 걷듯이 호숫가를 걷는다고 했던 제이미와 함께 그 호수를 보고 싶다. 예석은 컴퓨터 시간에 몰래 비행기로 캐나다까지 가는 시간과 돈을 검색해보았다. 어깨가 절로 내려앉았다. 서울도 가본 적 없는데 캐나다를 어떻게 가. 예석은 실망했다. 하지만 그 바람을 제 꿈으로 삼기로 정했다.


제이미는 제가 살던 고향을 얘기할 때면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햇살을 받으며 입술을 움직이는 제이미는, 예석과 함께 풀잎이 돋아나는 시골길을 걸으면서도 그가 떠나온 멀고 먼 나라, 상쾌한 바람과 눈부신 햇살로 살과 피를 채우던 그의 작은 동네를 걷고 있는 듯했다.


“이곳은 정말 아름다워. 봄이면 봄, 여름이면 여름, 언제나 계절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야.”


제이미가 살던 곳은 여름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쌀쌀한 날씨여서, 봄을 실감할 수 없었다고 했다.


예석은 살짝 뾰로통한 얼굴로, 제이미의 감상에 대꾸하지 않았다. 벗어나지 못해 지겹기만 한 제 동네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제이미, 제 작은 세상에 잠시 놀러와 저 같은 원주민은 보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제이미가 부럽고도 질투가 났었다. 그러다가도 그에게 동화되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제게도 그는 아름다운 이방인일 뿐이었다. 낯설고, 빈틈없고, 변함이 없을 듯한. 여물지 않은 누군가의 봄을 혜성처럼 지나는 여행자.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이곳의 누구도 알지 못하는 커다란 세계에서 온 개척자.

예석은 혼자 책상에 엎드려 있을 때마다 그 학교와 제이미를 생각했다. 모든 계절이 그 품에서 싹을 틔우고 자라나온 듯하던 정경, 그 모든 걸 여행처럼 아름답게 바라보던 제이미. 그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학교에 와서 모든 게 어렵고 벅차기만 한 예석에게, 위로가 되는 유일한 친구였다.


예석은 매일 훌쩍이다 잠들기 일쑤였지만, 전처럼 제이미에게 불쑥 전화를 걸진 못했다. 어리광부리는 것도 진작 졸업했어야지 싶어서. 대신 제이미에게 편지를 쓰는 습관을 이어가고 있었다. 예석은 생각했다. 제이미도 차마 그대로 하지 못하는 모든 말들을 편지로 썼던 게 아닐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외로움을 달래려 편지를 썼던 게 아닐까.


작은 학교에서 큰 학교로 오니 제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나날이 느끼고 있었다. 영어말하기대회에서 장려상을 받은 것도, 매번 시험마다 1등을 놓치지 않았던 것도, 제이미와 함께 영어로 대화할 수 있는 것도, 별것 아닌 일이 되는 기분이었다. 예석은 절대 소리 내어 운다든지, 눈에 띌 때와 안 띌 때를 구분하지 못한다든지, 조금만 시선의 온도가 높아져도 아파한다든지, 하지 않으려 애썼다. 우물 안 개구리라도 열심히 뛰다보면 넓은 바깥을 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실은 믿고 싶었다. 제이미를 만나서 예석은 세상이 얼마나 넓고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지 알게 되었다. 저와 닮은 사람, 친구가 될 사람, 마음을 나눌 사람이 이곳에 없더라도 다른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도. 그래서 제게 주어진 이 작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들에 일희일비하는 게 이롭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직 예석은 잔바람에 흩날리는 볏대처럼 모든 작은 일들에 흔들렸다.


예석은 토요일마다 학교에 가면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제이미가, 다들 일찍이 떠나고 조용한 학교에서 저를 기다리느라 늦게까지 있어준다는 사실을 알지만 고맙다고 하지 못했다. 고맙다고 말하면, 미안한 일이 돼버리니까.


“집에서 편지가 왔어. 엄마가 사진을 보내줬는데, 같이 볼래?”


