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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미완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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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Jul 19. 2022

H8

2020








이 학교에선 좀 착하게 살아가야지. 은정은 단순하게 생각했다.

아, 덧붙여서 좀 더 조용하게. 눈에 띄지 않게. 제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이번에도 혹시나 그 노력이 자신을 배신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노력밖엔 없었다.


담임교사가 말한 빈자리는 거의 정확하게 교실 한가운데였다. 불길한 예감이 드는군. 은정은 조숙한 분위기로 내리깔던 눈을 들어 자리로 가면서, 그 빈자리의 옆에 심드렁한 얼굴로 앉아있는 사람과 처음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아무런 의중 없이 다가가면서야 생각했다. 그 불길한 예감이 바로 저 애라고.


“승은이는, 은정이랑 짝이니까 많이 알려주고 도와주고 그래라.”


성의 없는 대답과 빈정거리는 미소에 은정은 살짝 기가 죽었다. 웬만해선 자신감을 잃지 않는 난데. 은정은 살가운 척 웃으며 인사했지만 승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간을 좁히며 노려봤지만 문제집만 푸는 승은은 제게로 고개 한 번 드는 일이 없었다. 점심시간까지 계속.


“나랑 점심 같이 먹을래?”


선뜻 다가온 선영이 없었다면, 아마 점심을 굶었을 테다. 혼자 급식실에 가서 밥을 먹는 건 죽기보다 싫으니까. 은정은 뒷자리에 앉아 잠만 자던 선영의 고슬고슬한 정수리가 떠올랐다.


“전승은 말이야. 혹시 어떤 애야?”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선영은 꼬아듣는 기색 없이 대꾸했다.


“어떤 애냐는 게 무슨 말이야?”

“그냥… 말도 없고 무뚝뚝하고 그러길래.”

“아. 별로 나쁜 애는 아니야 걔가. 그냥 자기 공부 하느라 남한테 관심 없고 귀찮아하는 거지.”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고 물었을 때, 선영은 천진한 듯 보이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남 관찰하는 거 좋아하거든. 그냥, 보기만 해. 은정은 미심쩍게 느꼈다. 그럼 너도 날 지켜보다가 다가온 거야? 아무튼 혼자 밥을 먹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멀리서 다른 애와 손을 잡고 줄 서있는 승은의 뒷모습에 오래 시선이 머물렀다. 어쩐지 더 배가 고프고 멍해졌다.     

 






몸이 부딪혀 초코빵을 떨어뜨렸을 때, 은정은 짜증난 눈으로 바로 그 상대를 쏘아봤다.

승은이었다.


“미안.”


별로 안 남아있던 거라 화내기도 뭐하고, 승은이 바로 가버려서 뭐라 할 새도 없었다.


“으이, 아깝다. 하나 더 사먹을래?”


옆에서 요구르트 5개에 빨대를 하나씩 꽂아놓고 먹고 있던 선영이었다. 은정은 됐다고 내젓던 손으로 봉지를 주워 쓰레기통에 던졌다. 꼬부기 스티커 나와서 좋아했는데. 기분이 더러울 때면 유독 하늘이 예뻐 보였다. 성질나게 눈부셨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승은은 은정을 은근히 싫어했다.

전 학교랑 분명히 다른 진도도 알려주지 않고 체육복을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판다는 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국영수는 성적대로 분반 수업을 한다는 것도 알려주지 않아서 은정은 그대로 교실에 남아 수업을 들으면 되었지만 반을 옮기는 줄 알고 옆 반으로 갔다가, 다시 자리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제 자리에 다른 애가 앉아있는 모습을 봤다. 강슬기. 선영의 말에 따르면 승은과 어릴 때부터 친구이고 서로 아주 비슷한, 공부만 하는 조용한 애라고 했다. 둘을 쬐려보고 다른 자리에 앉았다.

분반 수업 때마다 자리를 피해주는 데도 고맙다는 말도 기색도 없는 게 괘씸했지만 아무 말도 안 했다. 은정은 집중이 안 되는 그 수업 내내 승은의 뒤통수를 노려보면서, 선영의 생각이 반쯤 틀렸다고 생각했다. 제게만 나쁘게 구는 걸 보면, 무슨 버튼을 눌러서 껐다 켰다 하는 느낌이었다. 지 친구랑 있을 때만 가끔 시시덕거리다 웃고.


“그럼 승은이가 너 좋아하는 거 아냐?”


선영의 다분히 공상적인 말을 들었을 때 은정은 코웃음 쳤다. 사실 좋아해서 괴롭히는 거라는 말, 개소리인 거 요즘 누가 몰라.

