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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미완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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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Aug 29. 2022

비오는 날의 수채화

2020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내렸다. 물웅덩이 위에 빗방울이 툭, 투둑, 툭 떨어지는 박자가 내면의 속삭임과는 어긋나있지만,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에 담은 색채들은 그늘을 걷어내면 영롱했다.

정류장엔 비를 피하는 사람 반,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 반. 옹기종기 모인 목소리와 기다림 속에 어디로 갈지 모르던 내가 서 있었다. 어쩌면 하나의 덩어리처럼 아무 의미 없게 보이던 사람들 속에서 가장 작은 너를 본 건, 사소하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우연이었다.

학교를 지나는 초록색 버스는 대체로 같은 방향으로 갔다. 버스가 오면 한 차례 수십 명이 몰려서 타고, 다음 버스가 오면 또 한 차례 인파가 꾸역꾸역 들어가서 탔다. 나는 붐비는 버스가 싫어서 가장 늦게 버스를 타는 편이었다. 특히나 비 오는 날이면, 갖가지 색과 형태의 교복들이 부딪치고 목소리가 섞이면서 나는 냄새가 있는데 그게 정말 고역이었다. 같이 섞이고 싶지 않았다는 게 맞다. 친해지지 못한 반 애들을 두고, 내가 원하지 않아서 거리 두는 거라고 여기는 것처럼.

그 애도 나처럼 늦게 버스를 타는 몇몇 중 하나였다.

늦게 타면 자리에 앉아서 갈 수도 있고, 퇴근시간이 맞물리기 직전이라 길이 막히지 않아서 전 버스들과 비슷하게 도착했다. 버스에서 나는 주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세상과 나를 단절한 채 음악을 들으며 창밖을 보거나, 부족한 잠을 채우거나, 여기저기 시선을 배회하게 내버려두거나, 시선이 정지한 곳에 앉아있는 그 애를 얼마간 쳐다보곤 했다.

어쩌다 재수가 없는 날이면 늦게 버스를 타도 자리에 앉지 못해서 서서 가야만 했다. 널찍이 서서 휘청거리고 있었지만, 다음 정류장에서 탄 사람들이 밀려오면서 나는 거의 맨 뒤편에 서 있었다. 전봇대처럼 눈에 띄게 머리가 솟아있는 채로 휘청거리다 보면 멀미하기 십상이었다. 무언가 한 군데 시선을 두고 정신을 차려야만 하는데, 내 쪽으로 밀려온 그 애의 갈색 정수리가 바로 내 어깻죽지 밑에 와있었다.

단발이라기엔 조금 길어서 어깨에 찰랑거리고, 동그란 안경테 걸친 콧대는 날렵해서 어쩐지 차가운 인상을 풍기고, 옅은 색 입술은 굳게 다물고 있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궁금했다. 궁금하다고 생각했을 때 고개를 돌린 그 애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겁이 난 것처럼 굳어진 얼굴로 앞을 보고, 내릴 때까지 한 번도 옆을 보지 않았다. 좌석 밑에 굴러다니게 둔 내 접이식 우산은 내가 가장 아끼던 초록색 운동화 발코를 흥건하게 적셔 놨다.

학교에서 학원까지는 삼십 분에서 사십 분 정도 걸렸다. 정류장에서 내리면 바로 미술학원이 건물마다 있는 화방거리였다. 그 거리는 미술학원 다니는 애들 덕분에 먹고 사는 동네였다. 다니는 사람이 죄다 넥타이 푸르고 팔에 토시 낀 애들이나 앞치마 입은 선생이나 근처 식당이나 화방, 아니면 로터리에 있는 정형외과 병원 사람들이었다. 처음 미술학원을 다니고 싶다고 생각이 들어 이곳에 왔을 때 나는 어디로 가면 좋을지 몰라서 한참을 돌아다녔다. 우리 학교 애들이 제일 많이 다니는 학원은 목화학원인데, 나는 학교를 정말 싫어했기 때문에 애들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더구나 가장 크고 사람 많은 학원이면 나 같이 겉돌기 쉬운 애를 챙겨주지 않을 것 같아서 안 끌렸다. 그 건너편에 있는 건물을 통째로 다 쓰는 큰 학원은 애니메이션과 위주라고 해서 발이 가지 않았고, 결국은 그냥 정문 앞에서 연습장이랑 볼펜 나눠주던 학원으로 갔다.

선생님도 착한 것 같고 같이 수업 받는 애들은 다 다른 학교인데 대체로 수다스럽긴 하지만 다들 착한 것 같고, 어릴 때부터 다니고 싶었던 미술학원에 대한 기대가 있어서 처음 얼마간은 학원을 다니는 게 무척 신났다.

긍정적인 감정이 오래가지 않은 건, 학원 수업이 너무 지루했기 때문이다. 한 일주일은 선 긋는 연습만 시켜서 4절지 스케치북을 4B 연필로 죽죽 그으면서 다른 애들이 그림 그리는 걸 구경하는 데만 시간을 보냈다. 그 다음엔 소묘로 원구를 그리라고 해서 며칠을 하얀색 원구만 쳐다보고 손바닥에 흑연을 묻혔다. 나는 얼른 더 잘 그리고 싶고, 잘 그리는 법을 배우고 싶은데, 내가 간과한 사실은 이 화방거리의 모든 미술학원이 가르치는 건 대학입시를 위한 실기라는 것이었다.

나는 뒤늦게 혼자 들어온 학생이고 시의 외곽에 있는 학교에서 온 애라서 다른 애들과 잘 친해지지 못했다. 처음 고등학교 들어올 때도 그랬는데. 나는 씁쓸한 기시감을 느꼈지만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매일 7교시가 끝나면 학원에 가고, 늦은 밤 집에 오는 일과만 반복되었다. 수업이 끝나면 학원 버스가 집마다 데려다주는데 우리 집은 가지 않는 방향이라며 데려다주지 않았다. 별 수 없이 버스를 타고 가면 한 시간쯤 걸려 집에 도착했다. 심야의 버스에는 주로 라디오를 틀었고 나는 볼륨을 더 키워서 음악을 들었다. 1기가의 네모난 은색 엠피쓰리는 화면의 반이 까맣게 돼있지만 아예 안 보이는 것보다는 나았다. 전에 쓰던 건 화면이 고장 나고도 일 년을 더 갖고 다녔는데, 아예 화면이 없는 미키마우스 엠피쓰리나 내 거나 똑같은 거 아니냐고 생각했다. 밤에는 주로 나를 위로해주는 따듯한 가사의 음악을 들었다. 그렇다고 너무 눈물 나게 하는 슬픈 음악은 기피하고, 나는 음악 취향도 적당한 것을 추구했다. 음악에도 적당한 온도와 습도가 필요했다.

수업 시간이 조금 조정되면서 나는 학원에 가기 전에 저녁을 먹게 됐고, 좀 더 늦게 귀가하게 됐다. 학교 앞에서 버스를 타면 여지없이 그 애를 봤다. 반묶음에 어중간한 길이의 갈색 머리. 그날처럼 비 오던 날 그 애에게서 어떤 퀴퀴한 냄새도 나지 않았던 걸 생각했다. 나는 어떤 냄새도 없는 사람이 부러웠다. 자기를 잘 드러내지 않고도 만만해 보이지 않고, 별 다를 게 없어도 무언가 특별한 자기만의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사람을 부러워했다. 다르고 싶지만 달라지지 못하던 나의 눈에는 바지를 입은 그 애가 남달라 보였다.

나도 바지 사주면 안 돼? 엄마한테 물었다가 혼나기만 했다. 일학년 때보다 커가지고 교복 바꾼 게 엊그젠데 뭘 또 사겠다고 그러냐고. 둘 다 어디서 물려받은 거면서. 나는 어중간한 길이의 치마가 싫었다. 무릎을 넉넉하게 덮고 주름이 좁은 회색 치마를, 선생님께 혼나는 게 무서웠는지 다른 사람들 시선이 무서웠는지 줄일 생각도 못했다.

숫자 두 개의 초록색 버스가 왔다. 마을버스처럼 조그만 버스에 자리가 적었는데 이미 몇 대나 보낸 뒤여서 편하게 앉아서 갈 수 있었다. 가방도 옆자리에 두고 푹 젖은 우산도 발치에 둘 수 있고. 그 애는 반대편 창가에 앉았다. 나는 진심으로 어떻게 이 지루한 시간을 음악도 안 듣고 갈 수 있는지 신기했다. 에어컨 바람이 싫어서 돌려버리고, 나도 한번 그 애처럼 조용히 가보고 싶어서 이어폰을 귀에서 뺐다. 빗줄기가 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걸 관찰했다. 오랫동안,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내 치마처럼 짙은 회색이던 세상은 금세 어두워졌다. 시의 경계를 넘으며 거칠어지던 폭우는 다행히도 내가 내리기 전에 그쳤다.

