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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미완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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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Aug 17. 2022

그네








말 그대로 숨이 턱턱 막히는 날씨였다. 걷기만 해도 절로 인상이 쓰이고, 이마와 등엔 땀이 흐르고, 잘 마르지 않는 빨래처럼 축축한 기분이었다.

집엔 아빠의 고집으로 에어컨이 없었다. 그래도 그런 날엔 선풍기 바람이라도 쐬며 집에 콕 박혀있는 것만큼 좋은 게 없을 텐데. 해도는 서로 목청과 성량을 자랑하듯 질러대는 소릴 뒤로하고 집을 나와버렸다.

쾅!

문이 세게 닫힌 건 바람 때문이 아니라, 짜증이 담긴 손길 때문이었다. 그날은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집을 나왔다. 그 다섯 글자가 뇌리에 쓰였다.

이대로 영영 집에 돌아오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얼마간은 집에 오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집을 나왔다.

엄마와 아빠의 싸움에, 진절머리가 나서. 매번 똑같은 레퍼토리와 자전하듯 반복되는 패턴. 친척집, 비상금, 골프모임, 등산모임, 이번 달 카드값, 할아버지 병원비, 은행 대출 등의 아직 제가 알 수 없지만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만 같은 얘기들. 엄마의 고성과 아빠의 악에 받친 표정과 서로 자신이 옳다고 꽥꽥 외쳐대는 불협화음의 합주 아닌 합주. 그 모든 것이 진절머리가 나고, 지긋지긋했다.

하지만 막상 집을 나섰더니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갈 곳이 없다니.

집과 학교만 오가는 평범한 아이인 해도는 자신이 그 두 곳이 아니면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처지란 생각이 들었다. 기실은 저뿐 아니라 다른 모든 집안의 아이들이 그렇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런 아이가 저뿐인 것처럼 느껴져 착잡하기만 했다.

해도는 걸었다. 정처 없이 걷고 또 걷다가 익숙한 아파트 단지에 다다랐다.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살던 곳이었다. 그곳에 살 때는 죽을 때까지 그곳에 사는 줄만 알았다. 떠난다는 건 생각도 못 해본 일이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6학년에 올라가면서 지금 사는 빌라로 이사를 왔고 그와 동시에 해도는 자신의 집이 더 좋아질 일은 없을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건 배워서 아는 게 아니라 은연중에 느껴지는 것이었다.

매일 학교가 끝나고 놀던 놀이터에는 애들이 몇 없었다. 예전엔 시간만 나면 다들 이곳에 모여 놀기 일쑤였는데. 다들 학원에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집에서 학습지를 하거나. 해도는 그렇게 생각 없이 놀던 그때가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무엇이든 생각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다. 고작 열다섯, 이제 열여섯을 앞두고 있는 해도는 그렇게 생각이 동네 뒷산처럼 많은 아이였다.

가장 큰 놀이터가 있는 1단지를 지나쳐 2단지를 가로질러 조금 작은 크기의 놀이터에 다다랐을 때였다.

“…….”

그네를 타고 있는 경산과 마주쳤다.

정확히 눈이 마주치곤, 해도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경산은 같이 점심을 먹고 서로 교과서나 체육복을 빌려주고 시험이 끝나면 시내에 가는 무리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어울리는 무리 중에 가장 친한 친구가 다르고, 같은 초등학교를 나오지도 않은 데다 같은 반도 아니어서, 단둘이 있으면 어색한 사이였다. 깊은 속 얘기도, 좋아하는 아이돌이나 가고 싶은 고등학교나 대학교 얘기도 해본 적이 없었다.

“거기서 뭐 해?”

먼저 말을 건넨 건 경산이었다.

해도는 경산이 참 용기 있는 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늘 경산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의 일환이기도 했다. 경산은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지만 자만하거나 으스대는 법이 없는 애였고, 늘 당찬 태도로 무엇이든 불합리하거나 부조리한 게 있으면 나서서 말하는 애였다.