정말 좋아하면 이렇게 관심과 애정을 갖고 보여줘야지.


“귀엽다 정말.”


은정은 학교 체육관 뒤 담벼락에 누군가 갖다놓은 쿠션 위에 앉아있는 고양이를 보며 즐거웠다. 혼자서 학교를 둘러보겠다고 제멋대로 여기저기 쏘다니다가 발견한 고양이의 아지트였다. 주황색과 하얀색 털이 교차하는 무늬와 순한 눈동자가 사랑스러웠다.


“오늘은 언니가 초코우유 가져왔다? 너도 초코맛 좋아하니?”


옛날에 내가 키우던 애는 좋아했었거든. 그래서 걔 이름을 초코라고 지어줬었어. 보통 초코는 강아지한테 많이 지어주는 이름인데, 나는 그냥 그렇게 불러주고 싶었어.


“우유 먹으면 안 돼.”


바스락거리며 낙엽을 밟은 회색 운동화만 보고도 알았다. 단호한 목소리로 제게서 우유를 뺏어든 승은이 그걸 바닥에 던지는 걸 보고, 은정은 화가 났다.


“왜 그래?”

“찬 우유 먹으면 설사해.”


승은은 조금 떨어진 데 쭈그려 앉아서, 고양이에게 참치캔을 따서 주었다. 기름을 졸졸졸 따라서 버리고, 물 담은 락앤락을 옆에 놓고, 팔짱을 끼고 흐뭇하게 바라보는 모양새가 한두 번 돌본 게 아니었다.


“네가 키우는 애야?”

“응.”


이게 서로 처음 나누는 대화라니. 은정은 어이가 없었다. 하긴 말을 걸려고 해도 걸고 싶지 않게 구는 게 누군데.


“얘 이름은 뭐야?”

“웬디.”

“웬 이름이 웬디…” 라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은정이 금방 입을 다물었지만, 승은은 흘깃 쳐다볼 뿐이었다. 웬일로 기분 나빠하는 기색이 아닌지 은정은 의아했다. 아주 지멋대로구만.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이라도 춰야 할지 알 수가 없는 애였다. 하다못해 그늘 짙은 목소리로 하는 그런 말조차도. 저를 한 순간도 안심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내가 갖고 싶은 이름 중 하나야.”


웬디가? 피터팬에 나오는 그 웬디인가? 은정은 교차한 팔에 고개를 묻다 살며시 웃는 승은이 가만히 웬디를 쓰다듬어주는 모습을 얼마간 바라보았다.


“그럼 그렇게 불러줄까? 웬디라고.”

“아니.”


정색하는 승은의 표정에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겨우 참았다. 하마터면 증오의 대상이 될 뻔했네. 문득 색만 다르지 같은 브랜드 같은 디자인의 운동화를 신고 있는 걸 알아챘다. 은정은 제 남색 운동화가 보이지 않게 치마를 더 내렸다.     






한 번 그런 시간이 있었다고 해서 사이가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은정은 생각을 바꿨다. 제가 먼저 피하지 않겠다고.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왜 피해야 해? 분반 수업 때도 일부러 자리를 비켜주지 않고 팔을 괴고 자는 척했다. 친구랑 정 앉고 싶으면 지가 자리를 옮기든가. 그런데 선생님이 부르는 소리에 일어나니 옆엔 그대로 승은이 있었다.


뭐야, 그럼 걔는?


뒤돌아 주위를 둘러본 은정은 다른 뒷자리에 앉아서 문제집을 펴는 슬기를 보았다. 다시 승은을 쳐다봤을 때, 똑같은 자세와 분위기로 앉아있는 승은이 문제집 아래로 몰래 다른 책을 펴놓고 있었다. 승은이 수학 쌤을 싫어해서 수업을 안 듣고 다른 책을 읽는다는 걸 처음 알았다. 마찬가지로 늘 뒷자리에서 몰래 음악이나 듣고 딴 짓 하던 제 모습을 떠올린 은정이 큭, 웃었다.


자유시간이래서 축구를 할 때, 은정은 일부러 승은에게 붙어 공을 뺏었다. 헉헉거리며 교체를 외치던 승은이 이를 바득바득 가는 표정으로 제게 잽싸게 달려오는 모습이 눈에 훤했다. 은정은 공을 다른 애에게 패스하고는 끈 풀린 운동화를 쳐다봤다. 귀찮게. 확 벗어버릴까. 딴 생각을 하던 은정의 눈에 다른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저를 지나쳐 그늘로 가는 승은이었다. 색만 다른 같은 운동화.