매일 저녁을 사먹는 것도 고민이었다. 선택지는 고작 밥버거와 김밥천국이었지만.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는 길에 밥버거 집을 봤는데 자리가 꽉 차있기에 길 건너편에 있는 김밥천국에 눈을 돌렸다. 비가 적시고 간 거리에는 반딧불이 같은 먼지와 불빛이 떠다니고, 나는 분명 허기가 졌는데 그게 물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마음의 허기라고 느껴졌다. 우수에 젖어서는 무슨 생각을 못할까. 주머니 속의 교통카드 지갑을 만지작거리며 초록불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

이상하게 나는 고개를 돌려 보기도 전에, 처음 듣는 그 목소리가 그 애의 것인 걸 알았다. 돌아본 그 애 얼굴이 약간의 주저한 기색과 거리의 습기를 머금고 있는 것도 보았다.

“같이 밥 먹을래?”

나는 바보 같이 눈만 깜빡였다. 그 순간 버스에 우산을 두고 내렸다는 걸 알았다.     








우리는 그날부터 같이 저녁을 사먹었다. 둘이 돈을 모으면 밥버거나 김밥보다는 더 좋은 걸 사먹을 수 있었다. 죠스 떡볶이나 국대분식, 돈까스클럽을 돌아가며 먹거나 어떤 날은 조금 더 걸어가서 롯데리아에서 콘아이스크림까지 먹었다.

승주는 김밥천국 건물에 3,4층을 쓰고 있는 대영학원을 다녔다. 여기 학원이 너무 많아서 어딜 다닐지 고민하지 않았냐고 물었는데 승주는 가장 학원비가 싼 곳을 찾았기 때문에 별로 고민하지 않았다고 얘기했다. 그래도 대체로 비슷비슷해서 거기라고 수업의 질이 떨어지거나 선생이 별로라거나 하진 않는다고, 자기 다니는 곳도 대학 합격생을 많이 배출한 곳이라고 자랑했다. 나는 세종대를 가고 싶었고, 승주는 홍대를 가고 싶다고 했다.

“왜 세종대가 가고 싶어?”

“실기는 아직 안 되는데, 성적 보면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오올, 성적 좋은가 본데.”

“너는 왜 홍대야?”

“그냥, 미대는 홍대가 짱이잖아.”

그 돈을 써가면서 학원을 다니는데 이름 있는 대학을 못 가면 자기는 집에서 맞아 죽을 거라고, 홍대 안 되면 자기도 세종대를 가겠다고, 대학 얘기를 즐겁게도 잘하던 승주는 보기보다 말이 많았다. 워낙 과묵해서 대체로 얘기를 듣는 편인 나한테는 그래서 차라리 수다스러운 승주가 잘 맞는다고 느꼈다.

처음 같이 통성명을 하고 밥을 먹은 날, 승주는 자기도 버스를 타고 간다며 나한테 집에 갈 때 같이 가자고 말했다. 보통 학원 다니는 애들은 다 승합차 탈 때 나만 승합차가 안 간대서 소외감 느꼈는데 승주도 그렇다니까 왠지 모를 동질감과 동지의식이라도 들었는지 기분이 좋았다.

승주네 학원이 정리를 빨리 시키는지 항상 일찍 나오는 편이라서 나는 수업 끝나자마자 제일 먼저 청소를 끝내버리고 일등으로 나오고는 했다. 건물을 나오면 건너편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승주가 바로 보였다. 나는 혼자 있을 때면 너무 심심해서 엠피쓰리 없이는 못 사는데 승주는 기다림이 지루하다거나 혼자 있는 일이 아무렇지 않은지, 버스 오는 쪽을 바라보고 있다가 날 보면 바로 손을 흔들었다. 날 바라보며 반갑게 짓는 미소에 괜스레 내 마음이 다 따듯해지곤 했었다. 승주를 따라서 같이 손을 휘젓고 활짝 웃어 보이다가도, 혹시 내 표정이 바보 같아 보이진 않을까 아님 너무 좋아하는 내가 유치하고 이상한 걸까 하는 걱정을 동시에 지으며 눈부신 초록불에 횡단보도를 건넜다.

우린 둘 다 맨 뒷자리를 좋아해서 같이 버스를 탈 때마다 제발 맨 뒷자리가 남아있게 해주세요 하고 빌고 또 빌었다. 대체로 맨 뒷자리는 비어있었고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교통카드를 찍고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자리에 잽싸게 앉았다. 맨 뒷자리 앉은 게 뭐가 그리 좋다고 키득키득 거리면서 미소가 입가에서 떠나질 않았다. 누군가와 함께라는 건 생각보다 아주 많은 힘을 얻는 일이었다. 승주가 있어서 더 이상은 혼자 쓸쓸함에 잠긴 채로 멍 때리는 일도 없었고, 창밖으로 지나는 짙은 어둠과 무수한 인공 불빛들을 보며 어떤 의미부여를 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고, 나에게 힘을 주는 감성적인 음악을 들으며 억지로 힘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대신 우리는 서로에게 한시도 눈을 떼지 않은 채 수다를 떨거나 같이 이어폰 한 짝씩 귀에 꽂고 음악을 들었다.

“너는 혼자 있을 때나 누구 기다릴 때 음악 안 들어? 그럼 심심하지 않아?”

음악 듣는 걸 원래 별로 안 좋아하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봤었다.

“나 엠피쓰리가 없어서…. 핸드폰엔 달랑 노래 두 개밖에 없고, 무슨 애니밴드 TPL이랑 프로미스. 그게 언제 적 거야. 잘 안 듣다 보니까 별로 심심하진 않은데.”

“아, 그렇구나.”

나는 혹시라도 승주가 상처 받을까봐 조마조마했다. 안 그래도 승주는 학원을 겨우 어머니 졸라서 다니는 거라고 얘기했고 돈을 아껴야 한다는 얘기도 곧잘 하는 걸 보니 집 사정이 많이 안 좋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늘 밝고 낙천적인 걸 보면 승주는 집이든 어디든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 같았다.

나는 그런 승주가 무척 부러웠다. 내가 승주가 같은 애이려면 다시 태어나거나 다른 집에서 태어나야만 했을 텐데. 그럴 순 없겠지.

그때도 나는 어렸지만, 어린 마음에도 사람은 누구나 어쩔 수 없는 짐을 각자 가지고 살아가는 거라는 생각을 했다. 정작 승주에겐, 승주가 같이 착하고 밝은 애에겐 그런 무거운 짐이나 깊은 상처 같은 건 없으리라 믿고.

“괜찮아, 대신에 학교에서 음악 많이 틀어주잖아!”

“맞아. 우리 학교 음악 진짜 많이 틀어주지. 쉬는 시간에도 점심시간, 청소시간에도.”

“애들이 틀어달라면 방송실에서 다 틀어주나 봐. 하긴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 틀어달라고 난리긴 하던데. 나는 가수 많이 몰라서 그냥 들으면 다 좋고 보면 다 멋있더라.”

“그래? 너는 좋아하는 아이돌 없어?”

“응. 별로 관심 없어. 아빠가 아이돌 그런 거 좋아하고 돈 쓰지 말라는 것도 있지만, 원래 티비도 잘 안 보고 노래도 잘 안 듣고 그러거든.”

간간이 듣는 그런 종류의 얘기에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서 대체로 우물쭈물 거리고는 했었다.

“근데 네가 들려주는 노래는, 다 좋더라?”

“진짜로?”

“어! 지인짜로. 성지 넌 음악 좋아한다 그랬지?”

“으응.”

“그래서 그런가봐, 네가 그때그때 틀어주는 음악이 다 좋아. 저번에 비올 때는 비오면 들어야 되는 노래라고 들려줬던 것들도 전부 좋았어. 나 무슨 네가 디제이인 줄 알았어.”

“에이이, 무슨.”

“혹시 방송부야?”

“아니! 나 그런 거 못해애.”

“왜, 네가 하면 더 잘할 것 같은데. 솔직히 만날 똑같은 노래만 줄창 나오는 것 같아서 가끔은 좀 지겹거든. 근데 네가 알려준 노래는 다 좋아서 가끔은 학교에서도 생각날 정도.”

