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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미완 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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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Jul 01. 2022

새벽

2019







학교는 늘 지루했다. 전학을 가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던데 자신은 쉽게 변하지 않는 사람인가 보다고 정석은 생각했다. 변하지 않아서 그대로인 자신이 좋을 때보다, 미울 때가 더 많은 나이였다.     


봄은 모든 게 가볍게 느껴지기 좋은 시기였다. 하지만 정석에게는 따듯한 공기와 지겹도록 비슷한 학교의 정경과 함께, 봄이라는 것이, 모든 게 따분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정석은 기숙사에 들어갔지만 고독을 충분히 누릴 수 없는 생활에 적응이 힘들었다. 반에서는 한두 명밖에 얘기하는 친구가 없었고 기숙사에서는 같은 방 애들과 친해지지 못하고 겉돌았다. 어느 날 늦잠을 잤다. 아침 급식도 못 먹고 수업에 늦었다는 것보다도, 아무도 자신을 깨워주지 않았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때부터였다. 새벽마다 제일 일찍 일어나 학교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새벽 봄의 향기를 알게 되었다.


그 애를 알게 된 것도 어느 새벽이었다. 아늑하고 산뜻한 공기는 기분을 맑게 했다. 학교는 부지가 넓고 나무가 많았다. 어딜 보나 신록이었다. 정석은 혼자 교정을 거닐며 음악을 듣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로 했었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낭만과 혼자만의 여유를 만끽하는 기분이 황홀하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헛둘헛둘 소리와 함께 학교의 새벽을 먼저 깨우는 유도부원들을 마주쳤다. 그 중에 가장 뒷줄에 있던 그 애가 잠시 멈춰 섰다. 정석은 손이 떨렸다.


“혹시 이거 네 거야?”


그 애가 내민 건 교복 배지였다. 왼쪽 가슴을 짚은 정석은 명찰 아래로 허전한 부분을 만지고 놀랐다. 저도 모르게 스르르 내민 손에 배지를 쥐어준 그 애는 틈을 타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흰 런닝에 싸인 단단한 가슴이 호흡을 따라 부풀었다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모습은, 땀에 섞인 은은한 체취는, 정석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농땡이 피우지 말고 빨리 안 와!”

“죄송합니다!”


마주친 눈빛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신기루처럼.


하지만 정석에게는 꽤 오래도록 남았다. 그 새벽의 공기, 봄의 신록 속에서 마주했던 향기는 하루가 저물고 계절이 바뀌어도 코끝에서 떠나지 않았다.     






새벽의 산책은 처음 느껴보는 떨림과 일상을 잊는 여운을 주었지만 기숙사 생활을 버티게 해줄 정도로 충분한 위로가 될 수는 없었다. 정석은 엄마에게 열심히 의견을 피력한 끝에 기숙사를 퇴소하고 학교 근처 빌라에서 자취를 하게 되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배로 늘어나 몸과 마음이 편했지만 대신 혼자 이겨내야 하는 외로움이 커졌다. 정석은 그 애를 생각했다. 생각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잊은 적은 없었다. 처음 느끼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고작 그 짧은 봄에서. 해가 떠오르면 사라질 그 아득한 새벽의 끝에서. 잠시 스쳤을 뿐인 그 애가 아른거렸다. 그래서 몰래 이른 새벽의 교정을 다시 찾았다.


다시 눈앞에 마주하고 싶지만, 그 바람만큼이나 다시 마주하기엔 부끄럽다는 마음도 커다랬다. 팔을 아무리 넓게 벌려도 안을 수 없는 나무처럼. 대신 아무도 몰래 그 마음에 물을 주기는 쉬웠다. 정석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위치에 있는 벤치에 앉아 그 애가 근처를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몇 바퀴나 학교를 돌고 또 도는 같은 런닝 차림의 사람들 속에서 항상 뒷줄에 서있는 그 애를 훔쳐보았다.