예석은 의자를 끌어 제이미의 바로 옆에 앉아서 눈을 빛냈다. 그가 보여준 사진 속, 몸집이 작고 앳된 얼굴의 제이미는 너무나 귀여웠다. 예석은 귀엽다는 말을 연발하며 제이미를 당황케 했다. 제이미가 말한 그 호숫가는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크고, 빽빽하고 넓은 침엽수을 끼고 있었다. 눈이 내려 얼어붙은 호수를 뒤로하고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는 어린 제이미가 있었다. 제이미가 덧붙였다. 네가 우리 동네를 궁금해 해서, 보여주고 싶었어. 예석은 대뜸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외쳤다. 생뚱맞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은 제이미가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아! 열심히 공부해서 캐나다에 갈 거예요. 그럼 선생님이 나 구경시켜주겠지?”

“알았어. 그럼 공부 열심히 해야 돼, 예석.”


제이미에게 공부하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예석은 제이미에게 한국사람 다 됐다면서 놀리고 사진을 가져다가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귀엽다고 중얼거렸다.


“어릴 때는 다 귀엽지…. 너무 부끄럽다. 그만 돌려줄래?”

“좀만 더 볼래요. 제이미, 저 이 사진 빌려주면 안 돼요? 복사해서 갖다 줄게요.”


제이미는 그러라고 했지만 예석이 돌려주지 않는대도 괜찮다는 태도였다. 예석은 그 다음 주 월요일, 바로 도서실에 가서 사진을 복사해달라고 부탁했다. 자주 가서 얼굴을 익히고 조금씩 친해진 도서부원 친구가 사진에 나온 애가 누구냐고 물었지만 예석은 비밀이라고 했다. 예석은 제이미가 아무렇지 않게 오케이 할 줄 알았으면 사진을 다 달라고 그럴 걸 그랬다고 아쉬워했다. 졸업앨범에도 어색하게 찍은 반명함 사진 하나밖에 나오지 않은 제이미를, 제이미의 사진을 간직할 수 있어서 뿌듯했다.


예석은 제이미에게 줄 사진을 고르다 깜빡 잠들었다. 제이미를 만나러 가는 토요일, 사진을 가져오는 걸 깜빡했단 걸 학교에 가는 버스에서 알아챘지만 잊어버렸다.     





 



예석은 시험기간을 전후로 하나둘씩 친구를 사귀었다. 예석이 반에서 높은 등수를 얻자 네댓 명의 친구들이 같이 밥을 먹자고 다가왔다. 처음엔 마냥 기뻤지만, 만약 자신이 공부를 못했다면 친구가 생기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네댓 명의 친구들 중 가장 중심에 있던 수희는 특히 예석에게 장난치기를 좋아했다. 예석도 잠재돼있던 장난기를 꺼내 같이 장난을 치고 어울렸다.


학교 친구들을 사귀면서 제이미를 찾아가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이어서 2학년부터는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혼자서 공부해서는, 학원을 다니고 과외를 받는 애들보다 잘할 수 없다는 걱정이 들었던 차에, 아빠가 먼저 예석에게 이제부터 학원을 다니라고 얘기했다. 아빠는 예석이 서울권 대학을 갈 수 있다고, 무조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 그럼 자신들처럼 고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살 거라면서. 예석이 엄마도 서울권 대학을 나오지 않았느냐고 물었지만 아빠는 그 질문에 화를 냈다. 엄마가 잘 안 된 건 돈도 안 되는 피아노 같은 걸 해서 그렇다고, 그러니 너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해야한다는 매일 듣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예석은 방에 들어가면서 입술을 삐죽거렸다. 엄마가 안 된 건 아빠 같은 사람을 만나서 그렇지. 평생을 가도 뱉어낼 수 없을 말을 삼켰다. 그럴 때마다 꼭 어딘가 따끔거렸다.


수희의 생일파티를 가기 위해 몰래 학원을 빠졌다. 예석은 사귄지 얼마 안 된 수희의 생일파티에 가기는 부담스러워서 학원 핑계로 못 간다고 말했지만, 수희가 꼭 파티에 와달라며 신신당부를 해서 하는 수 없이 말을 바꿨다. 다른 애들은 서로 생일선물로 뭘 줄 건지 얘기하고 있었다. 예석은 가능한 선에서 작은 것을 준비하려던 생각도 바꿔야 했다. 선물을 사느라 이틀이나 저녁을 사먹지 못했다. 제가 진심으로 고마워서 주는 선물이 아니라서 그런지 아깝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다. 문득 제이미에게 작은 선물을 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제가 아끼는 캐릭터 공책이었다. 너무나 아끼던 것이라도 제이미에게 주는 것은 아깝지 않았다. 예석은 제이미 생각이 나면 전화라도 하고 싶었지만 왜인지 점점 용기를 내는 일이 어려웠다.