승주는 한 번 칭찬을 하면 줄줄이 칭찬해서 나를 쑥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칭찬 듣는 게 낯설고 어색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아서, 아니라고 말은 하지만 히죽히죽 웃었다.

“어! 이 노래 제목 뭐야?”

“여우야.”

“제목이 여우야, 라고? 그게 뭐야.”

“이거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부른 리메이크 앨범에 들어있는 노랜데… 요즘 제일 좋아하는 노래야. 비올 때도 좋고 안 올 때도 좋고.”

“그러게. 지금 비 안 오는데, 그래도 좋다.”

음악을 듣다가 서로 조용해지는 때가 있었다. 그러면 나는 어색함을 못 견뎌서 반절밖에 안 보이는 꼬진 엠피쓰리 화면을 넘겨보거나 창밖을 봤고, 승주는 가만히 음악을 감상하거나 내 어깨에 기대서 자기도 했다. 눈만 감고 있는지 정말 자는지 모르겠지만, 내 어깨에 기댄 채 있다는 것 자체로 나는 왠지 모르게 떨렸다. 그 떨림이 대체 뭔지 몰랐지만 그 떨림을 느끼는 순간이 좋아서, 그 순간에 푹 젖어있던 기억이 있다.

어깨를 기대고 있다는 건 상대방이 편하다는 거 아닌가? 승주가 날 그 정도로 편하게 생각한다는 게 너무나 기뻤다. 언제는 승주가 먼저 내리고 혼자가 됐을 때 아쉬우면서 동시에 너무 기뻐서 울컥할 때도 있었다.

나는 늘 불안했었다. 누구와 이렇게 친해지면 언제 멀어질까, 무언가 잘못되진 않을까, 내가 또 뭔가 잘못해서 사이가 어긋나는 건 아닐까 걱정하면서. 승주와 있을 때는 그런 걱정을 잊다가도, 승주와 헤어졌을 때는 다시 걱정으로 가득 차서 나는 불안함에 몸도 마음도 덜덜 떨었던 것 같다.     








시험기간이면 학원을 일주일 넘게 가지 못하고 자습을 해야 했다. 나는 승주를 보지 못해서 무척 울적했다. 내가 승주를 학원 가는 버스에서 처음 봤던 건 각자 교실이 다른 층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승주는 1반, 나는 8반이었다. 우리는 같은 반도 같은 층도 아니어서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승주가 보고 싶어서 교과서나 체육복이라도 빌리는 핑계로 1반 교실에 몇 번 간 적이 있었다. 다른 애들은 다른 반 친구한테 교과서나 체육복 빌리러 다른 교실에 가는 게 별 일도 아니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지금 있는 반에 늘 같이 다니는 친구 한두 명 빼고는 다른 반에 친구가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승주가 생긴 건데, 그렇다고 무턱대고 승주한테 간다는 게 너무 쑥스럽고 어려웠다.

분명 승주는 교실에서 날 보면, 매일 밤 횡단보도를 사이에 둘 때처럼 반가워하고 내게 서슴없이 다가올 텐데 난 그럴 수가 없었다. 승주는 여기저기 친구도 많고 누구든 잘 지내는 애였다. 나처럼 다른 반 교실에 가서 친구한테 교과서 빌리는 것이든 숙제를 보여 달라는 것이든 힘들어하지 않을 애였다. 그래서 1반 교실을 기웃거리던 나는 쉽게 승주를 부르지 못했다. 승주는 점심시간에 나오는 음악에 애들이랑 막춤을 추고 있었고, 창가에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었고, 애들과 서로 때리면서 깔깔 대고 웃고 있었다. 나와 둘이 있을 때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어서, 그리고 교실에 앉아있는 내 모습과도 너무 달라서, 나는 승주에게 함부로 다가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가 교실 문 뒤편의 그림자와 같았다면, 승주는 초여름 오후의 맑은 햇살과 같았다. 그림자를 넘어 햇볕으로 나아가면 아무것도 숨길 수 없고, 무엇과도 섞일 수 없을 테다. 나는 어둑어둑한 저녁만을, 색색의 노을빛 저물고 황혼의 커튼을 내린 밤이 좋았다. 

“뭐야, 국사 빌려온다며?”

1학년 때부터 나랑 줄곧 같이 다닌 진영이 물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교과서를 빌려오려고 일부러 집에 놓고 온 적도 있고, 사물함에 뻔히 있는데 안 가져왔다고 하기도 했었다. 참 바보 같이.

“걔가 오늘 수업 없다고 안 가져왔대.”

“헐, 어떡해.”

“네 거랑 같이 보다가 혹시 걸리면 싹싹 빌지 뭐.”

“그래. 네가 만날 그러는 애도 아닌데, 설마 쌤이 혼내겠어.”

애들한테 나는 선생님한테 혼날 일이 없는 조용한 애, 쉬는 시간마다 문제집 펴고 앉아있는 재미없는 애였다. 이런 모습은 나한테 너무나 익숙하고 걸맞다고 생각했지만, 승주를 보고 나니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사실 나도 은근히 흥이 있는데. 좀 더 시끄럽고, 재밌게, 떠들고 놀고 싶은데. 좋아하는 음악 나오면 같이 막춤도 추고 깔깔 웃으면서 서로 웃기다고 놀리기도 하고 그러고 싶은데. 그럴 수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늘 익숙한 내 모습을 벗는 게 무섭고 자신도 없었다. 그때도 나는 분명히 변하고 싶었지만, 섣불리 변하지 못했다. 연약하게 지키고 있는 지금의 안정이라도 나는 소중하게 유지하고 싶었다. 어떻게 미술학원을 다니고 미대를 가겠다고 다짐했는지, 어떻게 승주를 받아들였는지 모를, 변화가 무서운 겁쟁이였다.

나는 승주와 둘이 있을 때만 달랐다. 조금씩 달라졌었다. 승주와 매일 저녁을 먹고 같이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말도 많아지고 웃는 소리도 커지고 걸음도 조금 빨라졌다. 누군가에게 나의 취향을 알려주고 인정받는다는 것도 너무 좋아서, 나는 매일 자기 전에 컴퓨터 앞에 몰래 앉아서 엠피쓰리에 넣은 음악을 바꿔주곤 했었다. 소리바다에서 신곡이나 인디 노래를 다운받고, 기존에 있던 노래들 중 뭐를 뺄까 열심히 고민하고, 1기가를 꽉 채우고 남은 용량은 팬픽이나 인터넷소설을 넣었다. 내일 승주랑 이 노래 같이 들어야지. 이 소설 엄청 재밌는데 혹시 읽어봤냐고 물어봐야지. 늘 기대하는 마음으로 잠들었지만 항상 용량이 부족한 게 아쉬웠다. 안 그래도 나는 요즘 영어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며 모부님께 전자사전을 사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반에 전자사전 없는 애가 저밖에 없다고, 어떤 애는 피엠피나 깜빡이도 갖고 있다고 하면서. 그러자 아빠는 영어 성적이 20점 이상 오르면 사주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아니 영어공부 하려고 사달라는데 무슨 성적이 오르면 사준대? 싶었지만 좋다고 했다.

시험기간이 끝나고 영어 성적이 20점 이상 오르자 아빠는 약속한 건 지킨다며 정말로 전자사전을 사다줬다. 뛸 듯이 좋아라했던 나는 다음날 바로 진영이와 하린이한테 자랑을 했지만 둘은 피엠피도 있고 전자사전도 있어서 별로 대꾸해주지도 않았다. 대신 각자 가지고 있는 인터넷 소설과 팬픽을 공유하고 뭐가 재밌는지 열심히 토론했다. 재밌어서 깔깔깔 웃다가도 노는 애들이 시끄럽다고 눈치 주면 우리 셋은 볼륨을 낮추고 시시덕거렸다.

오랜만에 승주를 만나서 너무나 기쁘고 발걸음도 가벼웠다. 웬일로 담임이 종례를 무지 일찍 끝내줬다며 벌써 정류장에 있다는 승주의 문자에 나는 잽싸게 달려갔다. 시험은 잘 봤는지, 못 본 새 뭐 하고 지냈는지, 요즘 그 드라마 재밌다는데 혹시 그건 안 봤는지, 신곡 잔뜩 받아왔는데 같이 들으면서 갈까,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다. 이야기보따리를 잔뜩 지고 달려갔는데, 막상 승주가 다른 친구와 웃으며 얘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그 보따리가 절로 땅에 쿵 하고 떨어졌다. 그렇게 기쁘고 날아갈 듯 가벼웠던 마음도 조금 침착하고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성지야! 오랜만이다.”

“안녕.”

“아, 얘는 내 반 친구 지희.”