그 순간 은정은 승은이 신발끈을 묶을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전승은.”


제 부름에 돌아봐주는 모습이 처음이라 감격스러울 정도라고 빈정거리며 생각하면서도, 선뜻 다가가는 용기는 결코 조그만 마음이 아니었다. 지퍼를 턱 끝까지 다 올린 자주색 체육복 위로 승은의 말간 얼굴에 놀란 빛이 어려 있었다. 그때 그 표정이 퍽 귀엽다고 생각했다.

근데 저 표정은, 처음 왔던 날 봤던 거랑 꽤 비슷한데?


“잠깐 있어봐.”


잔털이 난 하얀 종아리 아래로 하얀색 긴 양말, 승은은 발목을 훨씬 넘는 하얀색 긴 양말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꽤 오래 신었는지 발코나 신발끈이나 브랜드 이니셜이 헤진 디테일이 보였다. 다정하게 숙였던 몸을 일으킨 은정은 다른 어떤 말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승은은 갑자기 뒤를 돌아서 빠르게 달려 나갔다. 보이지 않는 선을 따라 반대편으로. 자신의 반대편으로. 숨이 차지도 않는지 멈추지도 않고 체육관과 별관 사이로 사라졌다.


은정은 승은을 붙잡을 생각이 없었는데 어쩐지 손이나 발이 따끔거리고 저릿한 감각을 느꼈다.   




  


가을 소풍으로 시내에 있는 작은 읍성에 왔다. 대강 한 바퀴 둘러보는 데 한 시간도 안 걸리는 읍성은 결코 매력적인 소풍 장소는 아니었지만 시내가 가까워서, 반 애들은 어서 선생님이 집합을 시키고 자유시간을 갖게 해줬으면 하며 느릿하게 걷고 있었다.

승은은 누구와 메시질 주고받는지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은정은 그 하얀색 폴더폰이 부러웠다. 작지만 투박하게 생긴 제 은색 구형 핸드폰은 꺼내기조차 싫을 정도라서. 아마 그 슬기라는 애겠지. 같이 시내에서 만나 놀 생각이겠지.


허식일 뿐인 종례가 끝나고 애들은 버스정류장에 모여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눈치싸움을 했다. 은정은 승은의 옆에 서있었다. 연보라색 후드티에 청바지를 입은 모습을 몰래 훑어보다 눈이 마주쳤다. 민망해서 고개를 돌렸다. 금방 버스가 와서 승은의 뒤로 붙은 은정은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놓았지만 승은은 이어폰을 꽂고 창밖만 보았다. 엠피쓰리도 하얀색 예쁜 거네. 은정은 승은이 무슨 음악을 듣는지, 무슨 장르와 가수를 좋아하는지 궁금했다.


“나 한쪽만 주면 안 돼?”


첫날처럼 싹싹한 척 물었지만 승은은 대꾸하지 않았다. 치사한 자식. 은정은 똑같이 은색에 작고 네모난 엠피쓰리를 가방에서 꺼냈다. 그저께 화면이 망가져서 안 나오는 바람에 일일이 버튼을 눌러서 노래를 넘겨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얼른 용돈 모아서 다른 거 사야지.


같은 정류장에서 내린 은정은 승은이 영화관이 있는 건물 앞에 서는 걸 보고 조금 떨어져서 섰다. 기다리는 모습을 왠지 계속 보고 싶었다. 그게 제가 아닌 건 당연하니까.


“왜 그러고 있어?”


승은이 언짢단 얼굴로 물었다.


“나도 기다리는 거야.”


은정은 관심 없다는 듯 딴청 피우는 연기를 할 생각으로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꽂았지만, 승은의 시선은 제게서 쉽게 떠나지 않을 작정으로 보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사실은 승은과 같이 놀고 싶었다. 영화도 보고 카페에서 허니브레드도 먹고 팬시샵에서 다이어리 스티커나 노트나 필기구를 구경하고 몇 개를 골라서 사고 노래방도 가고 싶었다. 선영과는 두 번이나 그렇게 놀았지만, 그 때마다 왠지 승은이 생각났었다. 너는 카페에서 주문을 할 때 쑥스러움을 타는지 아니면 의외로 이것저것 까다롭게 요구하는지. 너도 다이어리 꾸미는 걸 좋아하는지. 샤프나 펜을 색색 별로 모으는 취미는 없는지. 만화방에서 만화책 빌려보는 걸 좋아하는지. 궁금한 것이 많아질수록 승은이 미웠다.


괴롭히는 게 좋아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님은 알지만, 미워하는 게 좋아한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그렇다고 너무 미워하지도 않았다. 너무 좋아하고 싶진 않으니까.