“너 해도 아니야?”

경산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물었다.

안경을 쓰지 않아서 잘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해도는 얼굴을 찌푸린 채로 저를 알아보려 애쓰는 경산의 노력에 더는 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끼며 경산에게 다가갔다.

“안녕.”

저로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해도는 누가 먼저 제게 말을 걸거나 다가오지 않는 이상 관계를 맺지 못하는 소극적인 성격이었다. 그래서 경산과도 별로 얘길 나눈 적이 없었다. 이렇게 단둘이 있어본 적도 처음이었다. 아, 아주 처음은 아니었다. 다같이 영화관에 갔다가 화장실에 간 애들을 기다리며 둘이서 팝콘과 음료수를 들고 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아무것도 할 얘기가 없어서 어찌나 어색했던지. 침묵 속에 싸여 있던 그 시간이 괴롭기까지 했었다.

“왜 그러고 가만히 서 있었어?”

경산이 물었다.

해도는 머쓱한 얼굴로 경산의 옆에 가까이 다가갔다. 경산이 턱짓으로 옆을 가리켰다. 해도는 경산의 옆자리 그네를 탔다. 정확히는, 그네에 앉았다.

“나도 네가 맞는지 모르겠어서, 생각하고 있었어.”

“되게 신중하네.”

경산이 발을 땅에 딛고 그네를 타기 시작했다. 키가 커서 그런지 경산이 탄 그네는 금방 높이 올라갔다. 해도는 옆에서 경산을 따라 그네를 타다가, 허벅지가 아파서 오래 타지 못하고 멈췄다.

경산이 운동하듯 그네를 타다가 내려오자, 해도는 물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그네를 타고 있는 걸 가리키는 물음이 아니라는 걸 알 수밖에 없었다. 해도의 얼굴엔 저와 비슷한 색채의 착잡함이, 다소 버거운 그늘과 함께 띠어 있었으니까.

“그냥.”

경산은 웃었다. 웃는 척하고 짓는 표정으로.

“갈 데가 없어서.”

해도는 그 말에 여실히 공감하며 눈이 커졌다.

“나돈데!”

저도 모르게 외치고는, 다시 끼쳐온 머쓱함에 입술을 오므린 해도는 익숙한 모래밭이 아닌 우레탄 바닥을 발코로 콩콩 두드렸다.

“저쪽에 맥도날드 있는데, 거기라도 갈래?”

해도는 경산의 무람없는 제안에 작지만 놀라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제가 경산을 싫어한 게 아니라, 경산과의 어색함을 꺼렸을 뿐이란 것을. 지금, 이 순간은 경산과 있는 게 전혀 어색하지도 불편하지도 않다는 게 무척이나 신기했다.

“그래.”

해도는 경산보다 먼저 일어나 걷다가, 뒤따라온 경산에게 물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되지?”

“뭐야. 난 또 아는 줄 알았네.”

둘은 놀이터와 정자를 지나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왔다. 횡단보도를 세 번 건너고 버스 정류장 한 개를 지나치자 맥도날드가 보였다. 이 층의 커다란 건물엔 사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주로 둘 또래의 학생들이었다. 해도는 혹시라도 아는 애를 마주치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제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걱정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핸드폰을 꺼버려서? 정말 집을 나올 작정으로 시간을 버리고 있어서? 경산과 함께 줄을 서서 주문하길 기다리는데, 매장을 가득 채운 고소한 냄새와 짠내와 북적이는 사람들의 말소리와 갖가지 소음들이 살갗에 땀과 함께 눌러 붙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엔 죄책감 한 스푼과 막막함 한 스푼, 그리고 어쩐지 고스란히 저를 채웠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되는 얄팍하지만 선선한 해방감 한 스푼이 담겨 있었다.

해도는 불고기 버거 세트를, 경산은 새우버거 세트를 시켰다. 둘은 마주보고 앉아서 주문한 메뉴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세트가 나오자, 둘은 탄산음료로 목을 축이고 감자튀김부터 먹는 게 똑같은 서로를 보고는 웃음을 지으며 어색함을 녹여내었다.