“아… 안녕.”

나는 어색하게 인사했는데, 지희라는 애는 낯가림도 없는지 대뜸 물었다.

“너 에스앤비 다닌다며? 나도 거기 가고 싶었는데, 졸라 부럽다. 거기 어때? 진짜 잘 가르쳐줘? 다들 광고 졸라게 하는데 실은 거기가 제일 짱이라잖아. 킹왕짱.”

“진짜?” 승주가 되물었다.

“어어. 나 사촌 언니도 거기 다녔어.”

“언니는 어느 대학 가셨어?”

“명지대인가 갔을걸?”

“헐, 완전 잘 가셨네!”

“학교 다니면서 방학마다 거기서 알바도 했다는데. 혹시 지금도 있나? 너 연주 쌤이라고 알아 혹시?”

“아…니. 못 들어봤어.”

너무 작게 대답했나. 혹시 승주가 내가 원래 소극적이고 재미없는 애라는 걸 알면 어쩌지. 걱정했다. 승주가 날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여서 속상하기도 했고.

“그래? 아 그럼 언니 그만뒀나 보네. 아무튼 나도 거기 다니고 싶었는데 부럽다. 하긴 나 그림도 못 그려서 아무리 좋은 데 가도 안 되겠다.”

“나도….”

“뭐야 닌 대영 다닌다며.”

“홍대 갈 수 있을까?”

“뭐야뭐야. 진작 홍대병 걸려서 만날 홍대 간다 난리치더만 최승주 안 어울리게 내숭?”

“홍대병 뭔데? 너는 만날 서연고 갈 수 있다고 지랄이잖아. 그럼 니는 서연고 병이냐?”

“와 홍대병도 모르냐? 홍대 갈 거면서 것도 몰라. 야, 너 가지마. 아니 못 가. 최승주 개안습.”

“초 치지 마라?! 아 짜증나 현지희!!”

버스를 타고서도 계속 투닥거리며 노는 두 사람을 보고만 있자니 나만 투명인간이거나 혼자 멀찍이 떨어져 있거나, 아니면 그냥 모르는 남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승주가 제일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진영이랑 하린이를 먼저 알았지만 지금은 승주가 제일 친하고, 제일 좋아하는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승주는 원래도 다른 친구가 많은 데다 저보다 친한 애도 많고, 다른 애들이랑 있을 때가 더 편하고 재밌어 보였다. 속상하고 울적했다. 자꾸만 울컥 하려는 걸 참느라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기분을 느끼는 내가 너무 속 좁고 바보 같다고 느껴져서, 이런 마음을 누구한테 말할 수도 없었다. 쪽팔리고 부끄러워서.

오늘 시내에 가느라 같이 버스를 탔다는 지희가 먼저 내리고, 나는 목석같이 앉아있었는데 승주가 나를 툭툭 쳐서 왜 옆으로 안 오냐고 묻기에 모르는 척 옆으로 갔다.

“미안해, 좀 시끄러웠지? 쟤가 너무 말이 많아 가지고.”

“아니야. 그냥 듣는 것도 재밌었어.”

난 정말이지, 남을 배려한답시고 내 기분과는 정반대로 말하기를 너무나도 잘했다. 그러면 아무도 모르게 넘어갈 수 있었다. 내가 상처받거나 우울해지는 것과는 상관없이.

“에이, 너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니까 내가 미안했는데. 다음엔 절대 쟤랑 안 탈 거야. 저 시끄러운…애보다 너랑 있는 게 훨씬 좋아.”

“…….”

그때 내가 생각하기에는 승주도 그런 데 있어서는 천부적인 모양이었다. 남 배려한답시고 속에도 없는 말을 잘도 하는 것. 너무나 잘 알았지만 그럼에도 승주라서 나는 모른 척 속고 싶었다. 정말 그렇구나 하고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처음 승주가 내게 말 걸었을 때처럼, 승주가 정말 나랑 친해지고 싶어서 다가왔구나 라고만 생각할 수 있다면. 절대 혼자 밥 먹는 게 외로워서, 누구라도 필요해서 마침 지나가던 같은 학교 교복 입은 내가 보여서 말을 건 게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학원 가기 전에 저녁을 먹을 때도 나는 자연히 생각이 많았다. 평소처럼 승주는 계속 말을 걸었고, 나는 조금씩 변해온 평소와 달리 처음 밥 먹을 때처럼 말없이 듣기만 했다. 승주는 조금이라도 침묵이 생길라치면 어떻게든 다른 화제를 꺼내서 대화 아닌 대화를 이어갔다. 내가 어떤 일로 기분이 안 좋은지 걱정하며 나를 살피는 기색이 보였다.

“성지야, 시험은 잘 봤어?”

“그럭저럭….”

“그럭저럭이 얼마야? 혹시 평균 물어봐도 돼?”

“87.8 나왔어.”

나는 아무 의도 없이 얘기한 건데 승주는 펄쩍 뛰었다.

“뭐야! 그게 무슨 그럭저럭이야!”

나는 내가 잘못했나 싶어 당황했다.

“아니 87점, 반올림해서 88점이 그럭저럭이면 원래는 얼마나 잘 봤다는 거야? 90점 넘는 게 평소 실력이었어? 와, 김성지 무서운 애였어.”

“아니…, 아니야 무슨…! 그런 뜻이 아니라….”

“전교에서 노는 애한테 내가 무슨 평균을 물어보고, 어이구 내 잘못이지.”

“아아, 아니라니까…!”

가장 먼저는 혹시라도 승주한테 상처가 됐을까 걱정이었다. 같은 학생이니 갖는 게 당연할지도 모를 공부에 대한 콤플렉스를 자극하지는 않았을까 해서. 그리고 내가 너무 재수 없게 굴었나 싶은 걱정도 있었다. 진영이는 전교 10등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고 하린이도 나랑 비슷한 성적을 받는 편이어서 나한테 그 점수는 그럭저럭 이었는데, 그게 다른 애들한테는 재수 없다고 느껴질 수 있으니까. 실제로 노는 애들이 그렇게 말하는 걸 듣기도 했었고.

그런데 승주는 쩔쩔 매는 나를 보는 게 재밌을 뿐이었는지, 금방 웃음을 터뜨렸다. 시원하게. 덩달아 승주만 보던 나도 그 걱정들이 시원하게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장난이야, 장난. 너무 진지하게 미안하다고 하니까 내가 다 미안하네. 심했다면 미안.”

“아니야! 나는 그냥 혹시 내가 너무 재…재수 없었나, 혹시 콤플렉스를 건드린 건 아닌가 그래서….”

승주는 무척 기분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내가 의기소침해있던 기색을 한순간에 떨쳐낸 게 좋았던 모양이었다.

“별 걱정을 다 하네. 가만 보면 너 진짜 남다르다.”

“응?”

“남다르게 진지하고, 엄청 착해.”

그렇게 말하곤 씩 웃은 승주는, 내 입가에 떡볶이 양념이 묻었다면서 휴지를 뽑아줬다. 나는 당황해서 막 볼을 닦아대다가, 승주가 답답하다고 새로 뽑은 휴지로 내 입가를 박박 닦아주자 더 당황했다.

“네 입술 지금 틴트 바른 것 같아. 완전 빨개.”

사실 승주가 만날 때만 조금 바르는데, 혹시 들켰나? 뜨끔 했는데 승주는 매운 거 먹어서 빨개진 걸 얘기하는 거였다.

“너도 되게 빨개졌어.”

“이런 걸 쥐 잡아먹은 색이라고 하나?”

우리는 나란히 서서 정수기 위에 달린 분식집 거울을 보고 킥킥 웃었다.

배부르게 떡순튀를 먹고 나오자 하늘엔 노을이 멋스럽게 지고 있었다. 너무 예뻐서 그 하늘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옆에서 팔짱을 끼고 활짝 웃는 승주의 모습도.

“노래들 많이 바꿔왔어?”

“응!! 완전 신곡들 빠방하게.”

“빠방하대, 뭐야. 귀여워~”

“어?”

나는 승주가 귀엽다거나 칭찬할 때마다 쑥스러워서 말을 수제비처럼 뚝 뚝 끊어먹곤 했다.

“나보다 한 뼘은 큰 게 이렇게 귀엽기 있냐구! 김성지이!”