“야.”


은정은 가까이 다가섰다. 그때 승은이 흠칫 놀라는 게 보였다. 그렇게 예민하게 굴 땐 언제고 왜 이럴 땐 놀라고 그래. 꼭 내가 괴롭히는 것 같잖아.


“너 내 이름 몰라?”


은정은 이어폰을 거칠게 빼내고 줄이 맘껏 엉키도록 손에 쥐었다.


“왜 한 번도 이름을 안 불러?”


이번에는 말 안 하고 내빼면 얼마든지 달려가서 붙잡을 생각이었다. 더는 맘대로 구는 걸 내버려두고 싶지 않으니까.


“네 이름이 싫어.”


승은은 다시 저를 볼 생각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곁에 선 은정은 생각도 못한 이유라서 당황했다.


“네 이름 가진 애들, 다 나한테 못되게 굴어서. 그게 생각나서 싫어. 어쩔 수 없어.”


미안하단 말을 듣고 싶었던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이유를 듣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럼 내 이름이 만약 웬디였으면, 너는 날 좋아해줬을까?

그런 허무맹랑한 생각까지 들었다. 그럼 내 이름이 피터팬이었으면 너는 어디까지 날 따라올까?

웃기지도 않아. 유치해.


은정은 집까지 걸어오는 내내 승은에 대한 생각을 제 머릿속에서 모조리 빼내려고 애썼다. 처음 봤을 때부터 가졌던 모든 감상과 이상까지도.


그렇다고 널 싫어하고 싶은 건 아냐. 네가 날 싫어한다고 해서 나도 널 싫어할 수는 없어. 그럼 내가 너무 힘들어지잖아.

너 혼자만 날 싫어해. 그렇게 너만 힘들고, 너만 날 신경 써.


이제야 승은이 저 만큼이나 불길한 예감을 늘 안고 사는 애라는 걸 알았다.     






언제부턴가 승은이 고양이를 보러오지도 않는다는 걸 알아챘다. 지속적이던 애정이 사라져선지 좀 더 안쓰러워 보이는 고양이를 바라보는 은정은 쓸쓸함을 느꼈다. 너나 나나 왠지 비슷하구나. 같이 쭈그려 앉아 웬디를 볼 때, 승은은 누구보다 다정해보였었다. 집에서 못 키우게 해서 여기서 키우는 거랬으면서. 그건 나도 그런데. 은정은 매점 전자레인지에서 데워온 우유를 락앤락에 따라주고 웬디를 쓰다듬어주었다. 승은이 그랬던 것처럼.


시험기간이 끝나고 자리를 바꿨다. 은정은 말 많고 늘 애들이 주위에 모여 있는 시끄러운 반장이 옆자리라서 싫었다. 차라리 지독하게 과묵하고 무심한 전승은이 낫지. 결국은 그렇게 무심한 애가 아니란 걸 알았으니까. 맨 앞자리가 된 승은의 뒷모습에 대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개불쌍. 분반 수업 때마다 자리를 옮기고 싶어도 네 자리는 아무도 안 앉을걸. 수학쌤 담배 쩐내 진동하는 입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데.


다시 은정도 굳이 노력하지 않는 모습으로 돌아갔다. 온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벌써 알았다. 무엇도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애석한 사실을.

그랬다가는 전처럼 쉽게 들킬지도 몰랐다. 은정은 모두가 손가락질 하지 않아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저를 멸시하던 학교의 정경을 생각했다. 책상 아래로 주먹 쥔 손이 떨렸다. 지긋지긋했다. 좋아하고 싶어서나 티내고 싶어서 좋아한 게 아니었던 마음이, 드러나면 얼마나 모난 말과 시선에 상처를 입고 깎이고 깎이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조금만 티를 내도 눈덩이처럼 불리고, 조금만 손을 잡으면 그 손을 짓밟아버리잖아.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저를 싫어한다는 승은이 정말 진심인지. 만약 저도 그랬으면 그 이름들이 워낙 흔해서 이 반에도 몇 명이나 되기 때문에 더 힘들었어야 했다. 그러지 않는 이유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명확하고 합당한 이유는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힘든 일이었다. 좋아하던 사람을 싫어하게 되는 것도.


가장 끝 번호인 은정은 첫 번호인 승은과 주번이 되었다. 은정은 다시 짤막한 대화라도 나눈다거나 서로 간에 쌓인 앙금을 푼다거나 하길 기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주번으로 맡은 일은 해야 되는 거 아닌가. 매일 혼자 일찍 가버리고 분리수거도 안 하고, 저를 거들떠도 안 보는 승은이 답답했다. 유치하기 짝이 없고 한심하다는 듯이 쬐려보다가도 마음을 빨래하듯 꾹꾹 눌러 짜고 말려버렸다. 일주일만 지나면 되니까.