자주 보다 보니 흠 잡을 데 없이 반듯한 자태나 새벽처럼 말간 얼굴과 달릴 때의 습관 등을 모조리 눈에 익혔다. 그 애는 달릴 때 툭 하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매일 지겹도록 달리는 교정이면서 뭔가 다른 점을 찾으려는 것처럼 그랬다. 정석은 그 애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두리번거릴 때마다 나무 뒤쪽으로 숨으면서 키득거리고는 했다.


여름이 되었지만 그 애의 이름도 몰랐다. 하지만 그 애의 이름을 아는 사람들보다 더 알고 있는 것이 많을 거라고 정석은 생각했다. 모두 잠든 새벽은, 깨어있는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은은한 비밀이 공중을 나는 시간이니까.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점차 무르익는 빛에서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는 하니까.

    

그 학교는 도내에서 유도부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대우를 받았다. 기숙사도 더 좋은 신식 건물을 쓰는 것은 물론이고 급식도 항상 가장 먼저 먹을 수 있고 학교 재단에서 주는 장학금 대상도 일반 학생보다 넓게 적용되었다. 그래서 일반 학생들과의 사이에서 종종 마찰이 일어나기도 했다. 정석은 애초에 학교생활이 무료하고 싫었기 때문에 유도부나 학생 사이의 차별이나 아무것도 관심이 없었지만, 그 애를 만난 뒤로는 속으로 유도부 편을 들고 있었다. 어쩌다 강당 체육관에서 훈련을 하는 유도부원들을 마주칠 때면 반 애들은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본 체 만 체했지만 정석은 혹시 그 중에 그 애가 있을까 싶어 열심히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새벽이 아닌 모든 하루에서.






어느 날 싸움을 했다. 유도부로 유명한 것만큼이나 싸움박질로 근방에 유명한 학교인지라 교사들 입에선 이놈의 학교엔 쌈닭들만 오나봐 하는 소리가 안 나오는 날이 드물었다. 정석은 그런 학교의 기류에 휩쓸리지 않을 생각이 확고했지만, 매일 시비를 걸던 남자애와 말다툼으로 시작해서 몸싸움이 벌어지고 말았다.


전학생인 탓도 있었지만 성격도 얌전한 축이었던 정석이 싸움을 했다는 건, 그것도 그 남자애를 멱살 잡고 밀다가 창문 하나를 깨먹었다는 건 꽤나 화제가 되었다. 학생부장은 둘 다 잘한 건 없지만 그래도 너는 걔보다 다치진 않았잖느냐며 교내 봉사 처분을 받았다.


그 일은 정석에게 있어 삶의 첫 일탈이었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도 아주 큰 일탈이 되어주기도 했다.


“…여기 들어오면 안 되는데.”


체육관에서 마주친 그 애는 따듯한 햇살이 부서지는 오후에도 새벽의 향기가 났다. 온종일 잠시도 숨이 고른 적 없는 것처럼 여전히 들썩이는 가슴으로 뜨거운 체온을 느끼게 하는 모습이었다.


정석이 교내 봉사로 청소를 하게 된 곳은 유도부가 쓰는 체육관이었다. 훈련장과 샤워실, 락커룸, 휴게실까지 혼자 대걸레질을 하고 샤워실 물을 빼고 수챗구멍을 깨끗이 하고 휴게실 책상와 의자를 닦고 정리했다. 원래 담당으로 청소 일을 하는 분이 계셨지만 농땡이를 피울 순 없었다. 정석은 뭐든 해야 하는 일이면 미루거나 피하지 못하는 성미였다. 학교에 오는 날이면 매일 와서 두 시간씩 청소를 했다. 세 시간 가까이 하는 날도 있었다. 열심히 훈련에 임하는 그 애를 훔쳐보다가 속도가 느려진 탓이었다. 그럴 때면 정석은 몰래 입술을 삐죽거리며 속으로 그 애 탓을 했다. 잠깐 마주치기만 했어도 날 혼란스럽게 하더니 십 분만 보고 있어도 정신을 놓게 만들잖아.