승주는 부쩍 나한테 헤드락을 걸거나 내 양 볼을 붙잡고 주욱 늘이는 식의 장난을 많이 쳤다. 처음엔 당황스러웠는데 점점 적응해서 승주가 더 장난을 많이 치고 나를 좋아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커졌다. 승주는 정말 친한 애들한테만 이런 장난을 치는 애니까. 나는 내가 승주를 좋아하고 아끼는 만큼 승주도 나를 좋아하고 아끼는 친구라고 생각해줬으면 했다. 꼭 그래야만 한다는 건 욕심이거나 이기적인 걸지도 모르지만, 다른 친구들한테는 이런 마음까진 아니었던 것 같지만 승주에게는 유난히 그랬다.

승주랑 있는 게 너무 좋아서, 학원에 들어가는 게 싫을 정도였다.

“우리 공부도 그럭저럭 자알~하고 그림도 자알~그리는 김성지! 오늘도 수업 잘 해~”

“그만해애!”

“싫어! 안 그만해!”

승주의 높은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 뛰어갔다. 나는 무르익는 저녁 시간이 좋았다. 물리적인 동시에 시간적인 어둠 속에서, 남들보다 섬세하고 깊은 감정들에 때가 많이 탄 내 모습과 구김살이 져서 잔뜩 그려진 그림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으니까.     








여름방학에도 우리의 일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학교에선 정규 수업처럼 똑같이 연이은 자습을 시켰고, 네 시 반이면 학원 가는 애들은 학원에 가고 남아서 더 하는 애들은 저녁까지 먹고 자습을 했다. 공부, 입시, 성적, 시험, 자습, 그것 말고는 인생에 아무것도 없는 애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나는 가끔 삭막한 학교 건물을 바라보면서 이런 애들이 전국에 수백만이나 넘게 있다니 생각하면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비문학 지문에서 본 저당 잡힌다는 표현은 이렇게도 쓰이는 걸까. 아니면 그저 뭐에 홀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귀신인지 악령일지 모를.

그렇지만 학교를 뒤로한 채 걸어 나와 승주를 만나기만 하면, 그런 공포와 불안 따위는 여름 낮 뜨거운 햇볕에 잎사귀의 물기가 마르듯 사라졌다.

“아, 더워 죽겠다!”

이맘때는 더위를 잘 타는 사람이든 안 타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모두 더위에 절여져 몸을 못 가눴다. 승주는 학교 앞에서 받은 미술학원 부채를 열심히 팔락거리며 바람을 만들었지만 워낙 공기가 더워서 그 바람도 덥기만 했다. 나한테도 부채질을 해주는데 땀만 더 맺히고 하나도 시원하지가 않았다.

“잠깐 뛰어가서 아이스크림 사갖고 올까?”

“그러다 버스 오면 어떡해. 먹을 거 들고 타면 뭐라 할 걸.”

“그래, 버스 에어컨 빠방하게 틀어놨을 거니깐 좀만 참자 그럼.”

오늘따라 버스도 더 늦게 오는 것 같은데. 그냥 오자마자 아이스크림 하나씩 사먹을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전전 정류장이라는데 버스는 드럽게 안 오고, 지나가는 차들은 멀리서는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더니 다가와선 매연을 뿜고 지나가고, 햇볕을 피하려고 정류장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애들 속에서 숨이 턱턱 막혔다.

승주는 진작 덥다고 교복 상의를 벗고 티셔츠만 입고 있었다. 승주가 앞머리를 계속해서 넘겨서 훤히 드러낸 이마가 보였다. 하얗고 매끈한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가 하나가 주욱 흘러내렸다. 손등으로 땀을 닦아낸 승주는 버스가 오는 방향을 보면서 한숨을 푹푹 쉬었다. 나는 가슴께를 잡고 펄럭거리는 승주를 보다가 별안간 민망해서 건너편 슈퍼를 봤다.

“너… 그거 안 했어?”

“뭐? 아, 브라?”

나는 민망해서 ‘그거’라고 말했는데 승주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더워서, 아까 점심에 벗어던졌어. 브라 같은 거 못 해 먹겠어. 더워죽겠는데 가슴까지 답답하게. 안 그래?”

“그건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벗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면서 얼굴이 다 화끈거렸는데 승주는 워낙 털털하고 그래선지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다. 승주도 남들 시선을 의식하긴 하지만 워낙 살인적인 더위라서 타인에 대한 의식이 옅어진 건지도 몰랐다.

버스에 앉자마자 온몸으로 맞는 에어컨 바람에 우리는 겨우 한숨을 돌렸다. 운 좋게도 우리가 제일 먼저 버스에 타서, 가장 좋아하는 맨 뒤 자리는 사수하진 못했지만 앉아서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서서 가는 애들은 서서 가더라도 에어컨 바람 숭숭 나오는 버스에 탄 것만으로 살았다고 생각하고.

승주는 죽었다가 살아난 기분이라며 너무 좋다고 흐흐 웃다가, 갑자기 졸리다고 이따 깨워달라고 했다. 아까는 너무 더워서 누구든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 짜증 난다는 표정이었는데, 시원한 데 있으니 좋은지 나한테 평소처럼 어깨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너무 더운 데 있다가 너무 시원한 데 오니까 몸이 이완되어서 졸음이 왔나? 나름 과학적인 생각도 해보았는데, 그냥 승주가 나한테 기대있어서 좋았다. 더운 게 싫었는데, 마음이 따듯해지는 건 좋다고 생각하니 신기하고. 물론 어깨를 내어주니 조금의 불편감은 있었지만 음악을 들으면서 가다 보니 잊혔다. 나는 시원한 여름 분위기에 걸맞은 신나는 노래를 듣다가 스르르 잠들었다.

같이 잠들었지만 우리가 내리는 정류장이 애들도 많이 내리는 곳이어서, 우르르 하차하는 움직임에 잠이 깬 우리도 잽싸게 내릴 수 있었다. 까무룩 잠들었다 일어나니까 배가 고팠다. 뭘 먹을까 둘러보다가 김밥천국에 들어가서 냉면이랑 불고기 세트를 시켰다.

“너무 맛있다. 역시 여름엔 냉면이야.”

“면 조금 더 줄까?”

“아냐, 너무 많이 주지 마. 너 먹어.”

우린 비빔냉면과 물냉면을 하나씩 시켜서 나눠 먹었다. 티비에선 내가 요즘 꽂혀있는 드라마 재방송을 하고 있었다. 드라마에 정신 팔렸다가, 승주한테 정신 팔렸다가, 아주 정신이 없었다. 너무 그렇게 딴 데만 보면 미안하니까, 나는 드라마는 잊고 승주한테만 집중하기로 했다.

“나 주말에 알바 시작했다?”

“진짜? 어디서 하는데?”

“있어, 패밀리마트에서.”

“우와, 언제부터?”

“저번 주부터. 점심 열두 시부터 여덟 시까지 해.”

“되게 길게 하네. 밥 먹을 시간은 있어? 점심 먹고 가는 거야?”

“응, 그러려고. 근데 중간에 손님 없으면 컵라면이랑 김밥 먹어도 된대. 폐기 말고 새 거 따로 챙겨준다? 아싸, 나 왕뚜껑 좋아하는데. 인수인계 해준 언니가 그랬는데 보통은 폐기 먹으라고 그런대, 우리 사장님이 좋은 거래.”

“다행이네. 잘됐다. 근데 알바는 왜 하려고?”

나는 승주가 진심으로 멋지다고 생각했다. 물론 알바 하는 애가 없는 건 아닌데 내 주위에선 못 봤다. 알바는 수능 끝나야 할 수 있는 건 줄 알았는데. 돈을 번다는 게 아직 우리한테 쉬운 일도 아니고 큰 도전일 텐데, 승주가 먼저 시작했다고 하니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어…… 전에부터 사고 싶은 게 있어가지고. 엄마한테 사달라긴 뭐해서 알바해서 사려고.”

승주의 낯빛에 아지랑이처럼 무언가 일렁였지만, 금방 자연스럽게 돌아와서 나는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아아, 뭐 사고 싶었는데?”

“노트북.”

“아, 노트북. 나도 갖고 싶은데! 엄청 비싸지 않아?”

“그래서 한 몇 달 해야 될까봐.”

대단하다,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서 대꾸했다. 승주는 왠지 어색하게 하하, 웃고는 물을 마셨다. 스테인리스 잔에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 때문에 젖은 손바닥을 맞대고 비빈 승주의 얼굴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아직도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왜 그러냐고 묻고 싶었지만, 망설였다.

“아이스크림 사먹을까?”

승주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생글생글한 미소로 일어서기에, 금방 잊어버렸다. 승주는 요거트 맛을 좋아해서 요맘때를 자주 사먹었고 나는 초콜릿을 좋아해서 빠삐코를 사먹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조금 거닐다가 각자 학원으로 들어갔다.