“넌 왜 밖에 나와 있었어?”

해도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고민했다.

그럴듯한 말을 하고 넘어가고 싶었지만, 다른 말이 생각나질 않았다. 해도는 경산에게 솔직해도 되는지, 솔직해진다면 얼만큼 솔직해져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왜인지 그래도 될 것 같다고 느꼈다. 경산이 제게 먼저 말을 건 순간부터 전에 없이 마음의 문이 열려버렸기에.

“집 나왔어.”

“뭐?”

“엄마 아빠 싸우는 게 꼴도 보기 싫어서.”

해도는 그렇게 말을 뱉고 보니 제가 무슨 불량아라도 된 듯한 느낌이 들어 민망하고 난감했다.

“오, 나돈데.”

뜻밖에 경산의 공감을 얻고선, 해도는 그제야 저를 깨우는 몸과 마음의 허기를 느끼고 불고기 버거를 먹어 치웠다. 경산은 망설이는 기색 없이 말을 이었다.

“나도 집에서 싸우는 소리 듣는 게 싫어서 나온 거거든.”

“진짜? 너넨 뭐 때문에 싸우는데?”

“몰라. 만날 똑같은 얘기만 하면서 싸워.”

“와, 어쩜 이렇게 똑같냐. 우리 집도 그래!”

해도는 얘기가 나온 김에 털어놓고 싶은 마음을 더는 참지 못하고 전에 없이 속사포로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소스가 묻은 입가를 개의치 않고 열심히 떠들어대는 해도를 보며 경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치, 맞아, 하고 적절히 반응해주었다. 경산은 피클도 케첩도 먹지 않았다. 피클을 쏙 빼놓고 모아둔 것과 케첩을 뜯지도 않은 걸 보면서 해도는 언젠가 경산이 김밥에서 단무지를 빼고 먹던 걸 떠올렸다. 그런 생각이 드는 와중에도 해도의 입은 쉬지 않았다. 한 번 풀렸다고 너무 쉽게 풀어지고 이어지는 게 신기하면서도, 그 순간에는 그게 당연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다 너무 저만 떠들었다는 생각에 해도는 덜컥 미안함이 들었다.

“미안, 너무 내 얘기만 했네.”

“아니야. 뭘 미안해.”

“너도 얘기 좀 해 그럼. 그러고 보니까 우리 둘이 이렇게 있는 거 처음이지 않아?”

그런 건 암묵적으로 모른 체하고 있던 거 아닌가. 경산은 당황해서 굳었다가 금세 웃고 말았다.

“맞네. 처음이네.”

해도는 작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실…… 너랑 친해지고 싶었는데.”

경산이 놀라서 되물었다.

“정말?”

해도는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엔 안 그래 보였어. 그래서 전혀 몰랐는데.”

“내가 좀 티를 안 내. 그리고 먼저 말도 못 걸어. 그래서 1학년 때는 반에 친한 애들이 없어서 어떡하지, 막 걱정하고 그랬다니까. 진짜 울고 싶었어. 다행히 말 거는 애들이 있어가지고 친해져서 괜찮아졌지만.”

“그랬구나. 몰랐네.”

알았으면 말도 좀 걸고 했을 텐데. 경산은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쑥스러워 미치겠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오므렸다 하고 있는 해도를 보며 남은 감자튀김을 먹었다.

“다 먹었으면 좀 걸을래?”

“응.”

해도는 나가기 전 콘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헉, 고마워.”

하나는 경산에게 주고, 같이 먹으면서 길을 걸었다.

밤이 되니 조금 바람이 불고 선선한 기운이 감돌았다. 걷기 좋은 날씨란 게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거리는 학원에서 나온 애들과 퇴근한 어른들로 적당히 붐볐다. 학원가를 벗어나 주택가로 향하자 다소 한산해졌다. 그때까지 둘은 또 말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 침묵이 퍽 자연스럽고 느긋하게 느껴져서 머물러 있기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도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남은 종이를 주머니에 넣으며 물었다.