이름을 알게 된 건 아주 사소한 순간이었다. 그 의미는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정석은 그 순간을 아주 또렷이 남겨두려고 애쓸 만큼 그 애의 이름도 목소리도 좋아하게 되었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유도부원들이 우르르 몰려 나간 뒤에 청소를 하려고 들어갔을 때, 아직 나가지 않은 그 애를 마주쳤다. 그 때 정석은 깜짝 놀라 새된 소리를 질렀지만 그 애는 정석을 보고 큰 소리로 웃었다.


“사람 놀래키니까 재밌어?”

“응, 너 방금 표정 진짜 웃겼어.”

“씨이….”


웃긴 표정을 보여준 게 민망한 정석은 고개를 숙인 채 가슴을 졸였다. 그런 정석의 모습에 미안해진 그 애가 물었다.


“너 나 알지?”


정석은 다르게 놀란 얼굴로 입을 살짝 벌린 채 그 애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애는 자신이 얼마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할까. 조심스러운 만큼 설렜다.


“정석이, 맞지.”

“응.”

“내 이름은 알아?”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정석에게 다시 미소 지은 그 애가 말했다.


“이윤새. 한글 이름이야, 부럽지.”


교복을 제대로 입은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이름을 알 길이 없었는데, 직접 알려주다니, 정석은 감격스러웠다. 인생은 새옹지마라더니 벌 받는 일이 더 좋은 일이 될 줄이야. 더는 그 애를 훔쳐보거나 혼자만 알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새롭게 눈이 뜨인 기분이었다. 해가 저물지 않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윤새는 일주일이 지나서야 왜 청소를 하냐고 물었다. 조심스럽게 묻는 표정이 배려를 담고 있는 걸 알았지만 정석은 부끄러웠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어쩌다 싸움박질을 했다는 얘기에 윤새는 또 크게 웃으면서 좋아라했다. 정석은 황당해서 왜 그러냐고 되물었다. 안 그럴 것 같은 애가 그랬다는 게 웃기다고 했다. 정석은 윤새의 장난기가 당황스러웠지만, 시간이 지나면 기분 좋았다.


하얀 도복을 입고 상대와 엎치락뒤치락 하는 윤새를 구경하는 일이 재미있었다. 정석은 윤새에게 허락 아닌 허락을 받아서 관중 좌석 첫째 줄에 앉아서 구경하기를 즐겼다. 룰도 기술도 아무것도 모르지만 윤새를 보고만 있어도 좋았다. 훈련이 끝나고 나면 윤새의 몸은 소나기를 그대로 맞은 듯 흠뻑 젖어있고는 했다. 그 때 정석은 잽싸게 일어나 수건을 들고 다가가서 윤새에게 건네주었다. 윤새는 흰 수건으로 얼굴과 목을 닦아내고는 개운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한낮의 햇살처럼 눈이 부셨다. 그 미소는 은은한 가루가 되어 흩날려서, 제게 골고루 뿌려지고, 반짝이는 백사장의 모래처럼, 잡을 수 없게 스며드는 것 같았다.


훈련이 끝나고 샤워를 한 윤새는 먼저 체육관 앞에서 정석을 기다렸다. 저녁 시간까지는 사십 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그 때 둘은 함께 교정을 거닐었다. 함께 할 수 없는 새벽을 달래주는 것처럼. 포근한 마음과 느긋한 걸음으로.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운동장 스탠드 그늘에 앉아있기도 했다.


“그때 말이야, 왜 혼자 걷고 있었어?”

“그땐 기숙사에 있었어. 기숙사 자습실이 일곱 시에 여는데 들어가기 전까지 일찍 일어나서 좀 걷고 싶었어. 음악도 들으면서.”

“왜?”