나는 승주가 알바한다는 얘기를 해준 게 고마웠다. 말하는 뉘앙스가, 다른 사람한테는 하지 못하는 얘기를 나한테만 해주고 있다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한테나 하지 않는 얘기를 해준다는 건 나를 가장 가깝고 친한 애라고 생각하는 걸 테고, 그런 대화를 나눴으니 나도 다른 사람한테는 하지 않는 얘기를 승주한테 할 수 있다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무척 기뻤다. 나는 승주를 다른 친구들과는 다른 애라고, 좀 더 가깝고 다정한 아이라고 여겼기에 승주도 나를 그렇게 여겨주길 바랐으니까. 나는 승주의 얘기를 듣는 걸 좋아하니까, 승주도 내 얘기를 들어주기를, 나를 좋아해주기를 바랐다.

학원에서 사귄 친구가 없어도 나는 승주가 있으니까 괜찮았다. 나는 아무와도 떠들거나 농땡이 피우지 않고 실기만 했다.

“성지야, 쌤이 말했지. 어둠을 좀 죽이라고. 여기, 너무 면적이 넓어지면 이게 별로거든.”

“이럴 때는 이렇게 누르면서 지워주면 좀 괜찮아요?”

“어어, 괜찮아. 이건 조금만 하고 실기 넘어가자.”

학원에서 그림만 그리고 있을 때도 승주가 수시로 생각났다. 끝나면 볼 건데도 매일매일 보고 있는데도, 왜 이렇게 승주가 보고 싶은지, 승주 옆에 있고 싶은지, 나는 정확히 몰랐다. 그 감정의 바탕과 이유를. 나는 승주를 만나면서 내 안의 어둠을 죽여가고 있었고 그럼 언젠가는 승주처럼 한없이 밝은 아이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고, 승주도 그렇지만은 않은 아이였는데.

나는 승주에게 어떤 환상을 덧씌운 채로 그 애를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되고 싶었던 애, 내가 변하고 싶은 모습, 밝고 명랑하고 누구와도 잘 지내는 사람, 그런 이상향으로 승주를 상정하고 승주에게 한없이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런 모습으로만 나와 있어주기를.

그래서 승주가 그날처럼 조금 힘들고 우울한 모습을 보였을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었다. 학원에서 나왔을 때 정류장에 서 있는 승주는 딱 봐도 의기소침했다. 평소와는 너무 다르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 무거운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승주를 걱정하며 빨간불이 바뀌기를 기다렸고 초록불에 잰걸음으로 달려갔다.

“승주야! 오늘 밤에 비 온대.”

하지만 승주는 나를 보자 먹구름이 걷히고 모습을 보인 해처럼 말끔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헐, 일기예보 못 봤는데 비 온다 그랬구나.”

“어어, 우산 안 가져왔지?”

“괜찮아.”

“나 가방에 우산 가지고 다니는데 내꺼 가져갈래?”

“아냐, 너 써. 네가 나보다 늦게 내리잖아.”

“나는 정류장에서 집 바로야! 너는 좀 걸어가야 된다며. 내꺼 줄게.”

그제야 어둑해진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다시 나를 쳐다본 승주는 고맙다며 우산을 받았다.

“별이 하나도 안 보이네.”

“언제는 안 그랬냐.”

“하긴. 난 태어나서 별을 제대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어.”

“나도. 별을 봐도 그게 무슨 별인지, 그런 건 모르겠더라.”

버스에 타기 전까지는 그래도 얘기를 나눴지만, 버스에 앉자마자 승주는 오늘 너무 피곤하다며 자면서 가겠다고 했다. 나는 그러라며 어깨를 내어주었지만 승주는 괜찮다고 창에 기대서 자겠다고 눈부터 감았다. 어쩐지, 평소엔 내가 창가 자리를 좋아해서 먼저 앉는데 오늘은 자기가 먼저 앉으려고 하더니. 나는 승주가 내 어깨에 기대지 않아서 조금 섭섭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조용히 자고 싶었을까.

나는 혼자일 때처럼 음악을 들으면서 갔다. 그렇지만 분명히 혼자가 아니니까 전처럼 우울해지진 않았다. 승주는 조용히 잠이 들었다. 나는 아무리 졸려도 차에선 잘 못 자서 늘 선잠만 자는데, 승주는 어디서나 잘 자는지 깊은 잠에 빠진 얼굴이었다.

오늘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아니면 평소에 가지고 있던 고민이 오늘따라 부각된 채로 느끼기라도 했는지. 궁금하고 걱정돼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혼자 잘 풀려고 하는데 괜히 내가 물어봐서 상처를 주는 걸까봐. 승주는 당찬 애니까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잘하겠지, 하는 생각도 있어서 혼자 속으론 부러워했다. 나도 내 고민을 혼자서 잘 풀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남에게 털어놓지 않고 혼자서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으면,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을 텐데.

“승주야, 주공아파트 다 왔어.”

“응…? 벌써?”

승주는 크게 하품을 하면서 일어났다. 때마침 밖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 잘 쓰고 갈게. 고마워.”

“조심해서 가!”

“응, 너두.”

나는 승주가 앉았던 자리로 옮겨서, 창밖의 승주가 사라질 때까지 보았다. 버스에서 내린 승주는 바로 손전등부터 켜고 느릿하게 걸어갔다. 가는 길이 무섭다는 말은 한 번도 안 했는데 저렇게 보니 좀 무서워 보여서 걱정스러웠다.

내가 승주네 집에서 가까이 살면 같이 가고 그럴 텐데. 우리 집은 이사도 안 가나, 생각했지만 지금 우리 집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살던 집이라 이사는 꿈도 못 꿨다. 승주는 중학교 삼학년 때 이사 왔다고 했는데. 왜 이런 좋을 게 하나도 없는 시골 동네로 왔을까.

나는 어서 승주랑 같이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같은 학교는 아니더라도 서울에 있는 학교에 갈 수만 있으면 좋겠다고, 우리가 이 작디 작은 우리들의 세계를 벗어나서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건 어떤 그림보다도 크고 멋진 그림일 텐데. 나는 언제쯤 그런 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까.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은 종이를 앞에 두고 무엇을 그릴지 몰라 긴장한 사람처럼 처량하고,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과 일렁이는 불빛들 속에서 흐릿해 보이기만 했다. 내가 생각하는 나처럼.     








주말에는 승주를 못 봐서 문자라도 하고 싶은데 승주는 몇 시간쯤 지나야 답장이 오고는 했다. 알바 때문에 핸드폰 확인도 잘 못 할 테고, 알바가 끝나면 피곤해서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점점 서운했다. 학원 갈 때면 다시 명랑한 모습으로 만나니까 주말에 서운했던 기분이야 말할 필요가 없었지만, 나는 내심 그렇게나 불안해했다. 승주가 나와는 별로 있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고.

“언제 너 알바하는 곳 놀러 가도 돼?”

몰래 깜짝 놀래키러 갈까도 싶었지만, 혹시라도 승주가 싫어할까봐 먼저 물어봤다. 승주는 조금 놀랐는지 당황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안 돼. 사장님이 친구들 오는 거, 그런 거 싫어하신대.”

“그래? 그럼 안 되겠네.”

“응, 미안.”

“아냐, 뭐가 미안해.”

“…….”

“아님 우리 언제 같이 놀이공원 갈래?”

“놀이공원? 어디?”

“서울랜드나 에버랜드… 나 중학교 때 말고 가본 지 오래됐어.”

꼭 밖에서 같이 놀아야 되는 건 아닌데, 그렇게 놀러 간 적이 있어야만 뭔가 절친이 된다는 느낌이 있었다. 진영이랑은 작년 소풍으로 서울랜드에 갔었고 하린이랑은 셋이서 역전에서 논 것 말고는 단둘이 놀아본 적이 없어서, 둘이서만 있을 때 좀 어색했고, 나는 진영이를 더 친하게 느꼈다. 그런 것처럼 승주랑도 더 친해지고 싶어서 그렇게 물어봤지만, 승주는 미안하다는 말부터 했다.

“주말에 알바를 해서 시간이 없을 것 같아. 미안….”

“아냐, 그냥 얘기해본 거야.”

“…….”

“나중에 시간 있으면 같이 꼭 가자.”

“그래.”

승주는 그제야 옅게라도 미소를 띠었다. 나는 승주가 언제부터 내 앞에서 웃는 얼굴이지만은 않았는지 문득 궁금했다. 승주가 없을 때 승주에게 궁금했던 것들이 있었는데, 승주만 보면 다 잊혀버리는 것처럼, 어떻게 사람이 웃을 수만 있냐고 생각하면서 나는 또 금방 잊어버렸다.