선영은 학원 차가 왔다며 더 같이 있지 못하고 가면서 말했다.


“이쯤 되면 진짜 승은이가 너 싫어하나 본데.”


은정은 교실 바닥을 빗자루로 쓸면서 딱 잘라 말했다.


“이쯤 되면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랬어.”

“원래부터? 그건 아닌데. 승은이가 그런 애는 아닌데.”

“…그런 애는 어떤 앤데?”


이젠 내가 너보다 걔를 더 잘 알아. 은정은 아무도 뭐라 하지 않고, 신경 쓰지 않는 승은에 대해서 생각했다. 노력하지 않고도 그렇게 마음대로일 수 있는 승은이 대체 어떤 애일까, 는 더 생각해보아야했다.

자습이 있는 토요일에도 가장 늦게 나온 은정은, 정류장에 앉아있는 승은을 보고는 지치는 기분을 느꼈다.


기껏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더니. 왜 여기에 있냐고.

대체 나보고 어떡하라는 건데.


승은의 옆에 가방을 큰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이어폰을 꽂고 있던 승은이 은정을 쳐다봤다. 은정은 그 이어폰을 뺏어 제 귀에 꽂았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있었다. 멍하니 앉아서 뭘 기다리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버스 한 대가 다가왔다. 사람 몇 명이 내리는 동안 둘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내 버스가 떠나가고, 다시 둘이 된 정류장에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승은은 특유의 버릇대로 외투를 턱 끝까지 올리지도 않고 지퍼를 다 열어놓고 있었다. 정말 유치하고 멍청해 보였다. 어느 새 승은을 닮은, 어쩌면 원래 그토록 비슷했던 담담한 눈에는.


“계속 나 그렇게 싫어할 거야?”


승은은 그렇게 묻는 은정을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누군 네 이름이 맘에 드는 줄 알아? 별로 유별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흔하지도 않으면서, 어쩌다 한 번 불러보고 싶게 생겼어, 평생 못 잊어먹을 것 같아. 그래서 짜증나.”


은정은 더 참지 못하고 솔직하게 구는 자신이 싫었다. 저도 제멋대로 굴면서도 상처 주지 않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게 세상을 살아가기에 가장 편하고 유리해 보여서. 그런데 한 번도 제멋대로 굴지 못하고 늘 사람들을 신경 쓰고 혼자만의 상처를 안고 맘에 들이기 싫은 사람을 맘에 들여서 일기에도 쓰지 못하는 감정만 먼지처럼 쌓여갔다. 그렇게 쌓여서 어떤 우주가 만들어질까. 먼지 같은 제게 작은 불빛이라도 재앙처럼 커질 수 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린 기분이었다.


“내가 너 좋으라고 이름이라도 바꿔야 해?”


뭐든 말만 하면 다 들어줄 것처럼 물었다. 실은 절대 그럴 수 없었으면서. 계속 교실 앞의 뒤통수처럼, 저를 느끼지도 않는 정물 같은 모습이라도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걸 알려줄 수 없어서 심술만 났던 걸까.


“아니. 아무것도 바꾸지 마.”

“…….”

“이럴 줄 알았어.”


승은은 두 손으로 마치 제 마음을 일그러뜨리는 양 얼굴을 감쌌다. 가린 얼굴이 혹시 울고 있는지, 은정은 승은을 살피다가 마음이 나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뭐가 이럴 줄 알았다는 거야. 넌 항상 알쏭달쏭한 얘기만 해. 도무지 똑바로 할 줄 아는 걸 몰라. 늘 그렇게 고개를 돌린 얼굴로 어딜 보는데. 은정은 승은의 손을 잡아 내리고, 젖은 얼굴을 양 손으로 감쌌다. 그 못되게 굴었다는 애들을 사실은 너무 좋아해서 네가 아팠던 걸까. 은정은 예전의 저와 너무도 똑같은 상처가 보이는 얼굴을 마주하며 안정을 느꼈다. 천천히 눈가를 어루만지고, 문득 그대로 승은을 폭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정물 같은 네가 영화가 됐으면 좋겠어.


그래서 더는 너무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말라고, 손을 잡고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마음과 싸워야하는 사람들이겠지. 은정은 다시금 차분해진 승은의 시선이 어디로 향해있는지 선명하게 보이는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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