“기숙사에 있으면, 혼자 있을 수가 없으니까. 난 혼자 있는 시간을 제일 좋아하거든.”


윤새는 마치 둘만의 엄청난 비밀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생기 있게 놀란 표정을 하고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나돈데. 나도 혼자 있는 시간이 꼭 있어야 돼.”

“근데 너도 기숙사이지 않아?”


“맞아.” 남은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윤새가 아이스크림 비닐에 막대를 넣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는… 밤에 혼자 나와 있는 걸 좋아해. 그때 학교 후문으로 나가서 동네를 걸어 다니기도 하고, 아니면 여기 사방에 벤치가 있으니까 아무데나 앉아서… 너네가 자습하고 있는 건물에 몰래 들어가 보기도 하고.”


그런 사소한 공통점에도 가슴이 떨려서 꼭 모든 게 운명처럼 느껴지고는 했다. 정석은 윤새가 하는 모든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심장까지 기울여서 윤새가 알아줬으면 하기도 했고, 아니면 몸과 반대로 마음만은 멀리로 잠시 보내버려서 윤새가 아무것도 몰랐으면 바라기도 했다.


“불빛이 안 꺼지는 걸 보면, 기분이 묘하고 신기하더라. 저렇게 열심히 하는 애들이 많구나 싶고. 물론 나도 열심히 하긴 하지만, 나랑은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어. 근데 사실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고… 그래서 뭔가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 하긴 밤이 되면 좀 감성적으로 되잖아 사람이.”


새벽이 돼도 꺼지지 않을 듯한 불빛들이 모두 저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고 그래서 왠지 위로를 받은 것 같았다고, 윤새는 말했다.


“왜 매일 새벽에 뛰는 거야? 그것도 훈련이야?”

“아 그거, 매일 하는 거야. 그냥 루틴이야 루틴.”

“매일? 토요일 일요일에도?”

“응. 하루도 쉬면 안 돼. 하루라도 쉬면 몸이 먼저 알아. 쉬면 안 된다고 그래.”


윤새와 함께 있는 시간은 아이스크림처럼 너무 달콤해서, 빨리 녹아 사라졌다.      






정석은 봉사 시간을 다 채우고 나서도 체육관에 갔다. 훈련에 임할 때는 신경을 곤두세우기 때문에 아무나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고 했지만, 다들 정석이 윤새의 친구라는 걸 알고는 묵인해주었다. 처음 왔을 때는 대부분 체격도 크고 인상도 험상궂어 보여서 겁먹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다들 그저 저와 같은 또래구나 싶어서 무서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같은 반 애들보다도 착하다고 느꼈다.


정해진 대련 시간이 끝난 윤새는 비 오듯 땀이 흐르는 몸으로 숨을 골랐다. 정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수건을 들고 윤새에게 다가갔다. 윤새는 주인을 줄곧 기다린 강아지처럼 명랑하게 다가오는 정석의 모습에 웃음을 지었지만 그렇게 말했다.


“정석아, 수건 안 갖다 줘도 돼.”

“내 맘이야.” 정석은 살짝 서운한 채로 말했다.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 다가가는 건데. 윤새는 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하기야 저를 본 새벽이 단 며칠뿐이라고 알고 있을 테니까. 수줍게 나무 뒤로 숨어서 바라봤던 지난한 새벽들을 알지 못할 테니까.


윤새는 보통 가장 먼저 샤워를 하러 가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느긋했다. 정석은 왜인가 싶었지만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둘만 남자 윤새의 생각을 알아챘다. 도복을 벗지 않은 윤새는 수건으로 땀만 닦았음에도 상쾌하단 얼굴로 정석을 바라보며 손짓했다. 정석은 동그랗게 커진 눈을 하고선 머뭇거리며 다가갔다.


“정석아, 싸움 잘하고 싶어?”

“아니?!”