실은 승주한테 말하고 싶은 게 더 많았다. 다른 애들한테는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들을 승주한테는 털어놓을 수 있을 거라고, 승주는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즈음 나의 가장 큰 고민은…… 학원을 그만둬야 할까 계속 다녀야 할까 하는 거였다.

몇 달째 잘 다녀놓고 왜 그만둘까 고민했느냐면, 내년부터 입학사정관제니 뭐니 바뀌는 것도 많다고 하고 실기보다는 포트폴리오나 활동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도 들었고, 매일 똑같은 그림만 반복해서 그리니 이게 정말 잘하고 있는 게 맞는 건가 회의감도 들었고, 무엇보다도 성적이 떨어지는 게 무섭고 걱정되기 때문이었다. 개학하고 처음 본 9월 모의고사에서 나는 확실히, 전보다 못 봤다. 이래 놓고 실기로만 좋은 대학을 갈 수 있을까? 나는 자신이 없었다. 그나마 공부를 조금이라도 잘하는 게 내 자신감의 유일한 원천이었는데 그마저도 못한다면, 내가 잘하는 건 뭘까 나는 뭘 잘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만 끝없이 들었다. 그때 나는 나만 이렇게 힘들고 고민하고 우울한 줄 알았다. 나처럼 우울한 애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진영이와 하린이가 힘듦을 말해도, 나와는 비할 수 없는 그저 평범한 정도라고 생각했었다. 모부님께서 비싼 돈 들여서 보내준 학원을 아무런 성과 없이 그만둔다고 하면 뭐라고 하실까. 누구는 가고 싶어도 못 가는 학원을 다니는데 그만둔다고 하면 애들은 뭐라고 할까. 선생님은, 왜 그렇게 빨리 그만두냐고 넌 대체 뭘 하고 싶은 거냐고 물어보실까.

그때 나는 너무도 무섭고 두려웠다.

승주가 나를 피하는 기색을 보일 때면, 더욱 그랬다. 승주가 이젠 나를 알아버렸구나, 이렇게 우울해하는 나를 알아버려서, 지겹고 같이 있기 싫어졌구나. 혼자만의 생각에 몹시도 깊고 깊게 빠져들었다. 활짝 열려있던 마음이 닫히면서 눈과 귀도 닫혀서 나는 승주를 있는 그대로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게 되어버렸다.

새로 생긴 학원 버스가 우리 동네까지 간다고 했다. 그마저도 죄책감을 더했다. 다니기 편한 버스까지 생겼는데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니 하면서. 승주한테 말했더니 자기도 그 버스를 타고 간다고 했다. 아마 그 버스가 학원들을 다 통합해서 같은 동네로 가는 애들을 태우는 모양이었다. 나는 승주랑 계속 같이 집에 가서, 더구나 승주네 집 앞까지 가서 내려준다니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만둘까 싶던 생각도 승주를 보면 약해졌다. 승주랑 같이 다니기 위해서라도 계속 학원을 다녀야지 생각했다.

수업이 조금 늦게 끝난 날이었다. 승주가 먼저 버스를 탔다고 보낸 문자를 봤다. 나는 승주가 먼저 갔다는 줄 알고 아쉬워했지만, 알겠다고만 했다. 음악이나 들으면서 가지 뭐. 승주가 좋아하는 취향만 생각하다가 나 혼자서 내가 듣고 싶은 노래를 듣는 것도 좋았다. 밖에 나오니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운동화가 젖어서 찝찝했지만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버스를 타러갈 때만 해도 나는 기분이 산뜻했다.

버스를 탈 때 다른 애들과 눈이 마주치는 걸 피하려고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탔다. 같은 방향이라고 해도 다른 학교 애들인 것 같았다. 승주는 아직 집에 도착하진 않았겠지. 저번에 내가 준 우산은 잘 들고 다니나? 난 여전히 승주를 생각하고 있었다.

“……김성지? 걔는 뭐……”

뒤에서 들린 건 분명히 승주가 목소리였다.

나는 조금 놀라서 이어폰을 귀에서 뺐지만, 뒤를 돌아보진 못했다.

승주는 맨 뒷자리에서 다른 애들과 있었다. 작은 소리로 얘기하고 있는데 바깥의 차량 소리와 경적에 묻혀 있다가, 시내를 빠져나오니 사위가 조용해서 들리는 모양이었다.

승주가 다른 사람한테 나에 대해 얘기하는 걸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나는 죽은 사람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멈춰 있었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이 사소한 말 몇 마디에 난도질을 당해 죽은 기분이었다. 그 정도로 끔찍했다.

승주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승주는, 그동안 같이 다닐 사람이 없어서, 나랑 다닌 것뿐이었다.

승주는, 내가 너무 소심하고 친구도 없는 애라고 했다.

나는 그 문장을 하나씩 만들어 뇌리에 각인시킬 때마다 가슴이 미어졌다. 너무 아팠다.

바깥의 비는 점점 더 거세어졌다. 거세게 천둥이 치고, 폭풍우가 몰아치고, 한 치의 빛도 없이 깜깜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창문에 비친 내 모습밖에는. 겁에 질려 소리 없이 울고 있는 내 모습밖에는.   


  

    





바로 학원을 그만뒀다. 선생님은 나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나는 이미 결정을 내린 후였다. 미대를 갈지 모르겠지만 가기로 하면 학원은 다니지 않고 알아서 준비하겠다고 했다. 담임선생님한테도 그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잘 생각했다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아무래도 미대보다는 일반 대학을 보내는 게 더 쉽다고 생각해서 일까. 아니면 나한테 별 관심이 없는 걸까. 모부님도 그렇다. 내가 그만두겠다고 하니 하루 이틀 정도는 뭐라고 했지만 얼마 안 가선 금방 잠잠했다. 네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언제는 내 마음대로만 살지 말라고 했으면서. 살면서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는 거라고.

나는 밤늦게까지 자습을 하는 학생으로 돌아갔고, 집에 오면 열두 시 반, 씻고 침대에 누우면 한 시였다. 새벽이 가도록 잠을 못 자는 날도 있었다. 어릴 때 천장에 붙여놓은 희미한 야광별이 괜히 신경 쓰였다. 위로해주는 따듯한 가사의 음악을 들으며 잠들었지만, 나를 위로해주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김성지, 누가 너 불러.”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나는 겁을 집어먹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에 승주가 서 있었다.

승주가 교실까지 찾아올 줄 몰라서 깜짝 놀랐다. 아무 말 없이 학원도 그만두고, 문자 답장도 하지 않으니 그럴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승주를 보는 게 편하지 않았다.

“왜 학원 그만뒀어?”

나는 꽤 오래 망설였다. 생각을 고르고 말을 골랐다. 원래도 고민하고 있었는데 네가 한 뒷담화 때문에 결심하게 됐다는 얘기를 할 순 없으니까.

네가 날 좋아하지 않으니까, 나도 널 좋아하는 걸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하기엔…… 아직 널 좋아하고 있는데. 난 솔직할 수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누구든 날 싫어했고 친구가 생기면 꼭 헤어졌다. 나는 그런 걸 너무 어려워했다. 차라리 가만히 책상에 앉아서 공부만 하는 게 쉬웠다.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고 조용히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듣는 게 편했다. 내가 이런 애라서 네가 안 좋아하는 것도 납득이 되기는 한다고, 너무 아프지만 그게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힘들어서.”

“뭐가…. 뭐가 힘들었는데?”

승주가 그렇게 물어봐준 것도 처음이었는데, 그제야 말할 기회가 생겼는데, 나는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몰라도 돼.”

“…….”

“그냥, 맨날 똑같은 그림만 그리는 것도 싫고, 돈 아깝고 그래서 그래.”

내가 생각한 고민의 일부만 얘기한 거였다. 승주가 더 들어준다면 나는 더 얘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실은 다른 고민들도 있는데 이러이러해서 결정했다고. 승주에 대한 원망이나 미움은 결코 얘기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승주가 나에 대해 그렇게 얘기했어도, 승주는 내 가장 친한 친구니까.

그런데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승주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입술을 바르르 떨면서, 고개를 숙이고 울었다.

“승…주야, 왜 그래…?”

나는 너무 놀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위로를 받아본 적이 별로 없어선지 남을 어떻게 위로해야 되는지를 몰랐고, 승주가 왜 울지 혹시 나 때문에 우는 건가, 미안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최승주!! 뭐야, 왜 울어?!”

“우는 거야? 왜애!”