“너네 집도 자주 싸워?”

“아니. 어쩌다 한 번.”

“그건 우리 집도 그래.”

“…….”

“참, 나 너희 어머니밖에 못 뵀는데. 전에 체육대회에 오신 분, 맞지?”

“응.”

“아버지는?”

“나는 엄마가 둘이야.”

“아, 그렇구나.”

그 순간,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왔다. 살랑이며 다가온 바람은 앞머리를 흩뜨리고 눈을 깜빡이게 만들고, 땀이 흘렀다 마른 이마와 등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경산의 삐죽삐죽 짧은 머리도 동시에 흐트러지고 흩날렸다. 해도는 경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튀어나온 보도블럭에 넘어질 뻔했다. 경산의 팔을 잡고 겨우 중심을 잡은 해도는 고맙다고 말하곤 빨간불이 초록불로 바뀌기를 기다렸다. 건너편엔 공원이 있었다.

“나는 엄마아빠 둘이 싸울 때 둘 다 미운데, 그때그때마다 더 미운 사람이 생겨. 저번엔 엄마가 미웠는데, 오늘은 아빠가 더 미워. 아니, 싫어.”

경산은 한숨을 쉬었다.

“아빠 없는 나도 마찬가지야…. 둘 다 너무 싫어.”

둘은 마주보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곧 초록불로 신호가 바뀌고, 둘은 공원으로 걸어갔다.

“넌 그럼 언제 집에 갈 거야?”

“글쎄. 난 집 나온 건 아닌데.”

“뭐?”

“난 학원 땡땡이만 친 거야. 집은 안 나왔어.”

“뭐야! 아깐 집 나왔다 그랬잖아.”

“아닌데.”

해도는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칫. 나는 너도 나처럼 집 나온 줄 알고 좋아했는데.”

경산은 삐진 해도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해도가 뭐라고 하자 경산은 일부러 더 크게 웃었다. 아예 배까지 잡고선. 약이 오른 해도는 뭐라 하고 싶었지만 경산을 웃게 한 것이 기분 좋아서 그만두었다.

“그럼 우리 집에 갈래?”

“어?”

해도는 놀랐다. 집에 놀러가는 건 더 친해진 후에야 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경산이 그 짙은 밤에, 맑은 날의 하늘처럼 포근한 미소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데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돼?”

“그럼.”

“엄마들이 뭐라고 안 하실까?”

“오히려 우리 엄마들은 제발 누구 좀 데려오라고 만날 그래. 누굴 집에 초대한 적이 없거든.”

“그래? 그럼 내가 처음이야? 너네 집에 가는 거.”

“응. 완전 처음이야.”

해도는 그 ‘처음’이란 말이 이렇게 기분 좋을 수 있는지, 설레는 말인지를 처음 알았다. 배시시 웃음이 지어졌다. 돌연 저를 둘러싼 공기가, 제게 스며 들어오는 공기가 아이스크림처럼 달고 바람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그럼 가자.”

“좋아!”

둘은 왔던 길의 반대로 돌아가면서, 동상이몽으로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경산은 처음 친구를 데려가는 일에 떨리는 마음을 잘 숨겨야겠다는 생각이었고, 해도는 이 설렘을 있는 대로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하루 동안의 기분은 그네처럼 높이 떠올랐다가도 금방 땅으로 돌아왔다. 어쩌면 엄마아빠가 싸우는 것도 비슷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떠 있는 높이가 달라서, 생각이 달라서. 하지만 영영 다르기만 한 것은 아니라서 함께 살아가고, 맞춰가는 걸 테지.

해도는 경산의 집 앞에서 흡, 하고 숨을 삼켰다. 경산이 왔니? 낯설지만, 경산의 미소처럼 포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윽하게 저문 밤이 열대야로 북적이는 아파트 단지를 감싸 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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