수희네 집은 학교에서 멀지 않은 아파트였다. 햇볕이 넓게 들어오는 베란다와 화분이 즐비한 거실, 커다란 소파, 연분홍색 침대와 널찍한 책상과 차곡차곡 옷이 개어져있는 옷장이 있는 방까지, 예석은 수희네 집을 구경하면서 거기 있는 모든 것이 부러웠다. 부러워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얼마나 입매를 굳혔는지 몰랐다. 예석의 선물은 머리띠와 필통이었다. 수희는 친구들이 준 선물을 그 자리에서 바로 포장을 뜯어보았다. 예석은 수희가 얼마나 좋아할지 보고 싶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 이거 비슷한 거 있는데.” 수희는 시큰둥해했다.


그래도 고맙다고 말하면서 예석에게 웃어 보였지만, 예석은 가슴이 철렁했다. 제가 너무 보잘 것 없는 것을 줘서 친구들이 저와 노는 것을 싫어하면 어쩌지, 걱정이 들었다. 수희네 모부님이 차려준 상엔 평소엔 자주 먹지 못하는 피자, 치킨, 케이크 같은 음식들이 있었지만 예석은 마음이 편치 못해서 잘 먹지 못했다.


돌아가는 길엔 어쩐지 눈물이 났다. 누구에게도 있는 그대로 설명할 수 없는 울적한 기분이었다. 예석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갔을 때 엄마와 아빠는 이미 예석이 학원을 빠진 걸 알고 화가 난 상태였다. 특히 아빠는 예석을 보자마자 손찌검을 했다. 거실 바닥에 쓰러진 예석은 눈물이 쏙 들어갔다. 네 학원 비 때문에 얼마나 더 허리띠를 졸라매고 사는지 아느냐고, 엄마는 학교 급식실에서 일하면서 살이 빠지고 허리 디스크가 생겼다고, 아빠는 화를 냈다. 예석은 속상한 마음에 냅다 소릴 질렀다.


“그러게 누가 학원 보내달랬어?! 왜 나 때문에 힘들다고 그래? 왜! 누가 나 낳아 달랬어? 나 같은 거 안 낳았으면, 안 힘들었을 거 아냐!!”


예석은 아빠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기가 무서웠다. 아빠한테 빗자루로 맞는 것도 무서웠다. 그대로 문을 박차고 도망쳤다. 하염없이 달리고 또 달리면서 언제라도 아빠가 차를 타고 쫓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벌써 사위는 어둡고 고요했다. 이런 조용하고 광활한 시골 동네에선, 언제라도 누가 죽어도 소리 없이 묻히면 그만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멀리, 더 멀리, 벗어나고 싶었다. 예석은 감리교회 앞에서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갔다. 농협 앞에 내려서 공중전화로 제이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에게 전화한지가 한참인데도 그 번호를 손에 자동입력 되어있는 것처럼 빠르게 눌렀다.


“예석! 무슨 일이야?”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예석은 달려가 제이미를 덥석 끌어안았다. 한없이 투정부리고 싶은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대로 눈물을 글썽이며 다짜고짜 집을 나왔다고 말해버렸다. 제이미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깜짝 놀란 얼굴로 예석을 쳐다보았다.