승주에게 다가가고, 승주를 안아주는 건 다른 애들이었다. 나는 승주를 울게 만든 나쁜 애가 되어버렸고, 승주는 친구들 속에서 끅끅 울기만 했다. 애들은 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안중에도 없는 듯이 굴었다.

“흐으…… 나는… 다니고 싶은데…… 못 다녀…. 그만두래, 학원도, 알바도… 끄흐윽……아무것도 하지 말래, 공부만 하래 그냥… 돈 축내지 말래… 흐으,흑……”

내가 모르던 승주의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외면하고 살았던 세계에 온몸으로 부딪친 기분이었다.

또한 나는 정말로 세상에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늘 승주가 부러웠다. 친구들 속에서 웃고 울면서 위로도 받는 그 순간의 승주가 제일 부러웠다. 승주는 나의 뭐가 부러웠을까? 부럽기는 했을까?

한 번이라도 나를 좋아하기는 했을까?

우리는 다시는 어떤 순간도 나누지 못했다. 나는 우리가 동시에 서로의 손을 놓았다고 생각했다.     



  





버스를 타고 화방거리를 지날 일이 있었다. 겨울방학이 되기 전 현장학습이랍시고 행궁 앞마당에 모일 때였다. 다들 대충 노닥거리다 역전으로 갈 생각에 선생님 몰래 화장품을 챙겨오거나 한껏 꾸민 사복을 입고 왔다. 나는 진영이와 맨 뒷자리에 앉아서, 하린이와 문자를 주고받는 진영이의 얘기를 들으면서 나만이 안고 있는 슬픔에 조금이라도 젖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었다.

“너 이쪽으로 학원 다녔었지?”

“몰라, 그럴걸?”

“모르긴 뭘 몰라.”

진영이는 처음 와본 곳이 신기한 사람처럼 고개를 내밀어 창밖을 봤다. 나는 귀 한 쪽만 꽂은 엠피쓰리를 점퍼 주머니 안에서 만지작거리며 딴 생각을 하려고 했었다. 시험을 잘 봤다고 드디어 엠피쓰리를 하얀색 아이리버 새 기종으로 바꿔서 좋아했었는데. 용량도 크고 디자인도 세련되고, 너무 좋은데. 도리어 전보다 음악을 덜 듣고 있었다. 내 친구들은 가수나 음악에 별 관심이 없어서 그런 취향에 대한 얘기를 나눌 길이 없었다. 승주도 그런 데엔 관심이 없다고 했었는데. 그런데 왜 그 애는 내 얘기를 다 들어줬었을까.

“걔랑 무슨 일 있었어?”

나는 진영이가 누구를 말하는지 콕 집어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진영이가 왜 그걸 묻는지도, 대충 알았다.

“…아니.”

그렇지만 말할 수 없었다.

진영이는 큰 관심이 있어 물은 게 아니란 듯 다시 창가로 시선을 던졌다. 나는 그에 고마움을 느끼며 희미한 회한의 숨결을 뱉었다. 생각이 많아지는 걸, 슬퍼지는 걸, 들키기 싫어 반대편을 쳐다보면서. 끝이 없을 것처럼 생각했었다.

그냥… 내가 걔를 너무 좋아했었어.

좋아했어.

속으로 눈물이 흐르다 벅차서, 누가 날 조금만 건드려도 모조리 튀어나올 것 같았다. 버스가 과속방지턱을 넘으며 흔들리는 움직임에도 속이 뒤틀리고 뜨겁게 목이 메었다.

그래, 네가 너무 좋았어, 승주야. 미안했어.

내가 널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너는 너무 좋은 애였어.

그날 하늘은 유난히 뿌옇고, 온종일 걷고 싶게 만드는 정취가 감돌고 있었다.     








이듬해 나는 인문학부에 합격했고, 수능은 최저성적만 맞추면 돼서 다른 애들보다 부담을 덜었다. 덕분에 수능은 내게 생각보다 별 일 아닌 것처럼 지나갔다. 진영이는 일월까지 합격발표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고, 하린이는 바로 재수학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교실의 분위기는 한결 가볍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가볍지만은 않았다. 나는 그 사이에서 왠지 죄인이 된 기분이라 아무런 기쁨도 성취감도 누리지 못했다. 하기야 난 아무리 내게 좋은 일이 있어도 티를 내거나 자랑해본 적이 없었다. 항상 나보단 남을 더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

수능이 끝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시내에 있는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다섯 시부터 열한 시까지 일하는 마감이었다. 처음엔 너무 힘들어서 매일 마감이 끝나고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 길에 울지 않는 날이 없었다. 고작 이 정도 가지고 힘들다고 하는 내가 나약한 걸까, 앞으로는 얼마나 더 힘든 일이 있을까, 서울에서 혼자 잘 지낼 수 있을까, 독립심을 키우겠다고 시작했는데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만 곱씹으며 몸을 옹송그렸다. 그 겨울의 난 위로를 주는 음악도 듣지 않았다. 더는 음악이 주는 위로와 공감의 한계를 모른 척하지 않으려 했다.

대신 엄마가 사준 노트북으로 매일 영화를 봤다. 나는 영화를 볼 때만 웃고 울었다. 진영이, 하린이와 있을 때는 교실에서 틀어주는 하이틴이나 뮤지컬 영화만 봤지만 혼자 있을 땐 서스펜스나 스릴러를 많이 봤다. 나한테 그런 영화 취향이 있는 줄은 몰랐다. 어쩜 음악과 영화 취향이 정반대인지. 나는 조금씩 내 취향의 세계를 확립해가고 있었다.

그 뒤로 승주와는 아주 가끔만 마주쳤다. 3학년 때도 우리는 반이 달랐고 교실은 그렇게 멀지 않았지만 마주치는 일이 적었다. 어쩌다 마주쳐도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쳤다. 한동안은 승주를 생각하기만 하면 눈물이 났고, 승주가 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같이 듣던 음악만 듣고, 문자보관함을 비워서 승주가 보낸 문자를 넣어놓고 자주 읽었었는데…. 졸업이 가까워져서야 그게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되었다.

의미 없는 겨울방학을 하고, 나는 집에 갔다가 아르바이트 가는 시간을 계산하며 정류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성지야.”

코트 모자를 쓰고 음악을 듣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만은 잘 들렸다. 나는 느릿하게 돌아서며 담담한 표정을 짓기 위해 노력했다.

“수능…… 잘 봤어?”

고작 그걸 물어보려고 부른 건 아닐 텐데. 승주는 무척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머리를 좀 길렀네, 생각하며 대답했다.

“응.”

“…….”

“너는?”

“그럭저럭.”

“…….”

“대학교는 어떻게 됐어?”

“두 군데 중에 고민하고 있어.”

“서울권이야?”

“응, 하나는 인문학부고 하나는 영문과.”

“…그렇구나.”

“너는?”

“나는…… 아직 결과 나온 게 없어. 다다음주에 두 개 나오고, 하나는 예비야. 근데 14번이라서 아마 안 될 것 같아.”

“…….”

너무 오랜만이지만, 그래도 자연스럽게 할 만한 대화였다. 승주가 먼저 말을 걸어줘서 기뻤다. 처음 승주를 만났을 때처럼. 나는 그 정도로 만족했다.

“꼭 좋은 데 합격하길 바랄게.”

“너도… 좋은 데로 갔으면 좋겠다.”

“그만 갈게.”

“응, 잘 가.”

그때 승주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무척 복잡하지만 그 중 한 줄기만은 선명한 표정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미안함. 나와 같은 마음이라서 그것만은 선명하게 알아봤을 테다. 나는 진심으로 승주가 좋은 곳에 가고, 좋은 사람들만 만나고, 좋은 시간들만 보내기를 바랐다. 가슴 한 켠에 미안함이라는 감정을 두고, 그 감정을 승주라고 생각하고 살기로 했다. 평생에 느끼는 어느 한 감정을 내게 남은 그 애의 존재라고 치환하면, 나는, 평생 그 애를 잊지 않게 된다. 잊고 살아가지만, 잊지 않는 것이다.

한때는 네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도 없다는 생각을 했지만, 너와 닿았다 멀어진 후에 나는 새로운 세상을 만났고 나의 세계가 그렇게 넓어지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언젠가는 너를 간직한 그 이름이 바뀌겠지.

고마움.

그 깊은 그릇에 담긴 무한한 애정과 그리움.

나는 조금도 망설이거나 멈추지 않고, 오롯이 혼자인 채로 바람을 맞서며 걸어갔다. 살다 보면 우산 없이 마냥 걸어도 좋기만 한 날이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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