싸움박질 하고선 벌 받아서 온 거라고 한 뒤로 윤새는 자주 저런 농담을 쳤다. 그 때마다 정석은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혔다. 조금만 더 짓궂으면 삐질지도 모르는데, 다행히 윤새는 선을 넘지 않는 법을 알고 그 선을 지켰다. 그럴 때면 반대로 윤새가 저를 잘 아는 것 같아서, 정석은 조금 혼란이 일기도 했다. 윤새로 인한 혼란은 언제나 마음속에 존재했다. 파도처럼 밀려갔다 쓸려오기를 반복했다. 밤이 되고 달이 차고 기울수록 파도는 더 깊고 맹렬해졌다. 정석은 윤새를 만난 뒤로 많은 것을 느꼈다.


“내가 뭐 하나 가르쳐줄까?”

“어떤 건데?”


윤새는 흥미 가득한 얼굴로 천진하게 웃었다. 정석은 좋아하면 좋아한다는 게 티가 나고 힘들면 힘들어하는 게 티가 나는 윤새의 솔직함과 순수함이 좋았다. 자신은 그러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윤새의 그런 모습이 더 크게 느껴졌다.


윤새는 도복의 매무새를 다듬고 허리띠를 조금 더 조이면서 말했다.


“싸움을 잘하려면 말이야. 낙법을 알면 좋대. 이게 훌륭한 방어를 하는 방법이거든. 방어는 공격의 어머니라고, 아 이 말 좋은데? 방금 지어냈다 나 천재 같지?-는 뻥이고 감독님이 매일 그렇게 얘기하셔.”


윤새는 두 주먹을 얼굴 앞에 대고 마치 권투라도 하는 자세로 서서 장난스럽게 덤비라고 말했다. 정석은 까르르 웃었다. “넌 유도잖아. 왜 복싱을 하고 그래!” 뭐라거나 말거나 윤새는 장난기 가득하게 비열한 표정을 꾸며낸 채로 몸을 들썩거렸다. 정석은 공격성이라고는 하나도 가지지 못한 주먹을 어설프게 쥐고선 윤새에게 다가갔다. 너무도 잘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꼭 그렇게 다 보일 듯이 투명한 마음처럼.

윤새는 엉덩이를 살짝 뒤로 빼라거나 왼발을 내딛어보라고 했다. 정석은 윤새가 시키는 대로 자세를 바꾸면서 퍽 재밌어했다. 그러다 윤새의 손이 제 허리나 등에 닿기만 해도 움찔움찔 놀랐다. 갑자기 너무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평소보다 더 많이 웃고 말도 많아지고 다정해진 윤새에게 왜 겁이 났을까. 정석은 좋아하는 마음에 겁이 난다는 걸 이해할 수 없어 조심스러웠다.


믿기지 않았다. 조금의 빈틈도 없이 가까워진 순간. 정석은 맞닿은 가슴에서 윤새의 심장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새벽 향기를 타고 느끼던 체취가 가슴의 온도를 높이고 잠시 눈앞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팔꿈치로 바닥을 짚은 채 정석의 몸 위로 제 몸을 포갠 윤새는 무슨 낙법의 이름을 알려주었지만 정석은 기억하지 못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이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너무도 가까워서 숨결마저 섞일 듯했다. 너무도 가까워서 감추고 있던 마음까지 다 보일 듯했다. 윤새의 눈빛은 호숫가에 금빛 햇살이 일렁이는 윤슬처럼 잔잔하고도 깊었다.


“정석아, 괜찮아?”


도리어 그렇게 묻는 말에 더는 괜찮을 수 없었다.


도망치듯 달려간 정석은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보이고 싶은 것보다 보이고 싶지 않았던 마음을 다 들켜버린 기분에, 조금씩 미워지는 건 윤새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뜀박질을 멈추고도 심장은 한참이나 가라앉지 않았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 하늘은 은빛 계절의 색을 안고 있었다.     