예석은 제이미가 저를 위로해주면 울음을 몽땅 터뜨릴 것 같아 꾹 참고 있었다. 그 순간 제이미와 너무나도 가까웠고, 눈높이가 비슷해서 조금 얼떨떨했다. 제이미도 그렇게 말했다. “키가 많이 컸네. 좀만 있으면 나보다도 크겠어.” 예석은 얼떨결에 웃었다. 변화무쌍한 예석의 표정 변화에 제이미도 살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제이미는 자신의 집으로 예석을 데려갔다. 예석은 선생님 댁에 가는 건 처음이라 조금 떨렸지만, 전국 시내 어디에나 존재할 듯한 적갈색 벽돌 빌라 건물로 제이미를 따라 들어가면서 긴장이 풀렸다. 중국집 전단지와 대출전화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녹슨 문을 열고 들어가니 웬걸, 예석은 그렇게나 휑한 집은 처음 본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작거나 허름한 집이라도 세간은 죄 갖추고 사는 모양새인데, 제이미가 사는 집은 자신이 외로운 이방인임을 증명하듯 단출하고 소박했다. 침대 없이 바닥에 요를 깔고 자는 걸 보고 예석은 딱하단 생각까지 했다. 외국에선 입식 생활을 한다던데. 불편하지 않냐고 물으니, 제이미는 처음엔 등이 많이 배기고 힘들었는데 이젠 적응돼서 괜찮다고 말했다.


예석은 제이미가 끓여준 라면을 함께 먹고, 제이미가 준 칫솔로 양치하고, 제이미의 헐렁한 티셔츠를 빌려 입고, 한 장 더 깔아놓은 요 위에 같이 누웠다. 엄마가 잠투정하는 저를 달래기 위해 동화책도 읽어주고 배도 찬찬히 두드려주던 일곱 살 때 이후로 다른 사람과 같이 자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때는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았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됐을까. 아무리 아빠가 그렇게 무섭게 해도 엄마가 제 편이 되어준다면 괜찮을 텐데. 언제부턴지 엄마는 예석에게서 관심을 끊어버렸다. 엄마가 말해주기 전까지 예석은 그 까닭을 영영 알 수 없을 터였다. 예석은 다시금 속이 상했다.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는지 제이미가 부쩍 다가왔다.


“많이 힘들어?” 예석이 고개를 젓자, 제이미가 되물었다.  “힘들었구나….” 제이미가 예석을 두 팔로 감싸 안아주었다. 예석은 제이미의 긴 팔을 눈물로 적시며 제 고초를 이야기했다. 제이미는 예석의 등을 토닥이며, 하나도 빠짐없이, 온몸으로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예석의 말이 앞뒤가 없고 발음이 뭉개지고 눈물이 섞이고 횡설수설이어도, 제이미는 차분히 들어주었다. 덕분에 그 밤의 이야기들은 세상 밖으로 흩어지지 않았다.


“아까 엄마한테 전화드렸지?”

“네.”

“잘했어, 예석.”

“선생님, 내일은 뭐해요? 학교 가요?”

“아니. 놀토잖아.”

“그럼 뭐하세요?”


제이미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스스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는 얼굴로 말했다. “옛날 집에 가보려고.”


그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솔직하지 않았다면, 예석은 자신이 제이미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제이미에게 미안함만 들어서, 그를 찾는 일이 더 어렵고 힘들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같이 가도 돼요?”


예석은 어느새 초롱초롱해진 눈으로 물었다.


제이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맑은 눈동자가 스르르 감겼다. 바깥은 가끔 차가 지나가는 소리나 누군가 전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예석은 잠이 들면서, 제이미의 팔이 무겁게 느껴져 옆으로 치워내고 금방 바깥의 소음과 커튼 사이로 새어나오는 불빛에 적응해 꿈나라로 빠졌다.     





     




예석은 제이미를 따라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로 가고 있었다. 예석은 외국인인 제이미가 대체 어떻게 초행길을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면서 갈 수 있는 지 신기했다. “그야 몇 번이고 상상으로 가봤으니까.” 예석은 그렇게 꺼낸 말 속에 제이미가 얼마나 망설이고 고민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 도시는 한창 재개발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듯이 곳곳엔 무채색 아파트 단지가 건설 중이었고 널찍한 육차선 대로는 새로 닦은 듯 아스팔트가 반질반질했다. 어디서든 시멘트와 철골 냄새가 났다. 예석은 그런 냄새부터 조직적이고 도회적인 풍경까지 모든 것이 낯설게 다가왔다. 조금 겁이 났지만, 저보다도 제이미가 더 겁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이 한국에서 살았어요? 지금 가는 집이 어릴 때 살았던 집이라는 얘기죠?”


열심히 창밖을 보던 제이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릴 때가 기억나냐는 예석의 물음엔,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모르겠어.” 제이미는 갑자기 그 모든 게 자신 없고 불안한지 표정이 굳어있었다. 예석은 맞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버스는 골목으로 접어들면서 느려지고, 창밖 풍경은 점차 맑고 단란해졌다.


제이미는 어느 지점에 선 채로 한참을 두리번거리고 중얼거렸다. 그곳엔 4층의 상가 건물이 있었다. 예석도 제이미가 보여준 주소를 보고 주위를 살폈지만 그 건물이 있는 번지수가 맞아서 당황스러웠다. 오랜 고민 끝에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쓸쓸하게 돌아가면 어쩌지? 그런 걱정이 그 말간 얼굴에 고스란히 비쳐서 예석을 조금 서글프게 했다. 제이미를 위한 마음은 어떤 비상한 용기를 예석에게 주었다. 예석은 제이미를 더 이상 황망하게 둘 수는 없다는 생각에, 그의 손을 잡고 근처 부동산을 찾았다. 부동산 중개사는 예석이 보여준 주소가 그곳이 맞다고 했다.


“원래는 빌라, 화평빌라가 있었는디 그끄러껜가 화재가 났지 뭐요. 그라서 거 살던 사람들 다 딴 디 가버리고, 어데로 가부렀는지는 내도 모르제.”


제이미는 이상하게 극도로 차분한 얼굴이었다. 예석은 그런 제이미가 염려되어, 일부러 더 활발하게 말을 붙였다. 중개사와 몇 마디 더 말을 나누고 부동산을 나서고, 다시 그 건물 앞으로 갔다. 건물 1층에 자리한 미용실 유리창에 두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예석은 제이미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모든 게 실망스럽고, 아무것도 괜찮을 수가 없는데, 그렇게 물은 스스로가 싫다고 예석은 생각했다.


제이미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괜찮아.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난 정말 잘했다고 생각해. 만약 두려워서 여길 오지도 않았다면 난 평생 후회했을지도 몰라. 그래서 정말로 괜찮아. 최선을 다했어. 그거면 된 거야.”


예석은 그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같이 먼 길 와줘서 고마워.”


예석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더는 서로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기를 바랐다. 예석은 근처 동네를 걸으면 옛날 생각이 나지 않겠느냐며 제이미를 이끌었다. 제이미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나는 것 같다며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예석이 좋아라하는 모습을 보면서 덩달아 기분이 나아졌기 때문이었다. 동네는 오래된 것들의 정감을 곳곳에 아직도 간직하고 있었다. 제이미는 기억나지 않는 세 살배기 때 그대로인 고향에 돌아온 듯, 그 모든 포근한 정감을 온몸에 두르고 가슴으로 느꼈다.     








예석의 집은 시내 근처로 이사를 왔다. 아직 개발되지 않은, 아파트 단지 뒤편의 논밭에 세워진 컨테이너 집이었다. 예석은 그런 집에서 산다는 걸 다른 애들이 아는 게 싫었고 혹시라도 그 아파트 단지 애들과 마주칠까봐 두려워서 다른 먼 길로 돌아서 다녔다.


여덟 명이 함께 우르르 몰려다니던 수희네 무리에서 나온 지는 오래였다. 처음엔 영주와 수희가 한 애가 눈치가 없고 싸가지도 없다면서 무리에서 은근슬쩍 내보내고 따 시키더니, 그렇게 한 명씩 무리에서 쫓겨나는 걸 보면서, 예석은 그에 동조해야 할지 외면해야 할지 몰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중에서 가장 친하던 윤지가 따돌림을 당하자 예석은 스스로 무리에서 나와 버렸다. 수희네 패거리는 처음의 네 명으로 돌아갔다. 그 네 명이서 깔깔 대며 복도를 쏘다닐 때 예석은 다시는 생일파티 같은 건 가지도 말아야지 생각했다. 단짝인 윤지와 둘이서만 다녔다. 윤지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고 교외 대회에서 상도 여러 개 받은 아이였다. 예석은 조용하고 다감한 윤지와 둘이서만 지내는 게 마음 편했다. 덩달아 다른 친구들도 자연스럽게 사귀었다.