밤은 쉽게도 깊어졌다. 매일 밤을 맞이하는 마음은 그럴 수가 없는데도.


언제부턴가 제 마음 속에서, 모든 하루의 순간에 존재하고 있는 얼굴이 마음에 멍울을 지게 했다. 분명 무척 신경 쓰이고 아픈데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자율학습에 임하면서도 자꾸만 어두컴컴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윤새가 창가 아래 어디쯤엔가 서서 여길 바라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생각할 수밖에 없게 돼버려서, 윤새가 더욱 보고 싶었다. 윤새는 하루 일과처럼 어두운 학교를 걸으며 불 켜진 교실의 광경을 본다고 했지만, 자신이 어디 있는지를 찾을 수 없을 텐데. 눈앞에서 애타는 얼굴을 마주보고 있어도 제 마음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처럼. 정석은 더없이 속상했다. 하지만 감정은 작은 생각 차이로 금세 바뀌어버리곤 했다. 그래도 윤새가 바라봐주고 있다는 느낌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만큼 윤새의 존재는 더없이 소중했다. 마음이 물들고 익어가는 데에는 시간과 생각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시험 기간 때문에 지친 몸을 이끌고 나오던 정석은 하나둘씩 모여서 건물을 빠져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윤새를 발견했다. 현관 바깥에 우뚝 서있는 윤새는 자율학습을 마치고 나오는 아이들 속에서 무척 쑥스럽고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단단한 체격으로 힘 있게 서있었다. 이 밤 내내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다고 알려주는 듯했다.


정석이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윤새는 반갑게 정석을 부르며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정석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섰다. 아직 가까워지기엔 제 마음이 너무 무거운 것 같았다.


“왜 이러고 있었어?”


기다려달라고 한 적도 없고 만나기로 한 적도 없는데. 정석은 난감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계단을 내려와 현관을 나서는 애들이 꼭 한두 번씩 둘을 쳐다보고 지나갔다. 흰 티에 회색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편한 차림새의 윤새와 단정한 교복을 갖춰 입은 정석은 그런 겉모습보다도 무언가 다른 점이 많아 보였다. 그게 더 크게 드러나지 않을까 싶어서 속상함이 컸다.


그냥, 그냥 윤새가 좋을 뿐인데. 처음 봤을 때부터 줄곧 이렇게 가까워지고 싶었는데. 저 눈빛을 간직하고 싶었는데.


“…보고 싶어서.”


윤새의 말 한 마디로 주변 세상이 달라지는 느낌이라니.


정석은 그 말을 들으면서도 믿을 수 없어 멍해졌다.


“살면서, 물론 내가 아직 별로 안 살았지만, 내가 살면서… 보고 싶다는 말을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누가 이렇게 보고 싶은 건 처음이었어.”


윤새는 마찬가지로 쑥스러워 죽겠단 얼굴로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었다.


“네가 보고 싶었어.”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나에게 소중해서.


누군가 보고 싶은 마음을 알게 되었단 윤새의 진심은 정석의 이미 녹아있던 마음을 더 풀어지게 만들어서 밤공기 사이로 흩뜨려버렸다. 그렇게 사라진 것은 걱정, 두려움, 부끄러움 같은 것들뿐이었다. 모든 좋은 것들은 제 안에 남아서 윤새에게 가까이 가도록 발을 내딛을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다가온 정석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준 건 윤새였다. 해맑게 웃으며 조금 걷지 않겠느냐고 묻는 윤새에게, 정석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기는 일뿐이었다. 밤의 향기를 이렇게 맡아본 적이 있었던가. 향기를 맡으면 맡을수록 윤새를 더욱 섬세하게 알아가는 느낌이었다. 정석은 그제야 윤새를 따라 웃을 수도 있었다.


밤의 어둠은 모든 게 사라진 게 아니었다. 모든 색을 안고 있기에 어둡고 깊은 것이었다. 그래야만 새벽이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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