시내 쪽으로 이사 온 뒤로는 제이미와 만난 적이 없었다. 예석은 언제든지 학교에 가면, 그 영어교실에 가면 제이미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제이미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친구란, 그런 존재인 거구나. 예석은 생각했다. 늘 그 자리에 있으면서, 언제든 자신이 찾아가면 반갑게 맞아주고 위로를 주는 존재. 예석은 하나뿐인 특별한 친구인 그를 그렇게 여겼으면서도, 정작 그에게 자신이 그런 존재가 되어주진 못했다. 단지 어리기 때문이었을까. 무엇도 제대로 자리 잡히지 않고 여물지 못했기에, 이미 커다란 나무로 자란 그에게 아낌없이 받고만 싶었던 건 아닐까?


예석은 그를 생각할 때마다, 그런 아쉬움과 그리움을 느꼈다. 돌이킬 수 없는, 소중한 사람에 대한 무한히도 애틋한 마음. 제이미는 제게 늘 애틋한 비밀이었다.


학원 앞에서 마주친 수현은 예석에게 슬러시와 떡꼬치를 사주었다. 원어민 쌤, 캐나다로 돌아가셨대. 처음엔 예석은 말을 잘못 알아듣고 제이미가 죽었다는 줄 알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을 땐, 예석은 제이미가 제게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만날 수도 없게 제이미는 너무나 먼 곳으로 가버것이다.


“언제? 넌 그걸 어떻게 알았어?”


수현은 조금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저번 주에 수인이 운동회 보려고 갔다가 들었어. 다른 나라 쌤이 온다고 하더라.”


예석은 그 학교에, 영어교실에, 제이미가 없다는 것을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학교에서 제이미와 함께였던 시간은 1년뿐이었지만 그 1년은 제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지금까지 그를 알고 지나온 시간은 그러한 조건 없는 사랑과 보살핌이란 누구라도 누구에게라도 나누어줄 수 있다는 것을 느낀 시간이었다. 문득 예석은 한 번도 제이미가 먼저 자신을 찾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예석은 울컥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아마도 그게 그의 배려였겠지. 더는 투정부리고 속상한 걸 털어놓기만 하는 상대가 아니라, 한 발짝 나아간 세상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니까.


그럼에도 예석은 제이미에게 고맙다고 말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더 많이, 더 진심을 담아서, 그가 넘치도록 느낄 수 있게 고맙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당신이 있어서 외로움만 주었던 좁은 길들을 견딜 수 있었다고. 보잘없는 곳에서 자란 보잘없는 자신을 알아봐줘서, 빛나는 존재라고 말해주어서 고마웠다고.


예석은 제이미가 방학숙제를 위해 알려주었던 이메일 주소로 편지를 썼다. 어떻게 인사도 없이 떠날 수가 있었냐고, 원망하는 말들을 써버렸지만 결국은 다 지워버렸다. 예석은 다시금 주체할 수 없이 슬퍼져서 제이미가 생각났지만, 동시에 그에게 미안했다. 힘들 때만 그를 찾고 위로받으려 했던 제 어린 마음을 돌봐주느라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주지도 못했었다. 자신이 본 것은 그의 짧은 편지 몇 장뿐. 예석은 대신 고마운 것들만 얘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줄만 그에게 미안하다고 썼다. 그 모든 고마움보다도 그에 대한 안타까움이 커져버려서, 다시는 그를 기쁘게만 떠올릴 수 없을 듯했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순간 모든 일이 슬픈 기억으로 남아버리기에, 다시는 미안한 일들을 얘기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제이미에게 답장이 온 건 몇 주 후였다.


제이미는 먼저 미안하다는 말로 편지를 시작했다. 더 오래 한국에 머물고 싶었지만, 급박한 사정이 생겨 돌아오게 되었다고 했다. 어머니가 위중한 상태에 있다고 했다. 예석은 제이미가 보여주었던 사진들 중 그의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했다. 짧은 곱슬머리에 검은 돌처럼 매끄러운 얼굴과 눈동자, 힘차게 활짝 지은 미소, 확연히 다른 생김새이나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는 두 모녀의 모습을 기억했다. 그가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들으니 감정을 추스를 여지가 생겨났다.


결국 언젠가 떠날 수밖에 없는 이방인이었음을 생각하며, 그의 삶의 궤도에 자신이 한 번이라도 걸려있었음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사람이 가장 슬플 때는, 사랑하는 사람과 모든 걸 함께하고 싶지만 그가 고통 받을 때만은 함께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라고 생각해. 아무리 그를 위로하고 그의 손을 잡고 있어도, 나는 그의 고통을 느낄 수 없고 그가 사라진다고 해서 나 또한 사라질 순 없어. 그가 세상에 남긴 것들을 보전하고 그를 기억해주어야 하니까. 그게 사랑하는 사람을 진정으로 위하는 거겠지. 어쩌면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슬프지만, 그렇게 단단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어.

더는 너와 함께 있어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그렇지만 믿고 기억해주렴. 내가 너와 언제나 함께라는 사실을 말이야. 그건 투명한 진실이고 변하지 않아. 세상 모든 것이, 심지어 너 자신마저도 스스로 그 사실을 의심하게 만들겠지만, 잊지 말고 기억해주기를 바라. 나도 그럴게. 너를 기억하며 살아갈게.」    

 

그에게서 받은 마지막 답장에는, 이 세상에서 오직 저만을 위한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누구도 저 같은 아이에게는 진심으로 해주지 않을, 그런 말이었다.     


사람은 스스로 변하지 않는다면,

다른 어느 곳을 가더라도 변하지 않아.

네가 있는 곳을 조금만 더 좋아해줘.

그리고 너를 조금만 더 좋아해줘.」     













예석은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수능을 준비하고 대학에 들어가면서, 제이미란 사람을 많이 잊어갔다. 그의 목소리, 그의 말투, 그의 미소, 알아보지 못했던 그의 힘겨운 노력이 깃든 한국말, 통쾌한 웃음소리……. 그러나 그와 함께였던 시간의 추억들은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같이 길가에서 따 먹은 보리수 열매의 씁쓰름한 맛과 빨개진 혀를 보고 웃었던 봄,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서 처음으로 그의 진심 어린 배려에 감동했던 여름, 황금 들녘 사잇길을 걸을 때 그의 감상을 들으며 거름 냄새 진동하던 그 시골길도 아름다운 세계의 한 장면임을 되새겼던 가을, 두껍게 눈 덮인 길을 지나와 아주 뜨겁고 달디 단 고구마를 나눠먹고 따듯한 정을 느꼈던 겨울.


예석은 그때 그와 비슷한 또래가 되어서야 실감할 수 있었다. 당신은 어떻게, 유구한 삶에서 찰나로 스쳐간 작은 아이에게 그토록 헌신과 사랑을 줄 수 있었는지.


그가 어디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고 사랑하며 살아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편지를 썼다. 오랫동안 간직했던 마지막 편지를 보내며, 예석은 어린 날의 자신과도 화해를 했다.


알고 있나요? 당신이 내게 해준 모든 말은 나를 지금껏 살도록 해주었어요. 당신이 내게 얼마나 크고 깊은 의미였는지, 그때 말했다면 당신은 부담스러워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니 지금,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렇지만 나는, 당신이 썼던 글에서 하나만은 다르게 말하고 싶어요. 사람이 가장 슬플 때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가장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느끼는 때라고 생각해요. 나는 당신과 함께일 때보다 지금 더 나은 사람이 되었지만, 나는 언제라도 당신과 함께일 수 있다면 부족한 사람이 되어도 기쁠 테니까요.

만약 언제라도 어느 낯설고 먼 땅에서 당신을 우연히 만나게 되더라도, 나는 당신을 보면 그렇게 말할 거예요. 당신을 사랑한다고요. 당신을 오랜 시간동안 보지 못했지만, 그때의 나는 당신을 몰랐지만 지금은 그때의 당신을 모두 이해해요, 그래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아마 나는 영원히 당신과 같은 사람은 될 수 없을 거예요. 그래서 나는 당신을 한없이 신뢰하고, 한없이 기억해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떠나버리고 황량한 공터가 되어버린 그곳이 당신을 추억하는 유일한 묘비처럼 남아있어요. 나는 종종 그곳에 들러 고개를 숙이고 묵념하듯이 당신을 기려요.

기억해주세요. 당신은 늘 내 안에 살아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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